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시사 : 1920~1945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한국근대시사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은 많다.

정말로 많다.

그만큼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책이 바로 시사이다.

연구자라면 한 번쯤 욕심을 내보고 싶기도 하리라.

자신이 공부한 시를 하나의 체계를 세워 책으로 낸다는 일,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다 보니 많은 연구자들이 시사에 관한 책을 냈고, 이 책들의 내용이 그만그만한 경우도 많았다.

또 이것저것 많은 연구성과들을 종합적으로 내세워서 일반인들이 읽기에 힘든 경우도 많았다고 할까...

 

이 책은 유종호 교수가 자신의 관점에서 또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근대시사를 정리한 책이다.

읽기도 쉽고, 또 많은 시인들에 대해 장황하게 알기보다는 주요한 시인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기억하기도 쉽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는 근대지향과 전통지향, 그리고 사회현실지향과 우리언어지향이라는 네 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고 했는데, 과연 이것이 충실히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뒤로 갈수록 시인의 시에 대한 설명이 많아지고 있는 반면에 이 시들이 이 축이 어디에 속하는지, 그리고 이 축들이 어떠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 시를 형성해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네 가지 축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아니 구분될 수가 없다. 전통지향과 근대지향은 구분히 가능하다 하더라고, 사회지향과 언어지향은 서로 나뉠 수 있는 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의 불가능성은 시의 기본이 바로 언어라는 사실에 있다.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시는 이미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든, 회화적으로 표현하든,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관심이 기본이라면, 근대시사의 축을 오히려 사회지향과 개인지향으로 나누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다치더라도 문학사에서 살아남는 시는, 좋은 시, 기억할 만한 시임에는 틀림없으니,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1920년 대에서 1945년까지 나온 시집, 또 시들은 우리가 알아야만 할 시들이다.

물론 유종호 교수가 쓴 이 책에 나오는 시들이 다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언급하지 않은 시들이 좋지 않은 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는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시사를 읽는 이유도, 이런 책을 통해 시를 평가하는 안목을 기르는 연습을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어떤 기준에서 좋은 시라고 하는지, 여러 문학사 책들을 읽다보면 자신만의 시를 보는 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눈을 통해 시를 더 잘 감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승호의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라는 시를 빌려서 말을 해보자. 제목을 비틀어서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정도로 하고...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1923년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로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 나온 시집의 주인공들은.

김   억,조명희,이하인,박종화,변영로,노자영,주요한,김동환,김명순,김소월,유도순,한용운,

최남선,권구현,이광수,황석우,김영희,김동명,유   엽,양주동,이진언,이은상,정영수,김성실,

모윤숙,허수만,장정심,박귀송,김한촌,황순원,김희규,백용수,정지용,김영랑,오신혜,백   석,

김기림,장재성,김인걸,이서해,윤곤강,박영희,이용악,오장환,이상필,정희준,이   찬,허이복,

장만영,노천명,이해문,조동진,임   화,조중협,최경섭,박세영,김광섭,김대봉,최병량,이하윤,

한죽송,김태오,김상용,박용철,함윤수,김광균,이병기,김기림,정호승,신석정,박남수,김이랑,

박팔양,안자산,김동일,김남인,김해강,이기열,김달진,박노춘,서정주,강홍열,임춘길,김용호,

이가종,이강수,권   환,차원흥,김기한,이태환,진금도. 다

권영민 편저, 한국현대문학사년표1, 서울대출판부. 1987년 초판본에서

 

누가 이들을 문학사에서 사라졌다고 하는가. 어찌 알겠는가. 그들이 어느 문학사에 나올 줄.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시집을 냈던 시인들.

아마추어리즘에 빠져있든, 아니면 치열한 시적 정신을 지니고 있든, 그들은 한 권 이상이 시집을 내고 우리나라에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문학사에서 언급이 되든, 되지 않든 그들은 이미 시인으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시인으로 존재할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떤 책에서 이들을 다시 언급할지 알 수 없으므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려진 시집을 낸 시인들이 이만큼이라는 사실이 우리 근대가 얼마나 빈약한지 알려주는 증거나 되나, 이를 딛고, 더 많은 시인들이 더 좋은 시를 만들어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20여년에 우리 시가 완전한 형태의 시로 자리매김하고, 시인이 시인으로 인정받는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종호의 책에서는 이들 중 몇 명만이 나온다.

그리고 이 목록에 없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 더 나온다. 가령, 이육사는 해방후에 시집을 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없지만, 그의 시들은 일제시대에 발표되었기에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한직도 마찬가지다. 그도 일제시대에 시집을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면에 발표를 해서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함형수란 시인은 '해바라기 비명'이란 한 시로 이 책에 언급이 된다.

그 시 하나로 그는 시단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인이 되었다는 얘기다. 행복한 시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많은 시집을 내도 문학사에서 지워져버리는 시인이 허다한데, 시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많은 시를 양산해내기보다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단 한 편의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인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를 다루고 있지 않은 점이다.

윤동주의 시집이 해방 후에 나와서 이 책의 년도와는 맞지 않지만, 그의 시들이 비록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가 쓰여진 시기는 일제시대니 다뤄줘도 좋으련만... 저자는 엄격하게 자신의 규정을 지키고 있다.

 

한국근대시사라고 해서 시를 전공하는 사람,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만이 읽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게 하는 책이다. 대중을 위해서 쓴 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문학전공하는 사람들이나 고르는 제목을 붙이면 잘 읽지 않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목이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냥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시인들이 있었구나, 이들이 쓴 시는 이렇구나, 이런 시들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의 시들이 나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은 다음 책을 덮을 무렵 더 풍부해진 상식과 지식으로 시를 보는 눈이 한층 더 좋아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우선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자.

그게 시를 이야기하는 책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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