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과'라는 말로 붙어 있으니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근대 학교를 의미하리라. 근대 학교 제도가 산업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질의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학교 교육과정은 산업 노동에 맞게 구성되었으며, 교과과정 역시 산업문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짜여졌으며, 학교에서 알게모르게 주입되는 내용은 산업문명을 체화하도록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학교가 그렇다면 이제 산업문명을 넘어 제4차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는 과거의 학교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교육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제4차산업혁명에 맞게 학교를 재구성하자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도 스마트미래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온갖 전자기기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가 각종 전자기기로 최신화된 학교일까?
녹색평론은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산업문명이 끝나가니 제4차산업혁명기에 어울리는 학교를 만들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는 무엇일지, 인류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를 성찰하자고 한다.
일례로 이번 호에 실린 로웰 몽크의 글 '컴퓨터, 희극적이고 위험스러운 교육도구'는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 스마트미래학교라고 해서 각종 스마트 기기들을 학교에 들여와 그를 통해 교육을 한다는 발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절하게 융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 글의 제목처럼 될 가능성도 많다.
여기에 다시 문명 대전환이 필요하고, 그러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심성보, 문명 대전환을 위한 교육혁명)을 싣고 있다. 이 글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어도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심성보의 글은 지금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이다. 그는 '생태교육학 운동'을 주창하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지금 코로나19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전세계적인 재앙이라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미래 교육은 생태교육 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이 될텐데, 비판적 의식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꼭 제도권 학교에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오히려 제4차 산업혁명과 생태교육학이 만나는 지점이 제도권 학교라는 거대 권력을 해체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은 박민형의 글 '학교 없는 대안 교육, 어디 없을까'를 참조하면 된다.
그렇다고 학교를 모두 해체할 수는 없다. 학교와 학교라는 이름을 버린 교육 기관(장소, 단체?)이 함께 공존하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대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대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인간, 그리고 함께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산해야 하는가? 닉 콜드리의 글 '대학,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문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생각해도 좋다.
이제 코로나19로 4단계가 되어도 기존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수를 확대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한다. 그러나 학교는 과연 변했는가? 코로나19 이전의 학교와 코라나19가 한창인 지금의 학교, 또 코로나19를 이겨낸 다음의 학교는 같아야 하는가?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교육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학교 교육에 대해, 학교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과밀, 거대 학교로는 감염병 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겪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녹색평론 180호,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글들도 읽을 만하지만 지금 현안과 관련해서 이런 학교에 관한 글들 읽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과 연결지어서 이보 모슬리의 '민중의이름으로(6)' 실린 글을 곱씹어 보자. 우리 권리를 남에게 이양하고 손을 놓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욕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은 보통 선함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들 중 최량의 인간이라도 부도덕하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하며, 더 나쁜 경우에는 지독하게 사악하다. 개인적 야심은 교활함과 이중성에 통달하게 만든다. 야심가들은 "나는 공익을 위한다"고 말하고, 스스로 가장 먼저 그 말을 믿는다.
국가 건설은, 법이나 기관을 세우는 일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권력과 야심을 억눌러서 그런 것들이 공익을 거스르는 쪽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178쪽)
유권자들이 이러한 권력들을 '집단으로' 직접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도 그럴 시간도, 주의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이 권력들의 활동에 한계를 정하고 결정하는 일에 주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의미 있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179-180쪽)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많은 정치가들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국민'을 들먹이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들이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들려면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의미 있는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