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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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형태만 바꿔서 다시 창궐하고, 마약에 취한 사람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인다.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도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부자 마을들은 중무장하고, 경비원을 고용해 나름대로 안전을 도모하지만, 그보다 못한 지역에서는 장벽을 세워도 약탈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게 된다.


극한으로 몰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이제 사람은 함께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만 하는 현실.


최근에 유행한 좀비 영화들과 비슷하다.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좀비가 된다. 왜 좀비가 될까? 그들이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나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징벌로 좀비로 변하나? 아니다. 좀비로 변하는데 그 사람이 살아온 행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신체적, 성별, 연령 구분이 없다. 그냥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그리고 좀비는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가족이라도 죽여야 하는 존재가 된다. 안 그러면 나도 좀비가 되니까. 따라서 좀비 영화는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에서 인과응보가 존재할까? 인과응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디스토피아가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 많은 종교가 창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종교가 아니더라도 철학이든, 윤리든, 법이든 인간은 디스토피아에서 살지 않기 위해 서로를 제약할 수 있는, 또는 권장할 수 있는 사상, 문화,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사상, 문화, 제도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혼란이 시작된다. 혼란은 이 소설에서 불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마을을 불태우고, 산을 불태우고, 사람들 이성을 불태워 약탈과 살육으로 나아가고 있듯이,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간다.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 뿌리를 잃은 사람들...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가 디아스포라가 된다. 아주 부유하여 권력을 쥐고,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는 정치가와 결탁해 노동자들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그들은 노예와 같은 상황에 처해 노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부랑자들에게서 자신들을 지킬 수 없기에 여기저기로 살기 위해서 떠날 수밖에 없다.


공동체 해체... 살아남는 방법은? 마치 신의 저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신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했듯이 사람들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방법, 그것이 바로 씨앗이다. 성경에서 빌려온 이 씨앗 개념은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씨앗을 보존하고, 소설의 끝에 가서 씨앗을 심기로 결정하면서 디스토피아에서도 인간은 살아남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비록 실패를 예견하고 있더라도 시도해 보는 일. 최후까지 씨앗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씨앗이든 싹을 틔우리라 믿고 행동하는 일.


인간은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예측은 할 수 있고, 그 예측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을 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한 행동. 이것이 바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심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 고통을 해소해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초공감증후군이라는 말로 나오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말과 통한다.


이런 공감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 로런... 마을이 파괴되었을 때 주인공은 로런은 홀로 떠나려던 계획에서 두 사람과 함께 떠난다. 셋이서 떠나는 삶을 찾는 여정. 여기에 한 사람, 한 사람 계속 일행이 추가된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 성별도 인종도, 살아온 배경도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면서, 이들이 정착할 곳을 찾아 가는 여정이 펼쳐진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쾌락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함께 한다는 사실이 부담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로런은 가면서 이렇게 계속 사람들을 합류시킨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자세다.


그 과정에서 온갖 참상을 목격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로런이 말하는 '지구종'을 위해. 이때 지구종은 지구에 뿌리는 씨앗이라는 의미다. 지구가 망해가고 있지만,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된다는, 소설에서 로런은 지구에 국한하지 않고 우주로 자신의 사고를 확장한다. 


인류는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지금 당장 지구에서 살아가기도 힘듦에도 우주를 생각하는 로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종교를 '지구종'이라고 한다. 물론 이때 종은 씨앗 '종'자라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종교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자신들이 성공한다는 보장을 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소설을 읽으면 결말 부분에서 그들이 심은 씨앗들이 언젠가는 싹을 틔울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끼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실린 성경 구절, '<누가복음> 8장 5-8절'. 인용하지 않겠지만, 찾아보면 많이 본 구절일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에 유토피아가 내재되어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한다.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서 나올 수밖에 없음을... 그런 씨앗 뿌리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유토피아의 꿈을 꿀 수 있음을.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에 이어서 읽은 두 번째 소설... 앞 소설과 마찬가지로 무척 흥미롭게, 한번에 죽 읽히는 소설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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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으로 이 시집 시들은 내용이 쉽다. 머리 속에 잘 들어온다. 그만큼 시 속 상황을 이해하기 쉽다. 시 속 상황을 내 삶과 연결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연결시킬 수가 있다.


