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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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눅진눅진하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몸이 물에 젖은 옷을 입고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있지는 못하는데, 자꾸만 걸어야 하는데, 옷은 점점 무거워지는 상태. 그렇다고 길이 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그런 느낌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시집을 읽었다고 해야 하나. 무엇하나 선명하게 마음에 딱 다가오지 않고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선명함과는 거리가 먼 시들... 그런 시들을 읽으며 마음이 녹초가 된다. 그냥 축 처지게 된다. 세상에 시를 읽으며 어떤 희망을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시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다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명징한 언어의 세계에 살다가, 그런 언어를 좋아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언어를 만나, 이건 뭐지 하는 기분... 도대체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 그런데도 그 끈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조금만 더 읽으면, 더 생각하면 명징한 의미를 발견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 속에서 읽고 읽어도 계속 발에는 끈끈이가 붙어있는 듯 경쾌한 걸음을 걷지 못한다.

 

무겁다. 머리를 무겁게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결코 편하지 않다. 그러니 이 시집에서 어떤 명쾌함을 바랐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이게 이 시집의 장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여전히 이 시집은 깔끔하지 않게 다가온다.

 

시인은 이 시집을 1988년에 냈다고 한다. 이것을 2001년에 다시 냈다. 세기가 바뀌었는데 다시 출간한 시집.. 십 년이 지났는데, 세상이 변했는데, 그런데도 이 시집이 다시 나온 것은 시집이 지닌 불명확성 때문일 것이다. 불명확성은 불확정성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세월이 지나도 계속 의미는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발 밑이 끈적끈적하기 때문에 빨리 갈 수 없고,다시 돌아오기도 해야 하는 그런 시들.

 

제목에서도 이 눅진함이 느껴지는데... '젖은 구두'란 표현이다. '젖은 구두' 정말로 열심히 산 생활인의 신발이다. 발에서 땀이 나서 신발이 젖도록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모습... 그 사람이 잠시 멈춰서 젖은 구두를 '벗고' 다른 세계에 있는 '해에게 보여줄 때' 그때 어떤 생각을 할까.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주면 해는 젖은 구두를 말려줄까? 아니면 지금 말려도 소용없어. 넌 계속 걸어야 해라고 할까. 누구든 이 세상에 나왔으면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할 운명인 걸까? 그것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든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찾는데... 그래도 제목이 된 시가 시집의 대표격이지 않을까 하는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찾았더니, 이건 제목과 내용이 도무지 연결이 안 된다. 제목이 시 내용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참... 게다가 제목과는 몇 글자가 다르다.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 91쪽.  '를'이라는 조사가 들어갔고, '벗어'라는 말이 빠졌다.) 

 

그러다 제목이 아닌 첫 시행에 제목과 거의 같은 구절이 나오는 시를 찾았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있다. ('길에 관한 독서' - 169쪽,  첫행이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게게 보여주곤 했을 때'로 시작한다. 제목과 많이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이것 역시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이런 불명확성 속에서 계속 움직이며 걸어야 하는 사람들... 결국 길 위에 있어야 하고, 신발은 늘 젖어 있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의 운명, 또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이 시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멈춤은 곧 죽음이니, 삶은 움직임이요, 정류장이 아닌 길 위에서 걷고 있음이고, 이는 바싹 마른 신발이 아닌 젖은 신발, 젖은 구두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명확하진 않다. 시집은 계속 마음 속에 어떤 찜찜함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받아들여도 되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알라고. 꼭 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시인의 말에서 그 점을 느꼈다. 제발 하나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시인의 말' 제목이 바로 '자메이카 봅슬레이'다.

 

상반된 것이 하나로 묶여 있는 그 상태... 시는 이렇게 비슷한 언어들이 묶인 것이 아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들이 모여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그것이 시의 역할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이 시집에서 어떻게든 하나로 해석되지 않고, 명확하게 이성으로 정리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 삶은 본래 이런 모순적인 것이라고, 그 모순들이 계속 움직이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린 길 위에 있을 뿐이라고. 그 길을 가자고. 그렇게 삶의 다양성, 모순성들을 생각해 보는 이문재 시집 읽기였다고 위안을 하면서...

 

시집 읽기를 마쳤다고 할 수밖에...

 

위에서 언급한 두 시는 길어서 인용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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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의 배신 - 청년을 거부하는 국가 사회를 거부하는 청년
조한혜정.엄기호 외 지음 / 창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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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럴 줄은 몰랐다는 말을 절로 하는 시대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하다는 심정이 들 정도의 시대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전국에서 거의 200만의 사람들이 모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배신의 정치. 국민을 배신하고 특정한 몇몇 개인에게만 이익이 돌아가게 한 그런 배신.

