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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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인문학적 비빔밥이라고 하자. 

각자 자신의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가 되어서는 또다른 개성을 빚어내는 존재. 

비빔밥을 생각하면 된다. 

비빔밥의 재료들은 따로 존재해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역시 또다른 음식을 만들어낸다. 각자 다른 것들이 하나로 뭉쳐 입안에서 내는 그 맛이라니... 

강신주의 책은 인문학적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철학과 인생이 멋지게 어우려져 아주 맛있는, 멋있는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이 14명의 시인과 철학자들을 묶어놓고 있다는 점,  

책의 뒷면에 소개되어 있는 "시인과 철학자가 오른 인문학 봉우리 14좌" 

이 말에서 히말라야 최고봉 14좌를 연상했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일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 저 높은 봉우리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듯이 우리 자신을 관조할 수 있지 않을까? 

정상까지 오르는 그 괴로움이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지 않는가. 

결국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이라고, 강신주가 먼저 낸 책과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시 한 편에 그 시에서 연상되는 철학자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 철학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고, 결국 시와 철학과 인생이 하나로 엮여, 다름이 다름으로써 더 빛을 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시는 물론이고, 철학적 지식 또는 사유를 얻게 되고 그에 더하여 우리의 인생에 대한 성찰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비빔밥을 먹는 것과 같은 맛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 

우리도 한 번 이런 인문학적 비빔밥을 먹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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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시대 대중예술과 예술무정부주의 - 대중예술, 그 만만함의 미학을 풀다
박성봉 지음 / 일빛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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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예술이 된다. 

예술이라고 어떤 고정된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예술이 존재할 뿐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줄이면 이렇게 된다. 

그래서 지은이는 대중미술부터 시작하여, 대중만화와 애니메이션, 대중음악, 대중문학, 대중 TV, 광고, 대중영화, 대중적 퍼포먼스, 마지막으로 전자오락게임까지 다루고 있다. 이들을 모두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은이 스스로 예술무정부주의자 또는 예술무제한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대중예술이라고 하면 천박한, 가벼운, 시간을 죽이는, 진지하지 않은 등등의 부정적인 낱말들을 먼저 떠올리는데, 지은이는 대중예술이란, 문화 권력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예술 동네의 변두리로 밀려난 예술(17쪽)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정통예술이다, 대중예술이다 할 필요없이 그냥 예술 이러면 되는 것이다. 

이 예술에 게임까지 등장시키는데, 낯설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낯설지 않다. 스포츠를 예술이라고 하면 게임은 당연히 예술이다. 요즘 게임은 e-스포츠라고 하여 스포츠 대접을 받지 않던가. 그리고 바둑도 스포츠가 되어 있지 않던가. 

우리의 행위 중 멋지고 우리를 몰입하게 만드는 그 무엇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재미와 몰입을 다 지닌 게임이 예술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더 던진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읽으면 흥미진진한 예들이 많이 나온다. 물론 지은이가 읽은 그 많은 만화책들과, 지은이가 본 그 많은 영화들을, 연극들을 우리는 따라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읽지 않았다고, 보지 않았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작품들을 보고, 읽으면 그 뿐이고, 그 작품들을 가지고 이야기에 참여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술들이 소통하는 공간, 그 곳이 바로 예술이 꽃피는 공간이고, 그런 공간이 학교 교육에서부터 이루어진다면 사회가 예술사회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 책이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예술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지니는데, 이 책은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 예술을 한다고, 예술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 때에야만이 예술이 활짝 꽃필 수 있다고... 

결국 멀티미디어 시대의 예술이란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또다른 잣대를 지닌 남들과 소통하는 예술이다. 그 소통의 과정이, 소통의 공간이 바로 멋진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말들로 예술을 설명하는 책들에 기죽지 말자.  

우리도 이미 예술을 하고 있고, 예술을 알고 있지 않은가.  

자, 너만의 언어로 예술을 이야기하라. 그리고 또다른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남들의 말들에도 귀를 기울여라. 

이 책은 이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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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전집 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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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을 읽었다. 

긴 시간 동안 틈 나는 대로. 

시란 한 번에 장편소설을 읽듯이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냥 시간 나는 대로, 또 생각 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곳에 두고, 언제든지 마음이 가면 펼치며 읽으면 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기 싫으면 그냥 내버려두고. 

가끔 마음을 울리는 시가 있으면 그 시가 마음을 울리게 받아들이고, 머리를 자극하는 시가 있으면 기를 쓰고 생각을 해보고... 

이번 전집에는 [사랑의 감옥], [길,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가 수록되어 있다. 

이쉬운 점은 이 전집이 2002년에 발간되어 그 이후에 나온 시들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완전한 전집이라고 해야 하나? 오규원 시인이 2007년 나무 곁으로 돌아갔으니, 5년 간의 공백기가 있는 셈이다. 

내가 읽은 시전집2는 2009년에 초판 3쇄로 인쇄되었는데, 시인이 돌아가시고도 2년이 지난 다음인데, 개정판이 나오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이제는 오규원의 시가 더 발표될 리도 없는데, 전집을 개정판으로, 그의 모든 작품을 수록해서 발간했으면 좋겠다. 

그의 시들 중 이번에 마음에 드는 시는 허공과 길을 다루고 있는 시들이다. 허공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움, 그리고 길이 시작이자 끝이고 소통이자 불통임을 알려주는 시들이 마음에 와닿은다. 또한 모든 것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시들이 많다고 해야 하나. 

