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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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소가 있다. 이 장소와 직접 관계맺은 사람은 둘이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이 장소에는 또다른 인물이 관계를 맺고 있다. 빌렘, 뮈텔 신부. 


소설은 이렇게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감정이 철저하게 절제된, 건조한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감정을 실을 수가 없다.


안중근이 이토를 쏘기까지의 과정이 긴박감이 느껴지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거기에 안중근이 느끼는 부담감 등이 서술되기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쉽다. 소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신문기사보다도 더 건조하게, 담담하게 사건이 진행된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듯하다.


그냥 운명대로 흘러갔다고 하는 편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그렇게 소설은 감정이 배제된 서술로 전개된다. 이토도 마찬가지, 안중근도, 가끔 나오는 우덕순 역시 그렇다. 그나마 감정이 좀 드러나는 사람들은 프랑스 신부인 뮈텔과 빌렘이다.


이들은 종교와 국가 사이에서 철저하게 종교 쪽에 선다. 자신들은 강대국의 국민으로, 그런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인지, 특히 뮈텔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소설 속에서 그는 황사영과 안중근을 비교하는데, 황사영은 종교를 위해서 나라를 없애도 된다는 쪽이었다면(그는 편지를 통해 서양 군대를 요청했다. 조선에...), 안중근은 종교보다는 나라를 위한 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신부들은 당연히 나라보다는 종교쪽이었고, 그들은 애국심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선교가 제약되지 않기를 바랐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빨리 근대화되기도 바라지 않았을 터. 


그들에게 중요한 일은 선교지, 선교할 나라의 발전, 그 나라 사람들의 독립, 민주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조하게 진행되는 소설에서도 이런 관점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뮈텔은 신앙과 문명을 군함에 실어서 세계에 전하는 조국 프랑스와 프랑스 왕과 프랑스 군대와 프랑스 교회를 위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뮈텔의 날들은 경건했다.' (251쪽)


이들의 종교는 무력에 의한 종교다. 무력이 없었다면, 그들의 선교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힘센 나라에 다른 힘으로(그것도 아주 약한 무력, 개인의 무력?으로 저항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에게는) 저항하는 일은 종교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니, 종교의 교리에 반하는 일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이 되는지, 종교는 철저하게 식민지가 될 나라와 구분되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이러한 관점이 비판적으로 제시된다. 안중근이나 이토에게 나오지 않는 감정 서술이 서양 신부들에게는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세계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선이고,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뮈텔이 말했다. 조선에 대학교는 가당치 않다. 조선인은 우선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조선인이 학문을 배우면 신심을 해치게 된다. 좋지 않다.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마라.' (184쪽)


이것이 본질이다. 그러니 안중근이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을 먼저 이야기하는 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데 문제가 있다.


하얼빈에서의 일은 종교와 상관없는 정치의 일이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문제고, 세계 정치에서 힘이 없는 약소국의 국민이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말이 막힌 사회다. 말은 강자들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강자들의 귀에 익숙해지고, 약자들에게는 명령으로만 존재한다. 약자들의 말은 강자에게 가 닿지 못한다. 그들의 말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다른 존재에게 가 닿지 못하는 말, 그 말은 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말이 기능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설은 그 점을 파고든다. 안중근의 거사는 말이다. 그는 이토를 왜 죽여야 하는지, 이토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토에게 너는 이래서 잘못했어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토에게 말할 방법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말은 결국 폭력을 통해서 주목을 받은 상태에서야 가능해진다. 이토 살해. 재판정에서의 말. 그러나 그 말도 결국은 강자에 의해 왜곡된다. 가려진다. 약자의 말. 그 말하기... 지금도 그렇다. 말은 늘 강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강한 사람의 말이 퍼뜨려진다.


약자의 말은 가려진다. 왜곡된다. 곳곳에서 약자들의 말이 들리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일을 보라. 안중근이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서 한 일을 생각하라. 그 말들을 종교가 어떻게 막았는지도 생각해 보라.


소설은 그 점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다시 하얼빈. 이 장소에는 안중근과 이토가 있다. 그러나 이 장소에는 말들이 있다. 제국주의의 말, 식민지를 벗어나려는 말. 이미 제국주의를 실현하고 그를 종교로 덮어버리는 말.


안중근을 도마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제국주의를 실어나르는 종교가 아니라, 식민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 그 종교에 귀의한 안중근. 그렇게 가야 한다.


김훈 소설, 하얼빈. 감정을 쏙 빼고, 하얼빈이라는 장소에 얽힌 두 인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여기에 프랑스인 신부들인 뮈텔과 빌렘이 등장해 말이 어떻게 가려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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