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삶과 그늘진 삶이 공존하는 잡지. 어쩌면 끝과 끝을 이어주는, 그래서 사람들은 화려한 삶을 살아도, 또 그늘진 삶을 살아도 홀로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서로가 연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잡지. 빅이슈다.


  이 잡지에는 우리가 동경하는 삶이 나온다. 유명인들이 표지 인물로 주로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위치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고자 하는 욕망을 사람들이 지니고 있으니, 나보다 화려한 삶(겉보기에는)을 사는 사람들을 표지에서 보면 읽고 싶어진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빅이슈는 표지 인물들을 인터뷰하면서 화보도 함께 실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 등, 그들이 꾸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한 디저트를 소개하는 글은 어떤가? 음식이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삶에 또 하나의 풍부함을 더해주는 요소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디저트를 파는 가게의 모습이나 그 가게에서 파는 음식의 종류, 멋들. 이것이 남 이야기라고만 해서는 안된다. 바로 우리들 이야기여야 한다.


하여 빅이슈에는 해외에 관한 글도 있다. 해외 여행을 꼭 해야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세계 곳곳을 소개해줘서, 앉아서 해외 여행을 할 수도 있게 해준다.


반면에 빅이슈에는 그늘진 삶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빅판들의 생애를 듣고 쓰는 글이 생겼다. 이번이 세 번째 빅판.


그들이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노숙인이 되었음을,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 하는 모습을 빅판의 생애사에서 느낄 수 있다.


화려한 삶에서 느낄 수 없는 짠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짠함은 사람만이 아니라 버려진 동물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빅이슈가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까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참 좋다.


지금 코로나19가 두 해째 지속되고 있어서 어려운 지경에 처한 사람이 많다. 그 어려움을 각자도생이라고, 개인에게만 헤쳐나가라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나 연결되어 있듯이, 표지에 나오는 유명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표지 인물이 되어 주듯이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모두가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빅이슈에 나오는 다른 존재들, 그들이 연결되어 있음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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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출세작 -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 그림 이야기
이유리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수많은 화가들 중에서 지금 우리게에 알려진 화가는 몇 명?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나에게 알려져 있는 화가는 정말로 유명한 화가이리라. 미술에는 문외한에 다름 없으니까.

 

그럼에도 미술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더니 이제는 낯이 익은 이름들이 있다. 낯이 익은 그림도 있고. 여전히 많이 모르고, 낯선 작가들과 그림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러니 나에게 알려진 화가는 유명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유명했을까? 그들이 자신의 천재성을 처음부터 인정 받았을까? 물론 그런 작가도 있다. 피카소만 해도 어린 시절부터 나이들어서까지 천재 작가로 추앙받지 않았던가. 이 책에는 이런 피카소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죽을 때까지 무명 생활을 하던 작가도 있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고흐. 자,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작품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어떤 작가와 어떤 작품은 유명해지고 어떤 작가와 작품은 묻히고 만다.

 

거기에 사람과 때라는 것이 있다. 즉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부분. 우리가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실력을 돋보이게 해줄 운이 작동해야만 화가나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운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노력이나 재능을 알아준 사람으로부터 온다.

 

고흐가 죽은 다음에 유명해졌는데, 그의 작품은 지금도 전세계에서 많은 관람객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허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요한나가 고흐의 편지를 편집하고 번역하여 책으로 내고, 고흐의 그림을 버리거나 팔지 않고 보관했다는 사실. 고흐의 전시회를 열려고 노력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고흐가 지금처럼 유명해지게 된 데는 요한나의 공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요한나의 아들도 마찬가지.

 

삼촌의 작품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가 네덜란드에 기증을 했으니,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뮤지엄'을 통해 전세계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했으니, 그런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로댕에 관한 이야기도 새로웠다. 로댕이 기존 조각을 벗어나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오해를 많이 받았다는 사실. 그 유명한 로댕도 젊은 시절에는 무척 고생을 했다는 사실. 그러니 그의 작품이 논란을 일으키게 된 일이 오히려 로댕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니...

 

이는 뭉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좋은 쪽이든, 좋지 않은 쪽이든 작가들은 이름이나 작품이 언급되면 유명해질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이 알게 되기 때문인데...