  시인이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이 아니듯이, 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들이 어디 사람과 사회와 떨어져 있는 내용을,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이야기를 하던가.


  시는 사람과 사회를 시 속에 담고 있을 때, 그렇게 사람과 사회를 시에서 잘 보여줄 때 우리들 마음에 다가온다. 그 담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 시인에 따라서 다양하기에 시는 하나이면서도 여럿이 될 수 있겠지만.


그 표현의 다양성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고, 사람을, 사회를 찾아내어 자신의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들이는 일, 시를 읽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시를 읽게 해야 한다. 읽지 않는 시는 독자에게 다가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당의정이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이 시에 나오는 연약한 과육 속에 단단한 씨를 품고 있어야 한다. 시는. 그래서 말랑말랑한 느낌을 받지만, 시를 읽고 나서는 무언가 단단함을 얻은 느낌을 받도록 해야 한다.


시인이 이야기한 방향과 다르지만, 이 시집 제목이 된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는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는 시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어쩌면 이 시는 바로 시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시를 읽는 순간, 또는 시를 읽는 의미가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부분, 40-41쪽)


시 역시 마찬가지다. 읽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포도씨처럼 무언가가 마음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것은 바로 시가 우리에게 남기는 미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집에 있는 시들을 읽어가면 열매를 먹으며 씨를 남기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시집엔 어려운 말들이 없기에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쉽게만 그냥 술술 소화가 되고마는 시들은 아니다. 무언가를 남긴다. 그 남김... 소화되기 전에 곱씹게 만드는 무엇. 그것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된다.


특히 이 시, 시는 시대를 넘어서 보편적인 무엇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는 생각을 하게 한 시다.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따온 소재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시 역시 동화처럼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옛날 숲속에 자칭 잠자는 미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그녀를 깨울 때까지는

  계속 잠만 자야 하는 것인 줄 굳게 믿고 있었다


  잠을 깨운다

  벌거벗긴 채 닫힌 문 밖에 껍질 벗긴 자두모냥 서 있는 다섯살짜리 아이의 흐느낌이,

  한 달째 놓쳐버린 줄풍선인 여자아이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늘 담장에 핀 소담한 꽃이었던 양순한

  포장마차 내외가 단속에 밀려 겨우내 차디찬 가지와 줄기로 얼어붙어 있는 것이,

  등 따스운 잠을 깨운다


  하지만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깨어나지 않는다

  그녀의 잠을 깨우기에는 무언가 2%가 모자란가보다

  그녀는 아직 먼 나라의 꿈을 꾸는가보다 그 꿈은 좀처럼 깨어나기 싫은 꿈인가보다

  걸어잠근, 작지만 아늑하고 깊은 방인가보다


  '영등포 슈바이처'라 불린 한 의사의 씁쓸한 죽음이,

  석면공장 근로자들의 20여년 잠복기 석면폐증이,

  딸 옆에서 유서를 쓴 한 대학강사의 돌연한 죽음이,

  포근한 잠을 깨운다


  이제 잠자는 미녀의 숲은 철거되어야 함을

  더이상 그녀를 재워줄 숲은 없음을

  잠을 자다가 그대로 숲그늘의 고락과 함께 묻혀버릴 수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그녀가 너무 오래 누리고 있는 평화를, 혹독함의 왕자여, 처참히 흔들어 깨워다오!


이선영,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 2009년. 98쪽-99쪽.


깨어나야 한다. 왕자를 기다려서만 안 된다. 왕자처럼 궁궐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모르고 지내는 존재에 의해 깨어나서는 안 된다. 이미 미녀가 잠들 숲조차 파괴되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고통을,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고 눈 감고 단잠에 빠져들면 결국 자신조차도 개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서 자신만의 숲속에서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숲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깨어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깨어남이고, 그래야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들이 포도가 포도씨를 남겨 미래를 만들어가듯이 시도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깨어나 함께 할 수 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지금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잠자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니, 이것은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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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1 - 한국 영화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1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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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서 사람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직장에서는 회식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고, 학생들은 수학여행, 체육대회는 물론이고 학급에서 하는 행사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운동경기 관람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영화나 연극, 뮤지컬을 관람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러 제약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연극 등 공연 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말도 많이 했는데...