 

눈 뜨고 코 베인 식으로 국민들은 엄청난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런 배신이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청년들에 대한 배신이다.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기성세대는 다음에 올 세대들이 제대로 성장하게 해야 하고, 청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적어도 청년들이 생존의 위협없이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게 할 의무가 기성세대에게 있다. 그리고 청년들은 당연히 기성세대들이 그런 환경을 만들었으리라 생각을 한다. 그것이 인류가 생존해나갈 기본적인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에 투자를 하지 않고, 그들이 제대로 자라게 하지 않은 종족은 계속 유지가 될 수 없음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이런 질문을 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 힘들다. 지금 청년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는 순간부터 이들은 무한경쟁체제에 들어서고, 승자독식을 경험하며, 협동보다는 경쟁을 먼저 몸으로 익히게 된다. 그러나 교육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선 순간 대다수의 청년들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빚더미에 올라 앉아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요즘 유행하는 '금수저, 흙수저'란 말이 나오는데, 돈 좀 있는 집 자식들은 학비 걱정없이 공부할 수 있지만, 돈이 없는 집 자식들은 학비를 충당하느라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내기도 힘들어진다.

 

게다가 엄청나게 비싼 학비로 인해 빚은 점점 더 늘어나게 되고, 이들이 기껏 대학을 마치고도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가능성은 낮다. 학점이 경제력에 비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무한경쟁을 실현하는 직장에서는 정규직이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적 노동현실은 사람을 기계처럼 일하게 만든다. 몇 년 일하다보면 자신의 몸과 정신이 소진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청년들이 셀 수 없이 많게 된다. 삶은 없고 오로지 처절한 생존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연애, 결혼, 출산은 남의 이야기가 된다. 삼포세대란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삼포만이 아니다. 오포, 칠포에 이어 아예 N포 세대란 말까지 나온다.

 

평생을 생존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외국으로 나가자는, 이런 '헬조선'을 벗어나는 '탈조선'을 하자는 청년들이 나온다. 그러나 '탈조선'을 한 그들 역시 생존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즉 '탈조선'에서도 '금수저, 흙수저'의 처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이건 배신이다. 청년에 대한 배신. 우리 미래에 대한 배신. 이런 사회에 청년들이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걸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런 청년들이 너무도 많은 현실, 그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 책에서 그런 청년들의 모습을 너무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암담한 청년들의 삶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청년들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도 볼 수 있고.

 

이건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노력을 한다. 그래도 이 사회에 적응하려고.

 

하지만 이런 청년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네 노력이 아직도 부족하다거나, 너는 능력이 없다는 조소와 냉대 뿐이다. 정말 '헬조선'이다. 지옥이다. 배신만이 난무하는 사회다.

 

배신의 시대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세대들이 바로 청년세대들 아닌가. 이들이 쓰는 말 중에 그 많은 '벌레들(䖝)'은 이런 시대를 언어로써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청년들의 암담한 현실만을 이야기하면 다가 아니다. 그러면 안된다. 이렇게 현실을 적시하는 것은 현실을 바로 인식하게 함이다.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현실을 바꿔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청년들만이 아니라 함께 사회를 바꿔가야 배신의 사회에서 신뢰의 사회로, 경쟁의 사회에서 협동의 사회로, '헬조선'에서 '헤븐조선 또는 헤븐 마을'로 바꿔야 한다. (영어와 우리말이 붙은 용어가 만들어졌는데... 사회에서 쓰는 말이니 그대로 쓴다. 지옥조선, 천국조선, 천국마을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니...)

 

어떻게? 이 책의 말미에 몇 가지 방안이 나와 있다. 이미 시작하고 있는 청년들, 기성세대들도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을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한쪽에서 한탄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그런 방법들을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간단히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우선은 기본소득으로 통칭될 수 있는, '청년 국민/시민 배당제도'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전국민 기본소득이 당장 실현하기 힘들다면 우선 청년들에게만이라도 기본소득을 배당하자는 것이다. 이들이 이 소득으로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현재를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성남시와 서울시에서 어느 정도 시도하고 있는데, 정작 이를 지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할 정부에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런 지자체의 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돈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돈은 기본일 뿐이다. 이것과 더불어 '자치/협치적 삶의 공간 만들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함께 삶... 그래서 '헤븐 마을 만들기'를 하자고 한다. 지옥이 아닌 천국. 환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 만들기. 그렇게 살아가기.