 

우연한 계기라고 하지만, 우연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일이니, 화가의 출세작은 화가가 우연히 출세하게 된 작품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화가의 출세작은 그만큼 화가가 준비를 했고, 준비가 된 상태에서 그를 찾아온 기횔르 놓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많은 작가들이 나왔고, 그들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어서 눈호강도 하고, 작품의 이면에 있는 이야기도 알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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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27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들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
때가 있는 건 맞는것 같아요.
그 때가 죽은 이후에 다가온 화가들은 안타깝죠 ㅠ

kinye91 2021-09-27 09:45   좋아요 2 | URL
그래요. 죽은 다음에 그림을 인정받은 화가들, 안타까워요. 그래도 그들은 최선을 다했기에 언젠가 인정을 받지 않았나 생각해요.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과'라는 말로 붙어 있으니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근대 학교를 의미하리라. 근대 학교 제도가 산업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질의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학교 교육과정은 산업 노동에 맞게 구성되었으며, 교과과정 역시 산업문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짜여졌으며, 학교에서 알게모르게 주입되는 내용은 산업문명을 체화하도록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학교가 그렇다면 이제 산업문명을 넘어 제4차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는 과거의 학교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교육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제4차산업혁명에 맞게 학교를 재구성하자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도 스마트미래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온갖 전자기기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가 각종 전자기기로 최신화된 학교일까?


녹색평론은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산업문명이 끝나가니 제4차산업혁명기에 어울리는 학교를 만들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는 무엇일지, 인류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를 성찰하자고 한다.


일례로 이번 호에 실린 로웰 몽크의 글 '컴퓨터, 희극적이고 위험스러운 교육도구'는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 스마트미래학교라고 해서 각종 스마트 기기들을 학교에 들여와 그를 통해 교육을 한다는 발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절하게 융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 글의 제목처럼 될 가능성도 많다.


여기에 다시 문명 대전환이 필요하고, 그러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심성보, 문명 대전환을 위한 교육혁명)을 싣고 있다. 이 글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어도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심성보의 글은 지금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이다. 그는 '생태교육학 운동'을 주창하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지금 코로나19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전세계적인 재앙이라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미래 교육은 생태교육 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이 될텐데, 비판적 의식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꼭 제도권 학교에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오히려 제4차 산업혁명과 생태교육학이 만나는 지점이 제도권 학교라는 거대 권력을 해체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은 박민형의 글 '학교 없는 대안 교육, 어디 없을까'를 참조하면 된다.


그렇다고 학교를 모두 해체할 수는 없다. 학교와 학교라는 이름을 버린 교육 기관(장소, 단체?)이 함께 공존하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대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대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인간, 그리고 함께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산해야 하는가? 닉 콜드리의 글 '대학,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문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생각해도 좋다.


이제 코로나19로 4단계가 되어도 기존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수를 확대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한다. 그러나 학교는 과연 변했는가? 코로나19 이전의 학교와 코라나19가 한창인 지금의 학교, 또 코로나19를 이겨낸 다음의 학교는 같아야 하는가?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교육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학교 교육에 대해, 학교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과밀, 거대 학교로는 감염병 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겪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녹색평론 180호,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글들도 읽을 만하지만 지금 현안과 관련해서 이런 학교에 관한 글들 읽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과 연결지어서 이보 모슬리의 '민중의이름으로(6)' 실린 글을 곱씹어 보자. 우리 권리를 남에게 이양하고 손을 놓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욕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은 보통 선함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들 중 최량의 인간이라도 부도덕하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하며, 더 나쁜 경우에는 지독하게 사악하다. 개인적 야심은 교활함과 이중성에 통달하게 만든다. 야심가들은 "나는 공익을 위한다"고 말하고, 스스로 가장 먼저 그 말을 믿는다.

  국가 건설은, 법이나 기관을 세우는 일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권력과 야심을 억눌러서 그런 것들이 공익을 거스르는 쪽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178쪽)


  유권자들이 이러한 권력들을 '집단으로' 직접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도 그럴 시간도, 주의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이 권력들의 활동에 한계를 정하고 결정하는 일에 주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의미 있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179-180쪽)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많은 정치가들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국민'을 들먹이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들이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들려면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의미 있는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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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우리시대의 논리 27
조정진 지음 / 후마니타스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임계장'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할까?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직장은 정년이 있다. 그 정년이 57세부터 65세까지 다양하지만, 65세 정년인 직장은 거의 없다. 대부분 60세가 되면 정년이 되어 직장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 사회에서 60세면 편안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인가? 직장 생활을 30년 넘게 한 사람들이라고 그 다음부터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까? 산수를 해보자. 굳이 수학까지 갈 필요도 없으니.