코로나19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대가 변하기도 했다. 함께 하기보다는 홀로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따라서 코로나19로 인해서 단체 행동들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함께 해야 하는 데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혼족'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홀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는데, 홀로 무언가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없는 일이 영화 감상과 문학 활동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발표를 하고 함께 할 수도 있는 일이 이런 예술활동이기도 하지만, 예술활동은 함께 하지 않아도, 즉 홀로 해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 같으면 극장에 가야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온갖 채널을 통해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예전에 썼던 '안방 극장'이란 말을 쓸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극장에 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영화들이 아예 집 안에서 볼 수 있게 만들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보고자 하기만 한다면 저렴한 가격에 영화를 원없이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영화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예술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는? 시는 예전부터 특정한 장소가 필요없는 예술이었다. 일상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예술이 바로 시였다. 물론 시를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이론상으로 시는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예술이다.


이렇게 영화와 시를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함께 하는 시간이 줄고 혼자 하는 시간이 늘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영화를 보고, 또 시를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여기서 시와 영화가 만나 융합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예전에도 많은 영화에서 시가 나왔겠지만, 구태여 영화에서 시와의 관련성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영화 속 시, 또는 시가 영화로 구현되는 모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시와 영화가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시간이라고 함은 시를 만나는 시간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으니, 영화를 보면서 시를 만나는 시간이라고 하면 되겠다.


많은 영화들이 소개되고, 그 영화에서 언급되고 있는 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에 대한 이야기에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 있으니, 영화를 통해서 시와 시인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와는 다른 방법으로 시를 만나게 한다. 시가 우리들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시가 시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와 어떤 영향을 준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시를 읽은 사람은 그 시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험용이 아닌 이상은.


어떻게 이 책에서 영화와 시가 만나고 있는지를 시인 윤동주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와 같은 유명한 시인은 영화 '동주'로도 만날 수 있기에 그런가보다 할 수도 있지만, 윤동주를 <군산:거위를 노래하다>와 <후쿠오카>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직접 윤동주의 생애와 시를 다룬 <동주>에서 윤동주의 많은 시를 만날 수 있어서 좋고, <군산:거위를 노래하다>와 <후쿠오카>에서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윤동주를 만나게 된다.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영화도 아니고, 윤동주가 중심에 있지도 않지만, 등장인물들을 통해 윤동주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흘려버리고 말던 윤동주 시인의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서 윤동주의 다양한 면을 만나고, 영화를 통해서 새로운 점들을 알게 된다.


시는 대체로 짧다. 영화는 아무리 짧아도 한 시간 분량은 된다. 그 영화 속에 시가 들어간다.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시를 언급하고, 시인을 언급하고, 그들이 펼치는 서사를 통해서 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시를 우리 삶으로 끌어오게 된다.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시라는 예술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교과서 시 분석에 지친 사람들, 시를 교과서에 나온 시들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또 시를 시험을 위해서만 읽었던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시의 다양한 모습을, 또 잘 모르고 있던 시인들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읽으면서 자연스레 시와 영화와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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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흐름에 휩쓸렸을 때는 자신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격랑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칠 뿐이다.

  

  그렇게 강물에 떠다니던 나날들이 지나고, 과거를 생각해 보면 그 때 무엇을 했던가 하는 후회에 잠기게 된다.


  역사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들 대부분의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발톱이 있다. 비록 필요없다고, 지저분하다고 깎아버리기 일쑤지만 발톱이 빠진 상태를 생각해 보라. 걷기에도 힘들다. 발톱이나 손톱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고, 또 다른 존재들을 움켜쥐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발톱을 스스로 깎는다? 저항하기를 포기한다고 읽히는데... 장경린의 이 시를 보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이 혁명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강물 위에서 발길질을 하는 물오리도 되지 못하고, 그냥 흐름에 맡겨 이리저리 떠다니는 신세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움켜쥘 발톱, 손톱을 스스로 깎아버린 존재.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발톱이 미미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는데...