 

이런 공동체 만들기를 위해 교육제도를 바꾸자고 한다. 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경쟁과 적대의 교육에서 협동과 환대의 교육으로, 진정한 인간적 만남을 이루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그 방편으로 '갭이어' 제도와 '전환학년제'를 소개하고 있다.

 

적어도 한 해 정도 자신을 돌아볼 또는 그냥 쉴 시간을 주자는 것이다. 여행을 해도 좋고, 그냥 쉬어도 좋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좋고... 마음 놓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는 것. 이와 비슷하게 운영되는 사례가 있지만 아직 전면적으로 실시는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제도들이 전면적으로 실시될 때 배신의 사회에서 믿음의 사회로, 그래서 절망의 지옥의 나라에서 희망의 천국의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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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으로 읽는 예수
김경윤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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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종교인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국민 수보다도 더 많은 숫자가 나온다고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도 되고, 한 종교만이 아니라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이기도 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인이 많으면 우리나라는 사랑과 평화가 넘실대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도와주는 그런 사회여야 하는데, 어째 종교를 믿는 사람만큼 사회에는 평화가 또 사랑이 넘치지는 않는 모양이니 무언가 이상하다.

 

어떤 종교든 제대로 믿는다면 종교의 교리는 통할텐데, 종교로 인해서 세상에서 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이 종교의 역할인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종교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종교인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는 정말이지 종교를 제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저런 사람이 어떻게 종교인의 탈을 쓰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서 멀어지게 하기도 하는데, 소수의 몇 사람때문에 종교가 비난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 특히 종교에서 어떤 직책을 맡은 사람은 더한 책임감을 지니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기독교로 국한해서, 아니 예수로 국한해서 말하면 지금 예수는 너무도 높은 곳에 있지 않나 싶다. 너무도 높고 견고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감히 일반 사람들이 갈 수 없는, 우러러 보아야만 하는 존재로 예수를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 과연 자신을 우러르라고 했던가, 예수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땅에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수 스스로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섬김을 받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만 한다는 말을 예수가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예수는 빈부귀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다가가지 않았던가. 하여 예수는 제단 저 너머에 존재하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였지 않은가.

 

그 점을 잊고 예수를 우리 곁에서 떨어뜨려 놓은 것이 지금의 종교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만 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예수의 정신을 이 땅에서 실천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는 다시 이 땅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예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준다. 교회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다른 교회에(저자가 교회에 다시 다니게 된 조건이 이 책에 나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와는 좀 다르다. 이 교회는) 다닌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를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해주는데... 제목만 보아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중 몇몇 제목을 보면 '예수와 섹슈얼리티, 농부 예수, 개그맨 예수'라는 제목이 있으니, 예수가 저 멀리 존재하지 않고 바로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예수의 정신을 알 수 있는, 결코 성전에만 갇혀 있는 예수가 아닌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숨쉬며 살고 있는 예수를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제정신으로 읽는 예수'다. 그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예수를 마음으로, 감성으로만 받아들여도 좋지만 이성으로, 지성으로 받아들여도 예수의 정신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의심하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예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예수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교회에 갇힌 예수가 아니라, 교회 벽을 부수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8쪽. 저자의 말에서)

 

그래서 이 책에서 만나는 예수는 신이 아니다. 저 멀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고 심판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우리에게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를 보여주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를 친구라고 한다.

 

친구, 얼마나 좋은 말인가. 섬김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가는 존재, 함께 살아가는 존재... 친구 예수...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예수는 바로 이런 존재다.

 

그런 친구 예수,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예수다. 예수는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어떤 종교를 가졌든.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좋은 책 감사하다. 성전에 갇힌 예수, 천국에만 있는 예수가 아닌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예수를 보여준 책이다.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저자 역시 그런 말을 한다. 특히 청년들이 읽기를 바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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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고문이다 9

 - 고문으로 살찌는 사람들


고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대칭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던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제로섬 게임도 아닌데

사람들이 아프면 아플수록

살찌워가는 사람들이 있다

환자들이 병원비로 고문에 시달릴 때

이익만을 위한 병원을 세우려는

영리병원 추종자들,

이들에 기생에 번창하는 제약업계들,

환자들 돕는 척 부를 축적하는 보험업계들

그들에게 환자들은 봉이다, 병원은 돈이다, 생명이다


세상엔, 고문을 없애자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고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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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폭력 검은 저항 - KKK의 탄생과 흑인 민권 이야기 생각하는 돌 16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김충선 옮김, 오찬호 해제 / 돌베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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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파농의 책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떠올랐다. 하얀 폭력, 검은 저항이라니... 분명 인종문제와 관련이 있는 책이라는 생각.

