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과 제국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정철호 옮김 / 현대정보문화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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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을 읽기 전에 이 소설을 먼저 읽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을 펼치고 찾아본 이름에서... 다닐... [파운데이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로봇 아니던가. 그런 로봇이 여기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스카드라는 로봇과 함께.


처음 시작은 우주인(이 소설에서는 인류를 두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한 부류는 지금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종족과 같은 수명이 채 100년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수명이 거의 400년에 달하는 개량된 인간들이다. 앞에 언급한 인류는 이주민-지구에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 온 지구인이라는 뜻-으로 불리고 뒤에 나오는 인류는 우주인-이들도 역시 선조는 지구인이지만, 그들은 지구인과 단절되었다-이라 불린다)인 글래디아라는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로봇과 함께 오로라라는 행성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던 글래디아는 어느 날 두 사람의 방문을 받고 전혀 새로운 삶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한 명은 한 때 자신이 사랑했던 지구인의 후손인 이주민들이 사는 베일리 행성에서 온 베일리이고, 또 한 명은 오로라 행성에서 출세 욕심을 지닌 맨더머스라는 인물이다.


맨더머스는 지구를 파괴할 생각을 가진 젊은 공학자인데, 글래디아의 후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을 확인하러 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글래디아의 후손은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온 것.


그가 다음에 올 손님으로 베일리를 알려주는데, 베일리는 오로라 행성에서 별일 없이 살아가던 글래디아를 솔라리아 행성으로 데리고 간다. 솔라리아 행성. [파운데이션]에도 나왔던 행성이다. 물론 오로라 행성도 나왔고.


여기에 가지 전에 두 로봇, 다닐과 지스카드가 등장하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서술이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이 글래디아라는 인간이 아닌 로봇임을 짐작하게 한다.


즉 글래디아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스카드의 부추김으로 행동하게 된다. 사람의 심리를 조종할 수 있는 로봇. 이는 사람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로봇이란 뜻이고, 여기에 사람과 외양이 흡사해 얼핏 보면 사람과 구별할 수 없는 로봇인 다닐이 나온다.


아시모프가 창안한 로봇 3원칙에 의하면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데, 솔라리아의 로봇은 솔라리아인이 아닌 이주민, 우주인들을 공격한다. 글래디아가 어린 시절 솔라리아에 살았기 때문에 솔라리아 로봇이 글래디아를 공격하지는 못하지만 베일리나 다닐은 공격 당한다. 이는 로봇이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다닐과 지스카드는 로봇 3원칙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을 공격하지 않아서 더 많은 인간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보통은 인간이 난제를 풀어서 로봇을 프로그래밍 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뛰어난 공학자라도 아직 지스카드가 사람들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지스카드라는 로봇은 인간과 너무도 다른 로봇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로봇일 뿐이다. 즉 뒤떨어진 로봇으로 취급되고 있는데...


지스카드의 능력은 소수만이 알고 있고, 그 능력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미 죽어서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로봇이 생각을 하면서 어떤 행위가 진정 인간을 위하는 일인지를 결정해 가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1권에서는 아직 그 활약이 미미하다. 글래디아 뒤에 숨어서 아직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솔라리아에서 살아남아 베일리 행성으로 간 글래디아는 우주인과 이주민이 다 같은 인류라는 생각으로 평화 운동에 헌신하기로 한다.


그런데 갑자기 베일리 행성에서 잘 지내고 있는 글래디아를 오로라 행성으로 돌려보내라는 전언이 오고... 소설은 또다른 사건을 향해 달려간다.


2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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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이 바뀐다 교육이 바뀐다 함께 걷는 교육
교육의봄 외 17인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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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채용이 상당히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 학생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으니, 기업에서 채용하는 방식이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학벌 사회라고 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면 취업에 유리하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려고 아등바등 대는 경우가 많았는데, 학벌에 대한 중요도가 떨어지면 대학입시로 대변되는 교육이 바뀔 수가 있다.

 

아니,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 학생이 초, 중, 고를 입시를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은 학생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도 낭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이 쉽게 바뀌나? 교육 분야만큼 보수적인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교육은 변화에 느리다. 사회가 다 변한 다음에 그것이 겨우 교육에 반영된다고 할 수 있는데.