오래 전에 쓰인 이 시를 읽으면서 최근 우리도 발톱을 스스로 깎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아가겠다고, 더 이상 저항은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손톱, 발톱을 깎아버렸다는 생각. 시 한 편... 읽으면서, 내게 아직도 발톱과 손톱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발톱


발톱을 깎았다

깎은 발톱은 버렸다


불통인 가정과 미친 척 통화했다

어머니는 백발의틀니의꾸부정의신경질의 생존자

아버지는 경제적무능력꿈의무중력아무튼무책임한 과식주의자

가정의 발톱을 깎아주고

구둣솔로 먼지를 털다가

물오리처럼 떠다닌 그들의 일대기가 혁명이었음을

5·16 군사혁명 언저리에서 나를 구겨 신고 태어난

내가 물오리였음을 발견한다


예비역 병장인 나의 한국은행 예비군 대대의

예비역 병장인 나의 혁명은

근로자 증권저축 속에서

탁상일기 속에서

손톱깎이 이빨 사이에서

잘려져 나간다


돌이켜 보면 어제가 나의 혁명이었다

돌이켜 보면 작년이 나의 혁명이었다

흘러가 버린 날들이

좀 긴 듯한 나의 발톱이 혁명이었다


장경린,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민음사. 2007년. 개정판 1쇄.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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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10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톱을 깎다...발톱으로 이런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니 역시 시인은, 시는 놀라운 세계네요

kinye91 2022-05-10 14:21   좋아요 2 | URL
같은 존재를 다르게 보는 눈을 지닌 사람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읽다보면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많거든요.

그레이스 2022-05-11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톱에 비유하다니 탁월합니다.
잘려나가는 존재!

kinye91 2022-05-11 22:00   좋아요 1 | URL
비유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도시 인문학 - 도시를 둘러싼 역사 · 예술 · 미래의 풍경
노은주.임형남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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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 우리나라는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도시라고 할 수 없는 곳이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우리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삶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도시와 떨어진 삶을 상상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생겼겠는가. 대다수 사람이 도시에서 살다보니, 도시에서 벗어나 사는 사람이 특이하다고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까? 그냥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아닌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나 문화,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살아갈까. 아니다. 기껏 생각해 봤자,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이 언제 되나 하는 생각과 집값이 얼마더라 하는 생각 정도에 머물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도시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많은 것들이 도시라는 공간에 모여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도시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인문학과도 관계가 있다. 건축과 인문학이 관계를 맺듯이 도시 역시 인문학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 제목이 '도시 인문학'이다.


도시를 둘러싼 역사, 예술, 미래의 풍경이라고 하는데, 많은 도시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나 문화, 예술, 미래의 모습을 간결하고도 쉽게 전달해주고 있다.


읽으면서 여러 도시의 특성을 알게 되었고, 또 많은 건축가의 이름을 듣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건축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았으니, 다양한 건축가들의 기법이 도시에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경험은 가장 훌륭한 건축가의 자산이며, 시간은 가장 훌륭한 건축의 재료다.' (55쪽)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건축가나 건축에 적용하는 것을 넘어서 도시에 적용해도 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경험들이 도시에 농축되어 있고, 시간이 도시에 스,며들어서 한 도시를 만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경험과 시간이 녹아 있는 도시는 우리에게 자기만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 경험, 시간을 잃은 도시는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한다. 


과거 건축물들, 문화유산들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과거의 유물로만 존재하지 않고 현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또 우리들을 미래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도시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공존하는 도시라고 해야겠다. 과거의 유산으로만 지내는 도시가 아닌, 또 미래의 모습만이 펼쳐지는 도시가 아닌,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존재하는 그런 도시...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현재 삶에 과거와 미래가 녹아들어가 있으니...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역시 그래야 한다.  


이렇게 도시 인문학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학교 건물이 떠올랐다. 도시건 시골이건 어느 곳이나 학교는 있다. 그런데 이 학교 건물이, 요즘은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천편일률적이다. 옛날 학교 건물은 더 그렇다. 그리고 한번 지어진 학교 건물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마치 과거 유물로만 남으려는 듯.


또 내부 구조도 비슷하다. 특색이 없다. 자신만의 경험, 시간이 학교 건물에는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도시 역시 비슷할 수밖에 없다. 거의 비슷한 구조와 형태의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곳이 신생 도시들 아닌가.


학교에서부터 도시까지, 너무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데, 이는 도시의 인문학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이란 남들을 똑같이 따라가지 않고 자신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가게 하는 학문 아니던가. 그러니 다른 나라 도시들을 소개한 이 책 '도시 인문학'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도시는?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뒷맛이 씁쓸해지고 있으니...


우리나라 도시들도 앞으로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스며드는 그런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경험과 시간이 녹아들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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