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들의 잔을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5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청준 소설은 독백체가 간간이 드러나고 있어서, 작가가 소설 속에 인물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약간 예스러운 문체도 소설을 읽을 때 완전히 몰입하기보다는 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은 한진걸, 김상응(김의원), 안 선생, 노명식, 지윤희 그리고 무불 스님과 배경숙, 약혼녀 명순, 친구이자 처남이 될 경식이다. 이 중에 경식은 스쳐지나가고, 약혼자라고 하는 명순(명숙? 이 책에서 이 인물에 대한 이름이 명순과 명숙으로 뒤섞여 나온다. 337쪽. 466쪽.문학과지성사 하면 문학 작품으로는 전문적인 출판사인데, 이 소설에서 이런 실수가 곳곳에서 나오니)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여래암이라는 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한진걸이다. 고시를 준비한다는, 세상을 다 아는 듯한 태도를 지닌 사람.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에 대한 믿음은 떨어진다. 그는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읽는 사람은 그가 참 허랑방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거리를 두게 된다. 이 거리두기를 통해서 이 소설이 그냥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로 국한되지 않게 된다.


'이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 읽게 되는데, 이 말은 소설의 끝부분에 '이젠 나도 내 잔을 들어야 할 때가 온 듯싶으니까'(489쪽)이라는 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 남의 삶을 살피고, 남의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이 말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래암 사람들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김의원은 자살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을 끝낸다. 그에게 이제 정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은 죽음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죽음이 꼭 정치적 자살로는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사촌여동생을 범한 노명식의 참회록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김의원이 죽을 때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히 명시는 하지 않지만, 읽다보면 어린 시절 노명식의 장면과 나이 든 김의원의 장면이 겹치게 된다. 


그런 노명식이 신학교에 가서 참회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데, 이는 안 선생이 전직 신부였다고 하니 노명식이 안 선생의 잔을 물려받아 자신의 잔을 채우게 되는 셈이고, 안 선생은 무불 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여래암에 눌러앉아 자신의 잔을 채우고, 무불 스님은 불교 정치를 한다고 속세로 나아갔으니 김의원의 자리를 이어받아 잔을 채웠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희는 무엇인가? 진걸로 하여금 여자들에게 지녔던 환상을 깨게 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 그래프를 그려놓고 10번째 여인으로, 그래프를 완성시켜줄 여인으로 윤희를 생각했지만 윤희는 결코 진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 여인이 아니다. 윤희에게도 자신의 잔이 있기 때문이다.


윤희를 만나기 전까지, 아니 윤희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진걸은 여자들은 자신의 잔을 채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요즘 이런 태도를 지닌 남성은 마초라는 이름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지만, 이 소설은 꽤 오래 전에 쓰여졌고, 이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적 요소를 지금 관점에서 비판하기는 그렇다고 본다. 당시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지금 관점에서 이 소설이 지닌 한계를 이야기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그래프를 그려놓고 하지. 하지만 윤희는 윤희만의 잔이 있기에 진걸의 잔을 채워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진걸은 자신의 잔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잔을 채우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윤희에게서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후 진걸은 여래암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명순과 결혼할 수도 없다. 아직 그는 자신의 잔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자신의 잔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끝을 맺지 않고 있다. 사실 진걸이 고향으로 돌아가 동네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명순과 결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 이는 너무도 뻔한 결말 아니겠는가. 그러니 작가는 이런 결말 대신 진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방향으로 결말을 맺는다.


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그 자신의 잔을 채우려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해주는 인물이 배경숙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그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


그래서 진걸은 배경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우리는 진걸 역시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까 추측을 하게 된다.


  여자로서는 가장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지녔던 여자 - 육신의 결함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는 그녀의 굴욕과 슬픔 속에서 그 마지막 부끄러움만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지키는 여자가 되겠노라며 산을 내려간 배경숙 - 진걸은 아직도 그녀의 후일만은 쉽게 떠올려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의 후일이 궁금했다.