 

작은 제목에 KKK의 탄생과 흑인 민권 이야기라고 하니, 오호라 미국 이야기군.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책이군 하는 생각.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그에 맞서는 흑인의 이야기를 파농의 책, 백인을 추종하려는 흑인을 비판한 책에 빗대어 제목을 붙였다.

 

원래 영어식 제목은 이게 아니었을텐데, 번역을 우리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붙였다. 파농의 책들이 이미 읽힌 상태에서 흑인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데는 이만한 제목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파농의 책은 흑인을 중심으로 흑인의 내면에 숨어들은 백인성 추구를 비판하는 내용이라면, 이 책은 백인들이 흑인들을 어떻게 차별하고 억압했는지를 중심으로 다룬다.

 

흑인 민권 이야기라고 하지만, 흑인들이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가 중심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는 영어 원래 제목대로 KKK라는 단체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가 중심이다.

 

남북전쟁에서 퇴역한 군인 여섯 명이 모여 어느날 우리 모임 하나 만들자는 말에서 만들어진 단체. 시작이 이렇게 우연에서 출발했지만, 이들의 우연은 곧 필연이 된다. 이름이 참 거창하겠단 생각을 하지만, 이 단어는 겨우 '모임-모임'이라는 뜻이라니..

 

이렇게 노예제를 찬성했던 남부에서 흑인들이 자신들과 동등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백인들이 흑인들의 권리가 신장될수록 자신들의 권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미국 남부 백인들은 어떤 두려움을 느꼈으리라. 이 두려움이 이들을 뭉치게 만들고, 폭력적으로 만든다. 힘으로 자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 자신들은 우월하다는 감정까지 가세하니, 흑인들이 자신들과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흑인들이 재산을 가진 것도, 교육을 받는 것도, 투표를 하는 것도, 또 흑인들에게 이런 권리를 알려주는 백인도 그들은 용납할 수 없다.

 

그 결과 그들은 폭력 행위를 벌인다. 혼자서는 하지 못하던 일을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저지른다. 자신들의 나약함을 가면과 집단 속에 숨겨두고 폭력으로 해소를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얀 폭력이다.

 

흑인들에 대한 테러, 흑인을 도와주는 백인들에 대한 테러. 남북전쟁에서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북군이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흑인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KKK의 폭력 앞에서 이들은 속수무책 당하기만 한다. 간혹 고소를 해도 백인은 무죄로 풀려나고 흑인들만 무고죄로 기소당하고 구속당한다. 게다가 KKK에 의해서 목숨을 잃기도 하고.

 

결국 연방정부가 개입해 사태가 어느 정도 무마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흑인들의 희생이 많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희생될 줄 알면서도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묵묵히 그곳에서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 의해서 흑인 민권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흑인과 백인의 구분은 불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시키는 일에서 흑인이냐 백인이냐 하는 인종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자유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내고 지켜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비록 전쟁에서 패했다고 하더라도 남부의 백인들 중 처벌받은 사람은 극히 드물고, 이들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흑인들을 예전처럼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적 안정을 원하던 북부의 정치인들이 미적거린 데서 흑인들은 몇 년 동안 극심한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비록 희생을 치렀더라도 그들은 이제 자유민의 삶에서 노예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런 자각, 이런 생활이 지지자들을 불러 모았으며, 스스로의 자각과 활동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갈 수 있었다. 이것을 검은 저항이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간혹 폭력적인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비폭력 저항을 한다. 떠나라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집을 지키는 것, 학교에 가지 말라는 말에 학교에 가는 것 등 폭력이 아닌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일들을 그냥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저항이 된다. 이렇듯 검은 저항에는 비폭력이, 인간의 존엄이, 인권이 담겨 있다.

 

그것이 노예해방선언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무려 100여 년의 시간이 더 걸렸을지라도.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완전한 인간적 존엄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들도 똑같은 인간임을 명심하게 한다.

 

이 책을 우리 사회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비단 미국이 아니라 우리 역시 이런 차별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 어쩌면 미국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차별을 우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지... 파농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노란 피부, 하얀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책, 바로 이 책이다. 다시금 미국에서 이런 차별주의가 일어나고 있다는 우려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한 번 자유민이 된 사람은 다시는 노예가 될 수 없듯이, 이미 신장된 인권은 후퇴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자리에서 확보된 인권이 후퇴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여기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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