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을 권리
김태경 지음 / 웨일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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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이라는 말. 이 말로 인해서 피해자는 또다른 피해에 시달리게 된다. 도대체 피해자다움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모두 다르지 않나. 같은 일이라도 대응하는 태도는 모두 다른데, 그것을 어떤 범주로 정해놓고, 그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말이 너무도 많이 적용이 된다. 피해자다움으로 인해서, 많은 피해자들이 또다른 피해를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2차 가해라는 말에는 가해라는 말이 있어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에는 가해라는 말보다는 태도에 관한 관점이 담겨 있어서 가해라는 생각을 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자다움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2차 가해에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그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피해자를 이렇게 대했던가 하는 생각.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이 책에는 너무도 많이 나와 있다.


책 제목이 '용서하지 않을 권리'라고 해서, 가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내용이 전개되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피해자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중심에 놓고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피해자를 먼저 생각하고, 피해자가 사회에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지낼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책이다.


특히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일들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하는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또다른 피해를 겪을 수 있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피해자에게 재판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는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이라는 말과도 연결이 된다. 피해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체득해왔던 이 말들로 인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하고 자신의 잘못을 찾는다고 한다.


우연히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에 대한 인과관계를 찾기 시작하면, 잘못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자신이 한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말로 안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았다.


네가 그렇게 했으니까, 네가 그렇게 하고 다녔으니까, 너는 맞을 만했으니까, 네가 조심했어야지, 왜 늦게 돌아다녀... 등등. 이런 말들이 난무하지 않았던가.


또한 섣부른 공감으로 피해자를 더 힘들게 한 경우도 많지 않았던가. 이번 이태원 참사로 인해 방송에 나온 한 유가족이 한 말.. 세월호 때 세월이 약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제 입을 찢고 싶다고... 


그렇게 공감이 겉돌 때가 있다. 그러니 피해자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처지에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 말보다는 듣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 섣부르게 단정짓지 말라는 것. 


이 책은 그렇게 '피해자를 바라보는 적정한 시선과 태도에 관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저자의 말. 이 책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의 목적은 범죄 피해자의 사건 후 경험에 대한 이웃들의 이해 폭을 넓히는 것, 나아가 피해 회복을 위해 이웃인 우리가 해야 할 지침을 제안하는 것에 있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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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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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소가 있다. 이 장소와 직접 관계맺은 사람은 둘이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이 장소에는 또다른 인물이 관계를 맺고 있다. 빌렘, 뮈텔 신부. 


소설은 이렇게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감정이 철저하게 절제된, 건조한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감정을 실을 수가 없다.


안중근이 이토를 쏘기까지의 과정이 긴박감이 느껴지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거기에 안중근이 느끼는 부담감 등이 서술되기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쉽다. 소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신문기사보다도 더 건조하게, 담담하게 사건이 진행된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듯하다.


그냥 운명대로 흘러갔다고 하는 편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그렇게 소설은 감정이 배제된 서술로 전개된다. 이토도 마찬가지, 안중근도, 가끔 나오는 우덕순 역시 그렇다. 그나마 감정이 좀 드러나는 사람들은 프랑스 신부인 뮈텔과 빌렘이다.


이들은 종교와 국가 사이에서 철저하게 종교 쪽에 선다. 자신들은 강대국의 국민으로, 그런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인지, 특히 뮈텔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소설 속에서 그는 황사영과 안중근을 비교하는데, 황사영은 종교를 위해서 나라를 없애도 된다는 쪽이었다면(그는 편지를 통해 서양 군대를 요청했다. 조선에...), 안중근은 종교보다는 나라를 위한 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신부들은 당연히 나라보다는 종교쪽이었고, 그들은 애국심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선교가 제약되지 않기를 바랐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빨리 근대화되기도 바라지 않았을 터. 


그들에게 중요한 일은 선교지, 선교할 나라의 발전, 그 나라 사람들의 독립, 민주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조하게 진행되는 소설에서도 이런 관점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뮈텔은 신앙과 문명을 군함에 실어서 세계에 전하는 조국 프랑스와 프랑스 왕과 프랑스 군대와 프랑스 교회를 위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뮈텔의 날들은 경건했다.' (251쪽)


이들의 종교는 무력에 의한 종교다. 무력이 없었다면, 그들의 선교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힘센 나라에 다른 힘으로(그것도 아주 약한 무력, 개인의 무력?으로 저항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에게는) 저항하는 일은 종교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니, 종교의 교리에 반하는 일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이 되는지, 종교는 철저하게 식민지가 될 나라와 구분되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이러한 관점이 비판적으로 제시된다. 안중근이나 이토에게 나오지 않는 감정 서술이 서양 신부들에게는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세계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선이고,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뮈텔이 말했다. 조선에 대학교는 가당치 않다. 조선인은 우선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조선인이 학문을 배우면 신심을 해치게 된다. 좋지 않다.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마라.' (184쪽)


이것이 본질이다. 그러니 안중근이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을 먼저 이야기하는 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데 문제가 있다.