  배경숙 -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디면서 그것을 그녀의 마지막 진실로 지니고 살아가는 여자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둡고 아픈 삶을 아직도 어디서 부끄럽고 겸허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진걸은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경숙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결스런 상상으로 하여 그녀의 순결한 삶(진걸에겐 그녀의 삶이 그렇게만 생각되고 있었다)을 욕보이게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경숙의 아픔과 부끄러움에 비하여 자신의 그것은 오히려 당당하고 뻔뻔스러워지고 있을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그 경숙에게서와 같이 부끄러움다운 부끄러움조차도 없을 듯싶어졌기 때문이었다. (476-477쪽)


이런 장면 때문에 진걸은 자신의 잔을 찾아 살아가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만이 진걸이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진걸은 과거와는 달리 살아가게 되리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걸은 누구의 자리를 찾아갈까? 그건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살아내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이 소설은 진걸이라는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젠체하는 사람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잔을'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녹색평론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아주 조금씩, 서서히 우리들에게 다가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알아차리는 순간은 이미 다 젖어 있게 되는 상태. '시나브로'라는 우리말 부사가 이렇게 적절하게 잘 맞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기후위기라는 말을 넘어서 이제는 기후재앙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미세먼지 나쁨은 일상이 되었고, 감염병들이 도처에서 창궐하고 있는데,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온갖 감염병들이 확산되고 있는 상태, 이것들의 위험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상태.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시작한다면 늦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는데도, 이왕 젖은 옷이니 갈아입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때 그때 일시적인 처방에만 힘쓴다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가랑비에 옷 젖는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


이 책은 김종철 선생의 생태사상론집이다. 이 책에 수록된 많은 글들이 이미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이지만, 그 책에 실리지 않은 글들도 있어서 김종철 선생의 생태사상에 대해서 일별하기엔 좋은 책이다. 그것도 2000년대 글만 모아놓았으니, 시대에 뒤떨어진 글들도 아니다.


하긴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글이나 말은 시대를 넘어선다. 그 시대에만 국한된 말ㅡ글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해서 필요한 말-글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현재만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들의 말-글에는 현대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함께 담겨 있다. 그러니 그런 말-글들에서 시대의 한계를 인식하기는 힘들다.


김종철 선생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태문명으로 전환하자이다. 근대문명은 차별의 문명이고, 약자들의 착취를 기반으로 한, 또 자연파괴를 기반으로 한 문명이기에 이대로 지속할 수는 없다고 한다.


생태문명으로, 사람들이 생활 모습을 바꾸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삶은 힘들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태문명이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영구적인 지속이 가능한 방식, 즉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적 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순환적' 방식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탐구하고,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방향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영구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영위를 보장하는 거의 유일한 생존·생활 방식이 농사라는 점을 재인식하고, 그 농사의 궁극적인 토대인 토양을 건강하게 가꾸고 보존하는 것이랴 말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우리의 집단적 삶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사결정 과정, 즉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된다. (7쪽)


이런 이야기를 주제별로 묶어서 이 책에 실었다. 김종철 선생이 이야기하는 농사는 대농, 기업농이 아니라 소농을 말한다. 소농 개념에 유기농이 포함되어야 하고, 다품종 소량 생산,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농업, 기계와 화학비료를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하는 농업, 돈이 되는 환금작물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1장)


소농 중심으로 서로 돕고 사는 자치가 살아있는 농촌을 이야기한다. 그러기에는 비대한 국가보다는 지역자치가 살아있는 사회를 꿈꾸게 된다. 이는 바로 민주주의와 직결되는데, 어떤 민주주의냐 하면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시민참여 민주주의에 대하여 고민하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장)


시민참여가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삶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생계에 급급하다보면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 지금 대선 후보들 중에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다가 철회하는 경우가 있는데, 김종철 선생은 예전부터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 주장이 지금도 통용이 되고 있고,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여론이 더 높은 상황이니, 이 장을 읽고 기본소득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대통령 선거가 있는 올해를 앞두고 심도 있는 논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지 말고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기본소득을 기본배당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데... 이 기본소득과 더불어 은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행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3장)