지금 60대들은 결혼을 현재 젊은 세대들보다는 일찍 했을테니 남자로 계산하면 군대 갔다 오고, 가장 빨리 취업을 해도 20세 전후다. 그러니 20세에 취업했다고 하자. 그러면 40년을 근무한 셈이고, 결혼은 25세에 했다고 하자. 


그가 곧 아이를 낳았다면 60세가 되었을 때 큰 아이는 35세가 되어 있을테다. 그리고 둘째를 2년 터울로 낳았다고 하면 둘째 나이는 33세. 


지금 우리나라에서 35세와 33세는 운이 좋으면 직장을 갖고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퇴직을 한 다음에는 온전히 부모는 자신들을 위해서 살 수 있을텐데, 과연 그런가?


여기에 변수가 있다. 부모가 퇴직할 당시 빚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집을 얻기 위해 대부분은 빚을 지니고 있다. 자식들 대학에 보내드라 또다른 빚이 있고.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신용이 없어져 이 책에서 말하듯이 빚을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린다. 갚지 않으면 추심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니 그간 모아두었던 적금, 보험을 해지하고 빚을 갚아야 한다.


또 늦게 둔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 학비로 마련해야 한다. 결국 직장에서 정년을 하고 편안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빚이 없는 사람, 자식들이 모두 자립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한정된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정년을 하고 나면 살 길이 막막해진다. 그때부터 갚아야 할 빚과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돈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그들은 다시 직장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정년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고. 그런 사람들이 많은가? 이 책을 쓴 사람은 공기업에서 37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제2의 인생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살기 위해서.


이 사람을 보아도 '임계장'은 극소수에 해당하지 않는다. 많은 정년퇴직을 한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직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을 필요로 하는 직장은 대부분 계약직이고, 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 대기하고 있어서 해고하기도 편한 그런 곳이다.


아파드 경비원, 빌딩 관리인 등등이 바로 그런 곳이다. 많은 정년 퇴직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고, 또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러니 '임계장'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3D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계장'들이 하는 일은 우리 생활에서 꼭 필요하지만 남들 눈에 띠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들이다. 그들은 소위 3D라 불리는 일을 한다.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들. 그 노동으로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지낸다.


그러면 고마워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 책임을 이들에게 묻는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넘어져도 경비원 책임, 자기 차에 흠집이 생겨도 경비원 책임, 쓰레기가 넘쳐도 경비원 책임 등등...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아파트 주민들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있다. 오죽하면 아파트 입주민의 갑질로 목숨을 끊는 경비원들이 나오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편리하게 사는 대가가 바로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이런 일들은 잘하면 표가 안 나고, 못하면 바로 표가 나는, 그래서 지적을 하기 쉽고, 주민들 입장에서는 큰소리 치기 쉬운 일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정말 선량한 사람들도 많지만, 극소수의 사람이 갑질을 한다해도 그 여파는 상당하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데, 경비원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그런 아파트라니...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나? 아니지, 아직도 보이지 않게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겪은 일을 알게모르게 저지르고 있지 않나.


'공부 안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 이게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자식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겠는가. 그러니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한 존중. 또 자신들이 왜 깨끗하고 편리한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태일의 외침은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면서 '임계장'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온몸을 불사른 지 50년이 되었는데도 노동자들의 조건은,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전태일의 외침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아직도 전태일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아침에 집을 나서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은 현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더욱 힘든 삶을 지니는 '임계장'들. 또 이런 사람들을 자기들끼리 감시하게 만드는 관리자들.


아프면 치료해주지 않고 곧바로 해고하는 그런 직장들. 대기업이라고 들어가도 대기업 직원이 아닌 용역업체 직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현실. 일은 대기업이 시키면서도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용역회사에 떠넘기고, 용역회사는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그런 일들이 여전히 비일비재하고 있으니.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그러니 우리 사회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빌딩 관리인이 되었을 때 본부장 차는 지정 주차 구역이 있고, 이를 잘못 알고 다른 차를 주차시켰을 때 난리가 나는 현실.


