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참 많은 말들이 나온다.

 

말, 말, 말...

 

이 말들 중에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 얼마나 될까?

 

이 말들 중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말들이 얼마나 될까?

 

정치인들의 말을 불신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는 법조인들의 말조차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한 나라의 통치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시대 아니던가.

 

이 많은 말들, 난무하는 말들 속에 진실을 담은 말을 듣고 싶은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들을 귀가 없기에 자신들의 말만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해서, 예수의 말씀조차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헛된 말에 불과했고,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들이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시작하는 경전이 많은데... 진리에 이르는 길에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듣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말이 소용없어짐을 먼 옛날부터 성현들은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귀가 둘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이 행동하고 있다. 귀는 둘이고, 입은 하나인데,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수치로 따져도 귀가 더 많으니, 들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입은 귀와 귀 사이의 중간 아래에 달려 있다. 귀는 대칭을 이루면서 달려 있고.

 

대칭을 이룬다는 얘기는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보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반되는 말들을 함께 들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대칭을 이룬다는 얘기는 그 상반되는 얘기를 가운데서 곱씹어서 하나로 정리하되, 자신을 조금 낮추어서 말로 드러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귀 없는 시대. 오직 자신의 말들만을 내뱉는 시대가 되었다.

 

신문을 봐도, 텔레비전을 봐도 이 자기 말들밖에 없으니, 무엇을 들어야 할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들을 수 없게 되었는지...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모'의 가장 큰 장점은 '남의 얘기 들어주기'였는데... 남의 얘기만 들어주기만 하는 모모였지만, 모모 곁에 온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해결책을 찾았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

 

이해인 수녀의 '듣게 하소서'라는 시가 있다.

 

(앞에 생략)

 

이웃을 잘 듣는 것이 / 곧 사랑하는 길임을 / 내가 성숙하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듣고 /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무심함에서 / 나를 구해주소서

 

(가운데 생략)

 

나는 두 귀를 가졌지만 / 형편없는 귀머거리임을 몰랐습니다 /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 말만 많이 했음을 용서하소서

 

들으려는 노력도 아니하면서 / 당신과 이웃과 세상에 대해 / 멋대로 의심하고 불평했음을 / 지금은 뉘우칩니다

 

(뒤에 생략)

 

이해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분도출판사 135-137에서 인용

 

누구에게라도 이 시를 읽히고 싶다.

이 시를 읽어야 한다.

말만 난무하는 시대, 진실한 말은 듣기에서 나온다는 사실.

 

귀를 닫고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들부터 귀를 열어야 한다. 그리고 들어야 한다. 오죽했으면 불교에서도 듣기를 그렇게 강조해서 우리 곁에 가장 친숙한 보살이 관음보살(관세음보살)이겠는가.

 

이해인 수녀의 시집과 더불어 이 책을 꼭 읽어보자.

 

서정록이 쓴, "잃어버린 지혜, 듣기". 샘터. 

 

우리 듣기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잘 듣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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