시인의 사물을 보는 눈이 참 부럽다. 

하늘과 돌멩이란 시다. 

담쟁이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작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 빈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오규원 시전집2(202쪽) 하늘과 돌멩이 전문 

 

이들 시도 좋지만,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동시집은 참 좋다. 

따스하다.  

사물을 보는 눈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중 하나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

산에서 시를 쓰면/시에서 나는 산냄새 

소나무, 떡갈나무, 오리나무의 냄새/산비둘기, 꿩, 너구리, 오소리의 냄새 

산에서 시를 쓰면/시에 적힌 말과 말 사이에/어느새 끼여 있는 그런 산냄새 

                                                                                   오규원 시전집2 산 전문(300쪽) 

천천히 시를 음미하자.  

온갖 들어선 안될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이 들어있는 시들을 읽자. 그리고 그런 말들이 세상에 퍼지도록 하자. 

세상에 퍼지기 전, 먼저 우리 마음에 퍼지도록 하자.  

우리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런 시적 언어들이 퍼진다면 세상엔 아름다운 말, 꼭 있어야 할 말들로 가득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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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 뒷담화
김용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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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나꼼수(나는 꼼수다의 줄임말)를 듣는 재미로 지낸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무엇 하나 재미없는 세상, 무엇이 상식인지, 도대체 상식이라는 말의 뜻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우리들에게 감춰져 있던 일들을 직설적으로 토해내고 있는 방송. 이 방송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자신이 할 말이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서 일지도 모른다. 

옛이야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자신이 할 말을 하지 못한 사람이 결국에는 대숲에 가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듯이, 우리는 우리가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 울분을 참고 참고 있었는데, 이런 가려운 데를 나꼼수가 긁어준다고 생각해서인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사회지도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꼼수에 대해 오늘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나는 꼼수다 선거법 위반으로 경찰 수사.  

그리고 나는 꼼수다에 출연하는 정봉주 전의원이 반발하고 있다. 방송을 제대로 들으라고...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는데 일등 공신이 나꼼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설마? 

하여간 방송을 제대로 잘 들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방송은 사실을 전달하는 방송이 아니다. 그들 말대로 사실에 입각하되, 사실 전달을 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가지고 자신들의 생각을 가감없이 내보내는 풍자 방송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 방송을 수사한다면 호응을 얻기가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꼼수다에 이어 나는 꼽사리다가 나왔고, 이와 비슷하게 20들의 애환을 거침없이 풀어내는 나는 껌수다란 프로도 나왔다. 

이들이 이야기하듯, 나는 꼼수다와 비슷한 매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긴다면, 말에 대한 사람들의 숨통이 좀 트이려나? 

아무튼 이런 방송, 돈도 얼마 들지 않고, 광고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광고도 받지 않으며 또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걸 숨겨두지 않고 표출해내는 방송, 우리 사회에서는 귀한 방송이다.  

격려해주고 지지해줘야 한다. 

언론이 살아야 세상이 산다. 언론이 죽은 새상은 이미 죽은 세상이다. 사람들이 할 말을 하고 살 수 있게, 아니 할 말을 하고 살자고 외치는 이런 방송,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으니, 굳이 들으라고 할 필요는 없을테고...  

돈벌이가 안되는 방송이니, 이 책의 수익금이 나꼼수를 만드는데 쓰인다니, 이런 책 열심히 읽어줄 일이다. 

사실, 나꼼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론인을 꿈꾸는 사람, 아니다, 참 언론인을 꿈꾸는 사람이 꼭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참 언론인은 앵무새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의 일을 해석하고 그를 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김어준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쫄지마!

이 말에 나꼼수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피디의 자질은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러한 정신으로 나꼼수의 탄생과 운영에 관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더불어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함께 읽으면 더욱 좋다. 두 책이 서로 통한다. 물론 둘이 함께 작업을 하니 그런 면도 있겠지만... 닥치고 정치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으면 나꼼수에 대한 이해가 더 쉽고, 반대로 읽어도 나꼼수에 대한 이해가 더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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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특정인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감정을, 생각을 다른 매체를 이용해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인만이 예술을 하는 사회는 닫힌 사회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을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한다면, 뭐 광고에서처럼 명화가 우리 생활에 들어온다든지 하는 그런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의 생활보다는 더욱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을텐데... 

예술적 감수성이 있는 국민들에게 저토록 일률적인 건물을 지을 수는 없을테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공의 손질로 바꿀 수 없을테고, 오로지 시험, 시험 하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을테고, 그리고 모두가 다 돈이 되는, 또는 명예와 권력이 있는 직업으로 달려가지 않을텐데... 

우리가 구불구불, 제 본성대로 흐르는 강을 직선으로 바꾸어 놓고, 인공 조형물을 설치하고, 인공으로 물을 가두어 놓는 그런 반(反)예술적인 행위는 하지 않을텐데... 

예전의 것들을 쉽게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만 바꾸는 모습을 지니지는 않을텐데... 

예술교육, 또는 교육예술이 필요한 때... 패러디를 이해 못해 처벌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을텐데...

예술적 감수성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을테니, 이는 교육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길러져야 할텐데... 그럴려면 지금의 교육은 변화해야만 하는데... 

예술교육이 아니라 교육예술이어야 한다는 이번 호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늦지 않았다.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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