4장에서는 우리나라 촛불시위 또는 촛불혁명에 대해서 그 의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시민들이 참여해서 정치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시인 김해자는 근작 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324쪽)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꾸자고 촛불을 들지 않았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 그 추운 날에도 촛불을 들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광장에 나섰다. 이 말, 지금 또다시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과연 우리는 대통령 한 명 바꾼 것에서 얼마나 나아갔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 5장에서는 탈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인 탈핵이다. 원자력발전을 포기하지 않고 외국에 수출까지 하는 나라가 됐는데, 기후위기를 벗어날 길은 원자력발전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꽤 있으니... 하지만 원자력발전이 지닌 이면에 대해서 김종철 선생은 이 글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생활 형태를 바꾸면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루어 지역자치를 이루고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더 이상 성장지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그런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생태문명'이라는 말로 정리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 기후위기는 기후재앙이 되었다고, 그러니 변해야 한다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번에 읽힌다. 아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에서 놓기가 힘들다. 한강 특유의 짧게짧게 툭툭 치며 나가는 문자들이, 그리고 결코 길지 않게 끊어놓은 단락들이, 마치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올라가듯이, 또는 한 계단 한 계단 밟아내려가듯이 소설을 계속 나아가도록 한다.


추리를 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사랑에 관한 면이 주를 이루고, 그 사랑이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는 사랑이어서 더 아련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때 만나게 된 두 친구 정희와 인주. 떨어져 있으면서도 결코 떨어져 있지 못한 친구 관계. 그런 친구들 중에 한 사람인 인주가 죽는다. 자살이라고 한다. 유고전도 열린다. 평전도 쓰인다. 그런데 유고전이나 평전을 쓰는 사람에게 또다른 친구는 짙은 의심을 지닌다.


인주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자살이란다. 정희는 평전을 반박하기 위해 죽은 친구인 인주가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지면서, 평전을 썼던 강석원이라는 인물과 쫓고 쫓기는 갈등 관계가 겹쳐진다. 여기에 인주 엄마에 대한 류인섭의 글에서 인주 죽음의 진실을 밝힐 단서들이 나타난다.


정희는 인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정희와 인주는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사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있지 않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감추고 싶은 일들이 있다. 마음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정희와 인주는 오랜 친구다. 서술자인 정희는 인주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여기고 인주 죽음의 진실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자신이 인주에 대해서 많이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주가 끝까지 정희에게 감추고 있었던 것들. 그것은 인주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정희에 대한 인주의 감정이다.


소설 초반부에 잠깐 인주가 정희에게 지닌 감정이 서술된다.


한 번, 꼭 한 번이었지. 갑자기 네가 내 얼굴을 끌어당기고 입술을 포갰지. 

나는 너무 놀라 네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지. 

왜 그랬어, 라고 내가 묻자 너는 말했지.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달아오른 뺨과 입술을 두 손으로 가리며 뒤로 물러나 앉았지. 열여덟 살이었지. 삼촌의 빈 작업실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네가 내 입술에 입 맞췄지. 그렇게 된 거였지. (24쪽)


이런 인주의 마음이 소설의 뒤에 가면 인주가 쓴 글을 통해서 한 번 더 나온다. 삼촌에게 독백하듯이 쓴 글에서.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373쪽)


인주는 정희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지켜볼 뿐이다. 정희가 살아가도록. 이런 인주의 마음을 정희는 알게 되는 걸까? 소설의 막바지에 불이 난 작업실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며 정희는 이렇게 외친다. '살고 싶다'


그렇다. 이 소설은 두 친구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살아내야' 함을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죽음으로 회피하지 않고 살아서 겪어내야 한다. 


정희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바로 이 결심을 이야기한 것이고, 정희의 이 다짐으로 소설은 결말을 완결짓지 않고 더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결국 인주를 죽인 것은 누구인지 짐작은 하지만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기 때문에 인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것인가? 앞으로 정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은 독자의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독자들이 써내려가면 된다.


이렇게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그 사람의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관계. 그래서 어떤 말보다도 함께 있어주는 그런 관계. 충고도 조언도 없이 그냥 덤덤하게 함께 있어주는 인주. 그런 사랑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어도 좋다. 서술자인 정희로 하여금 진실에 한발 다가가게 만드는 단서들을 읽으면서 함께 찾아가는 재미도 좋다.