 

노동자를 채용하는 기준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아직 체감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 IT기업에서는 학벌을 보지 않게 된 기간이 오래 되었으며, 외국인 기업들에게는 우리나라 대학 서열이 그리 의미가 없다는 사실, 공기업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인해 블라인드 채용이 대세가 되고 있고, 금융권에서도 블라인드 채용이 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대기업에서도 아직까지는 학벌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블라인드 채용과 비슷하게, 학벌보다는 능력을 중심으로 뽑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지금 채용이 되기 위해서는 학벌보다는 능력이, 직무 능력이 우선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사실을 여러 통계 자료와 그 기업에서 채용을 담당했던 사람들, 또 채용과 관련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토론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의 채용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것을 교육이 어떻게 반영해야 학생들이 추세를 따라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이러한 채용의 변화를 잘 정리해주고 있어서, 그 부분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미래 사회 핵심 역량 중 첫 번째는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즉 자립심이고 두 번째는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세 번째는 이질적인 집단에서 소통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세 역량을 길러내는 데 있어 한국 교육과 가정이 매우 인색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스펙은 화려하지만 학원과 부모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창의적인 존재보다는 주어진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해 암기하는 교육에 열중하고 있고, 성적이 비슷하고 집안 경제 수준도 비슷한 동질 집단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질적인 집단 속에서 길러지는 소통 능력을 키울 기회가 없습니다. (359-360쪽)

 

자, 이런 추세에서 지금 교육대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학생들이 살아갈 미래에서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교육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교육은 과거의 지식을 배우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교육은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누가? 이 책의 정리 부분에서 하는 이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미래를 살아가도록 해야 할 부모와 교사들이 어쩌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에게 역량을 교육하는 실천과 입시제도를 도입하고 주장하고 외쳐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이들을 지켜야 할 부모이고 교사입니다. 입시제도를 고치는 힘은 정부와 정치인에게 있는 것 같지만 그들도 유권자들이 움직인 만큼만 움직입니다. (372쪽)

 

자, 입시제도를 정부에서 고쳐주기만 바라고 손을 놓고 있는 부모와 교사들은 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모가, 교사가 먼저 주장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 교육제도를 유지하면 아이들에게 미래는 없다고. 반드시 지금, 고쳐야 한다고. 직장에서 채용하는 방법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고.

 

그럼에도 지금 우리나라는 백신 접종을 안 하면 학원에 등원하지 못하게 한다고 난리다. 학원이 무엇인가? 입시에 최적화된 학습기관 아닌가.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너도 나도 학원에 보낸다. 이런 부모들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으면 학원에 갈 수 없다고 하면, 백신 접종은 부모들에게 의무가 된다. 꼭 해야만 하는.

 

그러니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학원에 보내려면 백신 접종을 해야 한다고 부글부글한다. 국민청원도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서도 입시제도에 의해 아이들이 시들어가는 일에는 눈감고 있다.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 책을 쓴 사람들, 단체, '교육의 봄'에서 시도하고 있는 일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이미 변해 있는 사회를 이들이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을 이렇게 바꿔 이해해야 한다. '채용이 바뀐다 교육이 바뀐다'에서 '교육이 바뀌어야 채용이 된다'고. 학생들이 청년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육을 바꾸어야 한다고. 꼭 취업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학생들, 청년들도 자신들의 교육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모와 교사들이 나서야 한다.

 

덧글

 

출판사 책 응모에 당첨되어 책을 받아 쓰게 된 글. 채용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교육이 정말로 많이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

 

#채용이 바뀐다 교육이 바뀐다

#우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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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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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제목에서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절벽 끝에서 한 발을 내딛는 용기. 그것은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행위다. 끝이라고 더이상 갈 곳이 없다고 뒤돌아서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얻으려면 끝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한 발 더 내딛기 위해서.

 

르 귄의 이 책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너머로 가고자 하는 르 귄의 노력이 글 속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그렇게 르 귄은 자신을 옥죄는 세계에 갇히지 않고 그 세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나아갔다. 또 작가로서 르 귄을 말한다면 르 귄은 이미 존재하는 세상만이 아니라 상상 속의 세상을 창조해냈다. 그야말로 '세상 끝에서 춤을 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르 귄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설, 일반적으로 서사는, 주어진 사실에 대한 가장이나 왜곡이 아니라 선택지와 대안들을 제기하여 환경에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과정이자, 현재 현실을 증명할 수 없는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연결하여 확장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85-86쪽)

 

이보다 세상 끝에서 춤을 춘다는 말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을까? 소설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한 세계에서 멈추지 않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해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상상력만이 우리를 영원한 현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으며, 상상력이 길을 발명하거나 가정하거나 꾸며 내거나 발견하면 그제야 이성이 그 길을 따라 무한한 선택지 안으로 뛰어들 수 있다. 선택의 미로 안을 통과하는 하나의 단서이며 미궁 속의 금실인 그 길, 이야기가 우리를 제대로 인간일 수 있는 자유로 이끌어 준다. 비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86-87쪽)

 

소설도 그렇고 이야기도 그렇고 핵심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은 법의 굴레에 매여 산다. 이들은 세상 끝까지 가지도 않지만, 만약 가게 되더라도 곧 되돌아 온다. 그들에게는 그곳에서 한 발 앞으로 내딜 상상력, 용기가 없다.