또한 경비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경비반장에게 맡기고, 그에게 정년 연장과 근무에서 특권을 부여해 그로 하여금 회사에 충성하게 만드는 그런 노동 관리 실태.


신영복 선생이 그랬던가. 감옥에 있을 때 한여름 더위에는 바로 옆에 있는 감방 동료들이 미워진다고, 어쩔 수 없이 붙어자야 하는 그들에게 한여름 더위는 견딜 수 없는 일인데 그 화살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가기 쉽다고 했다.


경비반장 역시 자신이 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겠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의 경비원들을 감시하고 회사에 신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그렇게 하기를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환경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조직이 되지 않았고, 또 조직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사회


하지만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도울 때도 많다. 휴가를 가기 위해서는 대체 근무자를 구해야 할 때 함께 구해주는 모습이나, 감기에 걸리면 동료에게 옮길까봐 홀로 나가 자는 고속터미널 관리인들. 


이런 모습들. 또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친절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자신의 마음을 담은 물건을 주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들도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고속터미널의 상무라는 사람, 핀셋으로 이쑤시개까지 주우면서 관리원들에게 보여주는 모습, 자 이 모습이 어떤가? 


고속터미널 환경 관리를 관리원들이 하기 힘드니까 도와주는 모습으로 보이는가? 아니, 그 모습을 본 관리소 직원들은 관리원들을 다그친다. 상무님이 왜 저런 일을 해야 하냐고? 이는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에게 일을 더 시키는 모습이다.


오죽하면 상무는 관리인들이 화단에서 이쑤시개를 찾아 청소하는 관리인들을 보면서도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이는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다.


강자는 약자를 편들어 주어야 한다. 약자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좋은 사회는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그래서 약자들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회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사회다. 우리도 '임계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임계장'을 우리만큼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여기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


이 책을 참 짠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저녁이 있는 삶이 아직도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있는 삶. 이를 더 넓게 확장하면 노년이 있는 삶이다. '임계장'들이라고 불리지 않고 '제2, 제3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어야 젊은이들도 행복하지 않을까 한다.


'임계장'이 젊은이들의 미래가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젊은이들의 미래가 되어야, 그런 사회가 함께 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함께 살기 위해,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 내 삶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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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노동자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낮은 곳에 있으면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이 묻혀버리고 만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왜 주장하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가장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주목받는 삶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게 되는 노동자들. 식민지 시대 노동자만이 아니라 지금 노동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


체공녀 강주룡. 강주룡이라는 이름은 을밀대와 더불어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을밀대 위에 올라가 자기 주장을 펼친 노동자. 그리고 그 강주룡이라는 이름과 지금 우리 시대의 김진숙이 겹쳐진다. 을밀대 위와 타워크레인 위.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다 얻었는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것도 불법이라는, 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


소설은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해 간다. 간도에서의 삶, 결혼, 남편의 죽음, 조선으로 귀환, 다시 시집을 보내려는(딸을 팔려는) 가족으로부터 도망, 평양에서 고무공장 직공으로 살아가는 모습, 파업에 참여, 을밀대에 오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냥 읽어도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여성으로 식민지를 살아가는 데에는 남자들보다 더 많은 질곡이 있음을 강주룡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원하지 않는 결혼, 그 다음에 독립군에 참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모습은 지금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이 소설에서 강주룡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사실관계를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소설이니까. 그런데 이 소설에서 표현된 강주룡의 모습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르니, 전쟁은 확실히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 또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근대적, 가부장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 군대내 성폭력 사건을 보면 그런 일이 전근대적 사건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 그것도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이 소설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데, 이 점은 강주룡이 평양에 와서 노동운동을 하게 될 때에 겪게 되는 일과도 겹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인데, 이들이 콜론타이 저작을 읽고 토론을 한다. 정작 여기에 참석한 여성은 강주룡 혼자 뿐. 이때 강주룡이 그들에게 한 말은 두고두고 생각할 만하다. (201-202쪽)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독립운동을 하건, 노동운동을 하건 거기에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소설은 비켜가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루면서 강주룡을 통해 지금 너희들은 어떠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소설은 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강주룡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강주룡의 외침이 허공 중에 사라지지 않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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