또한 한강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사회의 그늘이 개인의 아픔 속에 녹아들어 나오는 면을 찾아 읽어도 좋다. 권력을 통해서 진실을 왜곡하던 시대의 모습 (류인섭이 정희에게 쓴 편지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정희가 엄마를 도와 일하는 장면에서 남자 형제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등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살아냄을 담은 소설이다. 힘든 시기를 거치며 자살을 시도하는 정희에게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인주, 그리고 인주가 정희에게 하는 말들.


정희야

넌 아마 아주 오래 살 거야.

모든 걸 기억하면서.

지금보다 더 추위를 타면서.

백 살, 백이십 살씩 사는 할머니들 봐.

다 체형이 너 같아. (327쪽. 187쪽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인주는 말한다. '난 말이야, 그렇게 늙어갈 거야.'(187쪽)라고. 이런 인주가 자살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정희가 인주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려는 것이다. 또한 정희는 오래 살아서 진실을 기억해야 하고.


이렇게 짧은 문장들이 마음을 톡톡 건드리면서 소설의 끝을 향해 가게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읽을 만한 소설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읽고 나서도 마음 속에 긴 여운이 남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손'에 관한 말들이 많다.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는 관용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은 그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손이 차다는 말은 냉정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고 하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손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소설 제목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으면 냉소적인 사회,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정작 소설은 다르게 전개된다.


소설은 소설 속의 소설 형식을 택하고 있다. 소위 액자소설이라고 하는 형식인데... 소설가인 '나'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의 앞과 뒤가 소설가가 서술자로 나오고,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에서는 장운형이라는 미술가가 서술자로 나오게 된다.


장운형이 쓴 글 제목이 '그녀의 차가운 손'이다. 그리고 이 소설 제목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왜 작가는 소설 제목을 다르게 붙였을까? 소설 속 소설에서 그녀는 누구일까? 읽다보면 그녀의 차가운 손(294쪽)이라는 말이 직접 나온다. 소설 속에서는 장운형이라는 서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어 이니셜로 나오기 때문에 이 글 제목이 된 그녀의 차가운 손에서 그녀는 E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읽다보면 소설 속 소설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E는 3부에만 나온다. 이 3부까지 가기 위해 1부와 2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손을 이야기하지만 손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보면 되는데...


손가락이 잘린 외삼촌.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또 가족들과 어울릴 생각도 없이 알콜 중독이 된 외삼촌. 이런 외삼촌과 가족들 관계를 통해서 서술자인 장운형은 어린 시절부터 가면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가면을 누구나 다 지니고 있다고 믿고,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며 살아간다. 오히려 손가락이 잘린 외삼촌은 가면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가면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남들이 보면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배척당하고 견딜 수 없게 된다. 2부 역시 마찬가지다. L이라는 여인이 나온다. 거구의 몸집을 지닌 여자. 그런데 장운형은 이 L이 손에 매혹된다. 이 손은 따뜻한 손이다. 그럼에도 L은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살을 빼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서... 이런 L과의 생활이 펼쳐지는 2부에서는, 우리가 남들을 바라보는 시선보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L이 살을 빼려고 하는 이유 역시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한다. 견딜 수 없는 식욕, 폭식과 구토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남기는 L. 그러나 L은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 않는다. L은 자신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자신을 받아들인 L이 장운형 곁에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장운형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차가운 손이라고 할 수 있는 E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삶을 사는, 외모 역시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보이는 여자. 장운형은 E를 처음 만났을 때 무언가 섬뜩함을 느낀다. 무엇일까? 이것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을 알아보는 모습이 아닐까?


2부까지 그렇게 손에 관심을 가졌던 장운형이 3부에서는 이상하게도 손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얼굴 이야기를 한다. 갑자기 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정도라면 E의 얼굴에서 풍기는 어떤 점이 장운형의 관심을 가져갔을텐데... 그것에 대한 추구를 하게 된다. 손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그러다 후반부로 가면 E가 먼저 장운형에게 손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육손이로 태어나 손때문에 겪었던 일들을... 수술하고 나서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지내왔던 가면을 쓰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 그 말들이 끝나고 나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석고를 뜨는 대상이 되었던 둘이... E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이들 서로에게는 가면이 필요없어졌다.


