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교육청에서, 아마도 교육감 권한대행인 부교육감의 결단(?)이겠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안을 서울시의회에 재심의 요청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서울시 의회의 정기회의가 열리면 이 안건이 다시 심의가 될텐데... 그동안에 서울시교육감의 재판이 어떻게 결정되어지느냐에 따라, 재심의는 취소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학생, 또는 청소년에 대한 인권조례가 교육감 역할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거부되거나 수용될 수 있다는 얘기는 청소년(이하 청소년이라고 하자. 학생은 청소년에 포함이 되니 말이다)은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않은 보호받아야만 할 대상이라고 규정짓고 있다는 얘기이리라.

 

너희는 자립하지 못하니, 권리를 어느 정도 유예해야 하지 않나 하는 대답이 돌아오리라. 그러나 자립의 문제와 권리의 문제는 다르고, 또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는 자립 여부를 떠나 누구에게나 존중되어야 할 권리이다. 게다가 청소년은 자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규제가 있나?

 

특히 학교라는 제도에서 벗어나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데, 자립을 못했으니, 권리를 유예하라니... 

 

겨우 학생인권조례라고 시의회를 통과시켰는데... 교육을 다루는 교육청에서 그를 거부하고 나서는 꼴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4호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청소년들도 이제는 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아니, 나서고 있다고.

 

그래서 특집 글이 "청소년, 그들의 저항 그리고 정치"다.

 

청소년들도 정치적 입장을 지녀야 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야 하며, 정치 공간에서 자신들의 권리가 관철될 수 있도록 조직하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한다. 많은 청소년 단체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공과를 파악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충분히 시도해야 할만한 문제고, 당연히, 그리고 시급하게 시도해야 할 문제다. 청소년이 조직되어 있었다면, 서울시 교육청이, 아니 서울시 교육청의 몇몇 관료들이 학생인권조례안을 거부하는 이런 사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몇 십년을 앞서가도 시원찮을 교육청이, 몇 십년을 뒤로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이 때 그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 든다. 이 책에도 나와 있자만 청소년의 권리는 어른들로부터 주어져서는 안된다. 청소년들이 찾아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니 말이다.

 

너무 앞서간다고? 아니, 청소년을 이렇게 사람 대접 안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한다. 다른 글들, 즉 청소년의 성을 말한 글을 보더라도 이는 잘 드러나고 있고, 또 청소년들의 대담에서 어른들, 더 나아가 진보운동을 한다는 어른들이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보호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청소년을 규정하는 한, 인권은 저 멀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나이,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권리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구분을 없애는 노력부터 해야 인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생각 못했던 부분, 생각하게 해 준다. 꼼꼼하게 읽어볼 일이다. 이 책은.

 

 

아직도 인권이 꽃피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인권이 꽃필 수 있게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끔 전철을 탄다.

먼 거리를 갈 경우, 전철은 책을 읽기 좋다.

아니 좋았다.

예전엔 신문을 보는 사람부터 두꺼운 책을 읽는 사람까지 참 많았다.

30분 이상 가는 거리일 때는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되었다.

여기에 책들을 보면 무슨 무슨 도서관이라고 책의 주인임을 알리는 표시도 된 책도 많았고.

 

하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아닌, 노래소리, 드라마 소리.

저마다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전자기기들.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들.

그러나 이어폰을 비집고 소리가 나오고 있다.

저렇게 크게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책이 없으면 차창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생각할 틈을 지니지 않는다.

생각은 이미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조금도 심심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심심함, 그 권태는 요즘 세상에서는 죄악이다.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니, 몸도 정신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생각이 자리를 잡을 여유도 공간도 없다.

 

책을 읽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줄어들었겠지.

서점에서는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찰길이 멀수록 복되다. (이태준의 '책'이란 수필에서)

따라서 전철에서 읽을 수 있는 크기의 책도 사라져가고 있다.

일명 문고판.

가격도 싸고, 손에 잡기도 좋고, 또 주머니에 넣기도 편하고.

일석 삼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주었던 그 문고판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직 나오고 있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전철을 타면, 이 디지털 시대에 아직은 아날로그로 살고 싶어진다.

그래서 가끔 전철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른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너무 무거워도 안되고, 너무 두꺼워도 안되고, 내용이 너무 어려워도 안되고...

그러다 한 권 고르고...

가는 내내 읽으며 생각하는 재미.

전철을 타고 가는 맛이 난다.

즐겁다.

 

이번엔 이태준의 무서록을 골랐다.

두서없이 쓴 글. 순서가 없는 글.

수필집이다.

순서 없이, 자기 생각을 체계적으로 썼기에 아무 부분이나 맘에 드는 부분을 고른다.

그리고 읽는다.

그냥 손가는 대로 읽는다.

첫 번째 무심히 펴들었는데... "책"이다.

이런 기막힌 일이.

순간, 즐거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가 말했다고 하지,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드러나게 된다고. 가끔은 그래서 얼굴이 험악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자체도 험악하겠다고 지레 짐작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모습에서 악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막상 그 사람 얼굴을 보면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경우가 많지 많았던가.

 

억압을 일삼는 독재자들도 자신의 집에서는 다정한 사람이듯이, 악은 그렇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보통 악은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은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지금은 흔하게 쓰는 이 말이 처음에는 아마도 충격이었나 보다. 그래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하겠고.

 

여기서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생각못함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음의 전형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이는 이미 과거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렌트가 이야기하듯이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 일어난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자신은 옳다고, 법과 명령에 의해 성실하게 일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 성실이 결국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이 지구에 해를 입히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많지 않은가.

