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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파란 눈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을 하다가도 선뜻 손에 잡지 못하는 이유는, 무언가 마음에 묵직하게 들어앉은 무거움 때문이다.
쉽지 않다. 편하게 읽기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극이 마음에 남아 글을 읽기 힘들게 한다. [빌러비드]도 그러했고, [술라]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읽어야만 해'라는 당위가 나를 자꾸 토니 모리슨의 소설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왜냐 토니 모리슨이 소설에서 펼쳐 보이는 세계가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소설 속 흑인들(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책에서도 흑인이라고 하니, 그냥 흑인이라고 하자)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 흑인들이 겪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를 툭하면 걸고 넘어가는 나라에서 여전히 인종에 따른 차별이 있다는 사실.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러니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서는 흑인 중에서도 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에.
속된 말로 하면 징글징글한 억압 속에서 그럼에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 그런 모습들. 하지만 그 삶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가장 파란 눈'.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 없이 백인들이 지닌 파란 눈을 의미한다. 흑인소녀 페콜라가 원하는 것은 '가장 파란 눈'.
당시 소녀들이 가지고 있던 인형들이 하얀(분홍빛 피부라고 나온다) 피부에 금발, 파란 눈을 했다고 하고, 인기 있던 소녀배우들이 그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백인에 맞춰져 있었던 것.
이런 현실에서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너도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결코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참 자랄 나이인 어린 시절에. 하여 토니 모리슨은 직간접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정해지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름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가치 기준을 백인의 기준에 맞추는 어른들의 모습도. 어린 시절의 흑인 소녀를 서술자로 하면서도, 페콜라의 엄마와 아빠도 역시 소설 속에 중요하게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왜 페콜라가 '파란 눈'을 원하게 되었는지, 또한 그것이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백인들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토니 모리슨은 '그녀는(페콜라의 엄마) 신체적 아름다움을 미덕과 동일시하면서 정신을 빈약하게 하고 구속하고 자기비하는 산더미처럼 쌓아올렸다. ... 영화를 통해 교육 받고 나니, 눈에 들어오는 얼굴마다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저울 위 특정한 범주에 넣는 일을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저울은 은막에서 그녀가 오롯이 흡수한 것이었다.'(152쪽)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백인들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식들에게도 대물림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야, 너는 너야." 라고 한다고 그 말이 먹힐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 속 페콜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파란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지만, 그것은 미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페콜라가 소망하는 일은 정신을 잃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운동이 있었다. 이는 백인의 기준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는 기준이 여럿 있다는 것. 그러니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 즉 백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너 미쳤구나, 너는 너 자체로도 아름다워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런 인식을 강요하는(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회를 인식하고, 사회의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일도 함께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했다. 성형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우리나라. 의사들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의사들이 성형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은, 성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사회 현실이.
그렇게 만드는 은막(텔레비전, 영화, 각종 인터넷 매체 등등)이 성행하는, 너무도 당당하게 '전과 후(before, after)'를 보여주는 광고들. 그러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이미 정해져 있고, 너는 그런 기준에 미달하니 성형을 해서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해라는 암묵적인 강요.
특히 연예인들을 통해 내면으로 파고드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에도 파고들어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소설 속 페콜라와 비슷한 경험, 생각을 하지 않는가.
추하다고 놀림을 받고, 성형을 하면 그것에서 벗어나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페콜라는 파란 눈을 가질 성형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흑인 집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집에서 그러한 일은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엉뚱한 사람을 찾아가 소원을 말하지. 하지만 이 소원을 듣는 사람도 백인이 아닌 백인성을 추구하는 혼혈인이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특정 기준을 따르려고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성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페콜라처럼 자신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 좌절에 빠지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라고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한데,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텐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되니... 쉽게 읽을 수 없는 소설임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