하얼빈에서의 일은 종교와 상관없는 정치의 일이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문제고, 세계 정치에서 힘이 없는 약소국의 국민이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말이 막힌 사회다. 말은 강자들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강자들의 귀에 익숙해지고, 약자들에게는 명령으로만 존재한다. 약자들의 말은 강자에게 가 닿지 못한다. 그들의 말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다른 존재에게 가 닿지 못하는 말, 그 말은 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말이 기능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설은 그 점을 파고든다. 안중근의 거사는 말이다. 그는 이토를 왜 죽여야 하는지, 이토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토에게 너는 이래서 잘못했어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토에게 말할 방법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말은 결국 폭력을 통해서 주목을 받은 상태에서야 가능해진다. 이토 살해. 재판정에서의 말. 그러나 그 말도 결국은 강자에 의해 왜곡된다. 가려진다. 약자의 말. 그 말하기... 지금도 그렇다. 말은 늘 강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강한 사람의 말이 퍼뜨려진다.


약자의 말은 가려진다. 왜곡된다. 곳곳에서 약자들의 말이 들리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일을 보라. 안중근이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서 한 일을 생각하라. 그 말들을 종교가 어떻게 막았는지도 생각해 보라.


소설은 그 점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다시 하얼빈. 이 장소에는 안중근과 이토가 있다. 그러나 이 장소에는 말들이 있다. 제국주의의 말, 식민지를 벗어나려는 말. 이미 제국주의를 실현하고 그를 종교로 덮어버리는 말.


안중근을 도마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제국주의를 실어나르는 종교가 아니라, 식민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 그 종교에 귀의한 안중근. 그렇게 가야 한다.


김훈 소설, 하얼빈. 감정을 쏙 빼고, 하얼빈이라는 장소에 얽힌 두 인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여기에 프랑스인 신부들인 뮈텔과 빌렘이 등장해 말이 어떻게 가려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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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 루이스 세풀베다 산문집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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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이스 세풀베다. 오래 전에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소설을 읽고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왠지 믿음이 간다고.


그런 세풀베다가 2020년에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사람이 죽음이라는 세계로 가는 일을 피할 수 없지만, 이런 작가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세풀베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는 세풀베다가 만났던 사람들, 그와 친분을 맺고 지냈던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모두들, 라틴아메리카의 민주화를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세풀베다 역시 망명 생활을 오래했고.


그런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간 일을 글을 통해서 추모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추모,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을 잊지 않겠다는, 그들과 함께 추구했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가 나타는 글들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과 관련된 글이 있다. '친구가 된 노인'이라는 글인데, 그 소설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소설에 관한 내용, 라틴아메리카 작가나 예술가들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은 라틴아메리카가 독재로부터 벗어나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세풀베다가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가 아옌데에 대해서, 네루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첫번째로 실린 글은 칠레에 온 세풀베다가 (그는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오래 전에 찍은 칠레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그 사진 속 아이들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칠레의 현실이 과연 나아졌는가를 생각하게 하는데...


사진 속에 있던 아이 중에 한 아이는 세상을 떴고, 다른 아이들도 역시 희망을 잃고 있다. 이런 현실을 알리는 글을 세풀베다는 쓰려고 한다. 그것이 비록 힘겨운 일은 아닐지라도.


글 (아이들의 사진에 남겨진 빈자리:르포) 끝에서 세풀베다는 이 글을 쓴 이유를 말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다 쓰고 나면 국제 시민 사회의 연대를 지향하는 어느 잡지에 실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따뜻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세계를 있는 힘껏 지키고자 하는 전 세계 남자들과 여자들이 읽게 되리라' (63쪽)


이렇게 세풀베다는 암울한 현실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현실을 기록하고자 한다. 단지 기록에서 머물지 않고 발표하고자 않다. 잊지 않기 위해서, 용서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자세를 지닌 작가가 있으면 세상은 결코 암흑세계에 머물 수가 없다. 그런 암흑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들로 인해, 암흑 세계를 만든 이들을 잊지 않게 된다. 또한 용서하지 않게 된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세풀베다의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 라틴아메리카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세풀베다의 좌우명을 인용한다. '잊지 말라, 용서하지도 말라.'(111쪽)


우리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일,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하고 되새기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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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3-01-02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정말 사랑하는 소설입니다. 세풀베다가 먼 곳으로 떠났군요. 이 산문집은 꼭 읽고 싶네요

kinye91 2023-01-02 12:11   좋아요 1 | URL
저도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참 좋게 읽었어요. 이 책도 읽을 만해요.
 