 

그래서 르 귄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면 물론 오래된 세계로 시작해야죠. 세계를 하나 찾으려면, 잃어버린 세계가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잃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부활의 춤, 세계를 만드는 춤은 언제나 여기 세상 끝에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안개 낀 해안에서 추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92쪽)

 

그렇다면 이런 상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와 떨어져 존재하는가? 아니다. 상상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찾지 않고 있을 뿐. 또는 찾아도 무시하고 있었을 뿐. 르 귄의 말을 보자. 이것이 바로 상상이고 문학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실제로 보는 건 우리 머릿속에 든 무언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꿈이죠. 좋은 것도, 나쁜 것도요. (252쪽)

 

이런 상상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언어가 중요하다. 결국 우리 생각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언어 없는 문학을 상상해보라.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러니 어떤 언어를 쓰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르 귄은 지배의 언어와 협동의 언어를 구분한다. 지배의 언어는 그동안 세상을 지배해 왔던 남성의 언어다. 협동의 언어는 그와 다른 언어다. 그의 말을 보자.

 

  어머니말은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예요. 어머니말은 연결해요. 쌍방향으로, 아니 많은 방향으로 오가는 교환의 연결망이에요. 어머니말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벌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어요. (263-264쪽)

 

이런데도 아직 사회는 강력한 권위를 지닌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사용하도록 교육한다.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르 귄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부장제 교육시설인 우리의 학교와 대학들은 보통 우리에게 힘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아버지말을 하는 남자나 여자들의 말을 들으라고 가르치죠. 따라서 어머니말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가난한 남자, 여자, 아이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쳐요. 그런 사람들의 말을 타당한 담화로 듣지 말라고요.

  저는 이런 가르침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267쪽)

 

하지만 이런 일은 쉽지 않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르 귄 역시 자신은 배운 것을 잊는데 느린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완전히 잊기 위해서는 세상 끝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서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르 귄에게 이것은 바로 작품 활동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 이야기다.(298쪽) ... 소설의 자연스럽고 적절하며 알맞은 형태는 자루나 가방일지 모른다고 말하련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는다. 의미를 품는다. 소설은 약보따리이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은 서로와, 그리고 우리와 특별하고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299쪽)

 

그렇다. 바로 이것이 르 귄이 소설을 쓰는 이유다. 말을, 사물을, 의미를 담은 그릇. 그래서 르 귄 소설은 약보따리다. 우리에게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게 해주고 다른 세계를 보게 해준다. 그야말로 틀에 갇히지 않고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마음껏 만나게 해준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도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이런 점들, 문학을 통해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음을 르 귄은 이 책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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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06 0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선택지와 대안들을 제기하여 환경에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과정, 현실을 과거와 미래에 연결하여 확장하는 방법 💥 💥 💥

kinye91 2021-12-06 09:12   좋아요 1 | URL
르 귄의 문학에 대한 생각에 대한 글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서 좋았어요.

프레이야 2021-12-06 09: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르 귄의 이런 책이 있군요. 리뷰 고맙습니다.
책 담아가요^^
˝완전히 잊기 위해서는 세상 끝까지 가서 그곳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
문장도 함께.

kinye91 2021-12-06 11:54   좋아요 2 | URL
르 귄 소설도 좋지만, 이렇게 여러 글을 모아놓은 책도 좋더라고요.

러블리땡 2022-01-08 0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kinye91 2022-01-08 05: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1-08 0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kinye91 2022-01-08 05: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님께서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1-08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감사합니다!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청소년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시라면 더욱 그 마음을 알게 되겠지만, 시인이란 존재는 본래 철이 없는 존재라, 청소년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들 중에서 어른이 쓴 시들이 많은데,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마음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청소년시집을 낸 시인들 중에 교사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청소년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직업이 교사일테니.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느끼는 마음들을 많이 느꼈을테니


이 시집을 쓴 이정록 시인도 교사다. 시집을 읽다보면 학생들을 이해해주는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가 쓴 시 '의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주라는 어머니 말씀을 시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런 시인이 교사라면 학생들이 언제라도 와서 쉬면서 기댈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시인에게는 지금 청소년들이 살아갈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졌으리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서 지내게 될 사회가 그들에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세상을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슬픈 종착'을 보면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픈 종착


규직이는 좋겠다.

서른 살쯤이면 너를 더 좋아할 거야.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 거야.