 

언제고 어디서고 적용될 수 있는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우리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아니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 대신에, 생각못함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음이라는 이 두 말을 사용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지구에, 인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또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했을 대 옳은지, 옳지 않은지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때, 하나하나의 기술들이 단지 어느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지역에서의 문제가 지구의 문제가 되는 이 때에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지구적인 관점과 인류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이히만은 또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를 다만 법, 규칙과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고만 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할 것인가.

 

자신의 일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싶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 자신의 업무(?)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충실하게 임한 사람이 인류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렌트의 글들이 대부분 어려운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쉽다. 아마도 재판의 기록으로서, 보고서 형식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많은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장바구니담기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97쪽

아이히만의 성격 결함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104쪽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5쪽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 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106쪽

모든 진실은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 수많은 불행들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 달할 리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197쪽

이러한 특권적 범주들을 수용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보면 아주 재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외'이기를 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 규칙을 함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205쪽

덴마크에서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귀결, 즉 시민과 독립의 전제조건 및 책임에 대한 타고난 이해였던 것이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문명화된 민족의 거의 자동적인 일반적 인류애의 산물이었다.-260쪽

놀랍게도, 그리고 동시에 때때로 실망스럽게도 서구의 교육받은 유대인 '귀족'들 대다수는 일종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자율성은 원했지만 정치적 자율성을 원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265쪽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324쪽

오직 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334쪽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349쪽

악을 범한 자가 법정에 서야 하는 이유는 그의 행위가 공동체 전체를 어지럽혔고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지, 민사재판의 경우에서처럼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는 개인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은 아니다.-360쪽

대량학살이라는 범죄의 핵심은 전적으로 다른 질서가 붕괴되고 또 전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374쪽

일단 한 번 등장하여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행위는 그러한 발생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류에게 남는 것은 인간적 사건들의 본질 속에 놓여 있다. 어떠한 처벌도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는 충분한 억지력을 가진 적이 없었다.-375쪽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아이히만)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아이히만)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3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육 불가능의 시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기획, 엮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 무척 도발적이다. 현직 교사들이 주축이고, 또 현직 교사들을 주요 독자로 삼고 있는 책을 펴내는 곳에서 낸 책치고는 참, 학교와 먼 제목을 달았다.

 

교육불가능의 시대라니... 그렇담 학교 현장에 있는 교사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일에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하나 안 하나 상관없는 일이 있는데, 이 말대로라면, 교육은 할 필요가 없는 일에 들어감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미 교육불가능이라고 규정을 했는데, 아니다, 가능하다고 말하고 이 일에 종사하는 모습 자체가 동키호테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기 때문이다.

 

시대와의 불화, 그러면 시대를 고치면 되든지, 아니면 자신이 떨어져 나가든지 해야 하는데, 시대와의 불화를 인식하지 못하다면, 풍차를 향해 창을 들고 돌진하는 동키호테처럼, 남들이 보기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어이없는 짓,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목이 이렇듯 도발적인 이유는, 이 현실을 인정하자, 현실을 직시하자, 그래야만 근본적인 대책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공교육부터 시작해서, 전문계 교육, 대학 교육까지 그간 우리 교육을 지탱하고 있는 큰 틀들이 왜 불가능한지,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에필로그에서 안준철, 이계잠, 윤지형의 글로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는데...

 

두 문장을 생각했다.

 

하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글에 있었던 제목, 절망보다 사악한 것은 없다는 말, 그리고 또 하나나는 맹자에 나오는 말인 오십보 백보

 

절망보다 사악한 것은 없다는 말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사실, 이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 있는 안준철의 글에 나오는 '절망의 심화'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니체가 했다는 말인,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는 말로 대체하며 될 테다. 이런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이계삼이고, 이계삼은 이런 관점에서 교육불가능의 시대라고 했단 생각이 든다.

 

절망을 맛본 사람, 아니 절망까지 자신의 사유를 극한으로 밀고 간 사람, 이 사람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이 절망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전혀 새로운 방법을 내세운다. 이처럼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절망의 심화를 계속 밀고나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절망의 심화가 아니라, 교육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요구하고, 실천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오십 보 백 보라는 말, 저 멀리서 보면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말로 대체가능한데, 이는 멀리서 보았을 때, 또는 자신이 우위에 있어서 한참을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과연 오십 보와 백 보가 같을까?

 

아니다. 엄청나게 다르다. 맹자처럼, 준성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왕이 그 왕일테지만, 통치를 받고 있는 백성 입장에서 보면 오십 보와 백 보는, 전제적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왕과 그래도 백성의 처지를 조금은 고려해주는 왕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절대로 오십 보 백 보가 될 수 없다.

 

'오십 보 백 보'라는 틀에 갇혀 버리면 지금, 여기, 학교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으며, 교사들의 노력은 쓸모없는 일에 자신의 정력을 소비해버리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다는 자괴감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교사들이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맺는 작은 만남들이 하나하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 이런 논리가 에필로그의 안준철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 사실, 삶에 어떤 의미를 찾아야지만, 희망을 발견해야만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프랭클의 말처럼, 학교에서 작은 실천을 하는 교사들, 그들이 있기에 아직도 학교는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결국, 거대 담론인, 교육불가능을 인식하되, 이를 큰틀에서도 접근해야지만, 작은 실천들도 필요하다는, 교육불가능과 교육가능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이 책의 다른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큰 틀을 잊지 말되, 그 틀에만 매몰되지 말고, 자신이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러나 그 자리에만 매몰되지 말고, 큰 틀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실천하려는 자세를 지니는 모습, 그것이 바로 교육불가능의 시대를 돌파해나갈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