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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술라]를 읽었다. 번역으로 읽었으니, 영어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문으로도 참 변화무쌍한 문장을 구사하고, 작품의 구조가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하게 이것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읽고 나서 마음에 묵직하게 무언가를 남기는 작품이었다. 미국 흑인들의 생활, 역사. (흑인이라는 말을 그냥 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표현보다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흑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는데, 이번엔 [재즈]다. 재즈가 흑인 음악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딱딱한 형식에 갇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재즈라고 들었는데, 제목만 보고서 흑인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다 착각했다.
읽어보니 재즈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브루스라는 말은 좀 나오기는 하는데, 그렇다면 왜 제목이 재즈일까?
당시 - 이 작품의 배경이 1926년 경이다- 흑인의 삶은 백인에 의해 차별받는 삶이었을 것이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짐 크로법이라든지 해서 흑백분리가 일어났던 시대고, 백인에 의해 흑인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던 때였다.
그런 때 흑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비참함, 그것뿐이었을까? 아니다. 그들 역시 백인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갔다. 즉 삶의 형태는 인종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하고 갈등하고 욕망하고 좌절하고.
누군가 백인의 삶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않듯이 흑인의 삶도 그렇다. 이것이 재즈와 비슷한 점이 아닐까?
삼각관계(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의 반복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아니다.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삶을 재정립해 나간다.
도카스-조-바이올렛의 관계에서 펠레스-조-바이올렛의 관계. 얼핏 같은 구조를 지닌 갈등이 나타나고,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지만, 아니다. 다른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를 작가의 말을 빌리면 '즉흥성, 독창성, 변화, 이 소설은 그러한 특징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특징 자체가 되고자 했다.' (358쪽. 작가의 말에서)고 할 수 있다.
하여 이 소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술자인 나(아마도 작가로 추정할 수 있는)가 나오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재즈는 다음에 어떻게 변주될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다음이 나온다.
마찬가지도 이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나'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 인물들도 자신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수시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자 또한 수시로 바뀐다. 어떤 때는 조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바이올렛이, 또 도카스가 그리고 펠리스, 여기에 도카스의 이모인 앨리스 역시 서술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른 인물들이 한 이야기와 중첩되기도 하고, 그 인물들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하나가 아닌 여러 구조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는 구조가 의미와 동등할 것이다. 그 시도는 기교를 노출하거나 감추고 규칙들을 넘어서 실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단순히 음악적 배경이나 혹은 음악에 대한 수사적인 언급을 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음악의 지성, 관능성, 무질서, 다시 말해 그것의 역사, 범위, 그리고 현대성이 현현될 작품을 원했다.' (359-360쪽. 작가의 말에서)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한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을 만나게 된다. 또한 그것들이 모여 소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이 모여 새로운 길을 만든다.
도시로 온 조와 바이올렛이 겪은 일들에 도카스와 같은 다른 인물이 끼어들고,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이 소환되고 있다. 하여 처음에는 이미 벌어진 사건,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과거 회상의 이야기일지 모른다고... 단순한 구조일 거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서술자인 '나'는 '나는 누가 다른 누구를 죽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걸 묘사하기 위해 기다렸다. 사건이 발생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거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 없이 홈을 따라 끊임없이 돌아야 하는, 이 세상 어떤 힘도 바늘을 붙들고 있는 대를 들어올릴 수 없는, 혹사당하는 레코드와 같다. 나는 그렇게 확신'(337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재즈는 그러한 변화없는 틀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바로 실재하는 삶은 고정된 삶이 아닌 변화무쌍한 삶임을 깨닫게 한다.
'이제 내가 보는 그들은 미래의 오후 햇살에 윤곽선이 흐릿하게 번진 움직임 없는 묵화가 아니다. 지나간 과거와 미래의 당위 사이에 붙들린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 그들은 실재하는 존재다.' (346쪽)
이미 정해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인생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즉흥적으로 독창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관계 속에서...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가는 삶. 그것을 1920년대 흑인들의 삶을 통해서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읽은 토니 모리슨의 소설. 특정 인종의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여러 면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제목이 된 '재즈'는 소설의 내용, 구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