약사 세무사가 꿈인 친구도

검사 변호사 감리사 사업가가 꿈인 애들도

다들 주문처럼 네 이름만 부를 거야.

규직아, 오, 정규직아.


이정록, 까짓것, 창비. 2017년. 44쪽.


이런 상황이 슬픈 종착이 아니라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슬픈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나이가 거의 서른으로 되어가는 지금, 그들에게는 정규직이라는 말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낱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그것을 인식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알게 하고 있지 않은지.


슬픈 종착이 아니라 이미 슬픈 출발을 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데...


청소년 시집을 읽으며 희망보다는 불안을 느끼다니... 아니,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후대가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이 시에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사로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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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아이들 -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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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 이주아동은 공부할 권리는 있지만 살아갈 자격은 없는 모순된 현실에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로 자라는 것이다.' (8쪽)


이것도 법이 바뀌어서 공부할 권리가 생겼다. 그 전에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학교에 가려고 해도 가기가 힘들었다. 배울 권리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지냈던 현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학교를 갈 수 있게 하고 있으니. 그러나 학교까지만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학교를 마치면 곧 출국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여기서 태어나 (또는 아주 어린시절에 들어와) 자랐기 때문에 삶터가 바로 우리나라인데,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한다. 떠나지 않으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법체류자가 된다.


이미 이들 아동의 부모들은 불법체류자가 (이 말을 쓰지 말자고 이 책을 쓴 은유 작가는 말한다.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을 어겼다고 하기 보다는 단지 등록이 안 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고) 되었다. 그래서 단속에 걸리면 추방당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학습권을 보장했다고 하지만, 부모 없이 어떻게 학교를 마칠 수 있겠으며,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부모의 나라로 가야 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버린다.


이 책 말미에 보면 최근에 법이 바뀌었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조금, 아주 조금 유리하게 바뀌었는데, 이게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법무부는 2021년 4월 '국내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방안'을 발표했다. (범부부 용어에서도 불법체류라는 말이 나오다니... 외국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용어다)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한국에 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들에 한해 체류자격을 심사받을 기회를 준다. (229쪽)


이 조항에 의하면 부모를 따라 아주 어릴 적에 온 아동은 해당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부모를 따라와서 우리나라에서 초,중,고를 다녔다면 최소한 12년을 살게 된다. 그런데도 체류자격을 심사받을 자격조차 받지 못한다. 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고 하더라도, 영주권이 나오지 않고 겨우 체류자격 심사받을 기회만 주어진다. 뭐야? 만약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우리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거나, 아니면 부모들처럼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버려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또는 아주 어릴 적에 와) 여기서 자랐다면 언어나 친구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 부모 나라는 외국이나 다름없다. 그런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하면 어떤 아동들이 가려고 하겠는가. 가려는 마음도 없겠지만 가도 우리나라에서보다 잘살 수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법무부에서 발표한 이 대책도 보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에는 이런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돕는 사람들 이야기, 부모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다. 운 좋게(?) 비자를 받은 아이도 있지만, 비자를 받지 못해(비자다. 영주권이 아니라)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아이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구보다도 국어(한국어)와 역사(한국역사)를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지만 대학에는 갈 수 없는 아이, 비자가 없어서 통장도 만들 수 없는 아이, 그래서 비행기도 탈 수 없고, 공연장에도 갈 수 없는 아이의 이야기가 가슴을 때린다.


정말로 '있지만 없는 아이'가 되어버린 그 아이들의 이야기에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랑스러워 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선진국이라면 적어도 사람을 등록, 미등록으로 나누기 전에 그들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이 되었다가 이제는 선진국이 되었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쥬라는 말이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면 사람을 국적으로 나누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보고,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또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와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까지(이제는 고등학교까지가 거의 무상교육이니) 다녔다면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권리를 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선진국이 지녀야 할 의무 아닐까. 여전히 '있지만 없는 아이들' 이 많다고 한다. 수십 만에 해당한다고 한다. 인구 절벽을 실감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국적으로 사람을, 그것도 아동들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국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미국 시민권을 주는 경우와 같이 그런 아동들에게는 우리나라 영주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국적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회의 품격이 달라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 사회의 품격이 높아지려면 이들을 먼저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이 지녀야 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쪽으로 정책이나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사회의 품격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판명 된다. 그들을 지칭하는 언어에서도 사회의 품격이 나오고. 앞에서 '불법체류'라는 말을 썼지만, 이 말에는 이미 법을 어긴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이런 말 대신에 '미등록 이주'라는 말을 쓰자고 한다. 찬성한다. 


단지 등록이 안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이 등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있지만 없는' 이 아니라 '있으면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은 그렇게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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