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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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말은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말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떠돌고 있는 말들은 어떤가? 잇는 역할보다는 가르는 역할을 더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 사람을 살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그런 말들을 혐오표현이라고 하는데, 혐오표현인지도 모르고 쓰는 말들, 혐오표현인 줄 알면서 그렇기 때문에 쓰는 말들도 많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너무도 많은 말들이 사람을 가르고, 사람을 떨쳐내는 역할을 하고 있구나, 우리 사회에서 지금 그런 말들이 너무도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많은 말들,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누가 쓸 수 있는 말이냐도 꽤 중요한데, 언어의 다양성을 보장하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그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혐오표현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시작은 비유로 시작한다. 사람에게 여러 혀가 있다는 말로... 혀, 그렇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다른 혀들이 작동한다. 내가 쓰는 언어가 달라진다. 그런 언어들을 하나로만 묶으려 하면 안 된다.


언어에 권력관계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언어는 동등하다. 물론 혐오표현 언어는 빼고. 그렇지만 사투리를 썼다는 이유로, 또는 가난한 나라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특정 상황에서 어느 지역의 사투리는 정겨운 느낌을 주는 반면, 어느 지역의 사투리는 그런 느낌을 주지 못하고 저속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한다. 언어에 위계가 생기면,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차별이 따라온다. 그런 차별을 공고하게 하는 언어들이 발달하게 되고, 사람들과 사람들을 가르게 된다.


그렇게 말들은 미끄러진다.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엮여 있는 책인데, 글들이 마음에 자리잡는다. 생각해 볼만한 글들이 많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쓰는 말들이 혐오표현이 되지 않는지 끊임없이 점검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더 말이 필요없다. 이 책은 직접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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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피아드 -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세계신화총서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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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 하면? 우리나라는 신사임당, 외국에서는 페넬로페를 든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20년이나 집을 떠나 있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구혼자들의 압박을 물리친 여자. 정숙함의 대명사.


그렇게만 알고 있다. 오디세우스에서 페넬로페는 그렇게 간단하게만 언급된다. 주요 역할을 맡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그가 만난 수많은 여성, 여신들처럼,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만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를 정숙함, 현모양처의 전범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바로 남자들의 욕망이다. 여성이란 자고로 남성을 기다리면서 정숙함을 지키는 절개를 지닌 여인이어야 한다고. 정숙함을 지키지 못하면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오디세우스에서 하녀들이 그렇다. 하녀들은 구혼자들과 놀아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아무 힘도 없는 하녀들. 귀족이나 왕족들이 하녀들을 건드리면 과연 하녀들이 거부할 수 있었을까? 거부는 곧 죽음이었을텐데...


애트우드가 쓴 이 소설은 오디세우스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에서 가려졌던 페넬로페와 하녀들을 중심에 세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넬로페가 주요 화자로 나오지만, 악극 형식으로 하녀들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억울한 죽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삶들. 그러나 그들 역시 사람이었음을.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예속된 삶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가 애트우드에 의해서 펼쳐진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다.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생긴다.


여성의 입장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이렇게 풀어갈 수 있겠구나, 어쩌면 하녀들의 모습은 애트우드가 예전에 쓴 소설인 [시녀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구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예속된 존재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목숨조차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사람됨을 입혀주고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주체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 시대에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오히려 남자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산 사람은 헬레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


페넬로페와 반대로 나오는 헬레네는 이 소설에서도 시종일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방종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헬레네는 당당하다. 그냥 남성들에게 빌붙은 삶이 아닌 그들이 자신을 추종하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페넬로페는 이와 반대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오디세우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려 한다. 아니 녹아들어간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아직은 주체로 나서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시대의 한계로.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시대를 넘나들면서 페넬로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여성이 살아온 삶, 또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신화 속 인물을 재해석한 이야기. 현모양처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려 한 사람으로 페넬로페를 불러낸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 페넬로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또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다른 관점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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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2-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의 이런 책이 있었군요. 내용에 관심이 가네요.

kinye91 2022-12-29 18:59   좋아요 1 | URL
신화의 재해석. 어쩌면 페미니스트적인 글이라고 해야겠네요. 애트우드 다른 작품만큼 이 작품도 좋았어요.

yamoo 2022-12-29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있는데, 재미없을 거 같아서 처분할 목록에 넣어뒀는데....재밌으면 재고를 해 봐야 겠어요~

kinye91 2022-12-29 19:0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디세우스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서 좋고 재미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