"네가 날 꺼냈고……또 난 널 꺼낸 건가?" (315쪽)


이 말로 장운형이 쓴 글은 정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이 석고 조각들을 발로 밟아 자근자근 부숴버리는 장면에서 이들의 가면은 이제 없다고...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까? 가면을 벗어던진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가면을 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표면상 그들은 실종이 된다.


그리고 작가의 에필로그. 한강 소설은 결말이 희망적이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면을 벗은 이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둘이 함께... 그 점을 에필로그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장운형이 쓴 글 제목인 '그녀의 차가운 손'이 제목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은 세상과 맞서 살아가고자 애쓴 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운 손일 수밖에 없다. 감추고 싶었던 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손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알게 되는 순간,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더이상 차가운 손이 되지 않는다.


차가운 손은 바로 '그대'다. 우리다. 남들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우리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서 그 가면을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가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 속 사람들이 바로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다름에 대한 소설이다. 다름을 받아들이느냐 배척하느냐에 관한. 차가운 손을 지닐 것이냐 따뜻한 손을 지닐 것이냐 하는 그런 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이 아니라 '그대의 따스한 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가면을 벗어던져야 함을, 우리 모두 진실된 모습을 보이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가면을 벗게 해야 한다고,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옷걸이에 걸린 양'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양의 털로 옷을 만드니, 옷걸이에 걸린 양은 옷걸이에 걸린 옷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어반복이다. 옷걸이에 걸린 옷이라고 하면. 옷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옷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옷보다는 양이 더 좋겠고, 양털은 식물성보다는 동물성을 의미하니, 이때 양을 양털로 만든 옷이 아니라 바로 그 옷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확장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옷걸이에 걸렸다는 말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하지만 제약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결국은 옷걸이에 걸릴 수밖에 없는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옷걸이는 옷장 속에 있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옷장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옷장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옷장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현대문명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산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사고 쓰고 버린다고 여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현대문명의 한 부분이 아닐까? 현대문명이 그렇게 할 수밖에 만들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시들을 보면. 시들이라고 한 이유는 특이하게도 [옷걸이에 걸린 양]이라는 시집에 같은 제목의 시가 7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같은 제목의 시를 계속 반복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마치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처럼 돌고돌고 하는 삶일 뿐이다. 옷걸이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다시 옷걸이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삶. 시인은 이렇게 내용을 통해서도, 또 형식을 통해서도 현대문명의 삶은 결국 옷걸이에 걸린 삶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벗어나 살 수 없듯이 결국 시작과 끝이 있는 삶인데,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 틀 속에서 다른 삶을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시 속에서 찾기 힘들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며 틀 속에 갇힌 삶이긴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두더지 앞니


  앞니의 성장이 멈춘 두더지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산언덕 아래 살았다 마을의 지하 생활자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무료하게 지하 셋방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달빛도 없는 밤 족제비를 피해 바위 아래에서 한없이 자라나는 이빨을 갈아 없애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 두더지는 어느 밝은 대낮 지상으로 나왔다가 눈멀어 잡혔고 장독대의 빈 작은 항아리에서 살다 죽었다 나는 지하의 집과 지상의 집과 항아리의 집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다만 두더지의 앞니가 계속 성장하기만을 기대했을 뿐이었다.


주창윤, 옷걸이에 걸린 양, 문학과지성사. 1998년. 82쪽


이 시에서 '다만 두더지의 앞니가 계속 성장하기만을 기대했을 뿐'이라는 말... 이는 옷장에 갇혀 있는 삶, 항아리 속에 갇혀 있는 삶일지라도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자신만의 의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 말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대문명에 갇힌 삶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희망으로 시집을 맺고 있다. 


한편 한편의 시들이 현대문명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2-02-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장판에서 푸코읽기]에서도 소제목으로 ˝양떼들˝이라는 비유적 단어를 쓰기에 ˝양˝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했었는데 kinye님께서 ˝옷걸이에 걸린 양˝ 뜻풀이 너무나 공감가게 해주셨네요^^

kinye91 2022-02-05 12: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22-02-06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06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