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정석 김동식 소설집 7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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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꽁트라고 해도 좋을 소설들. 짧은 소설의 묘미는 바로 반전에 있다. 독자가 상상하지 못한 결말을 내는 일.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결말이 나온다면 그 소설은 잘 썼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짧은 분량에 사건을 다루는 소설은.


김동식 소설은 읽으면서 결말을 어떻게 낼까 생각하는 재미가 있다. 이미 이 작가의 작품을 여러 편 읽었는데, 특이한 결말이 많았기에,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도 결말을 생각한다. 중간을 넘어서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복선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면 아, 이런!!! 하는 생각이 드는 결말이 나온다.


그 재미다. 그 재미를 위해서도 김동식 소설은 읽을 만하다. 이런 예로 '신혼여행 중에(112-127쪽)'라는 소설을 들 수 있다.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이 소설은 상대를 속이는 묘미, 또 독자에게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는 재미를 준다.


신혼여행 하면 무엇을 떠올리는가? 행복, 즐거움. 그리고 대다수는 남-녀가 결혼하고 떠나는 여행이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이 소설은 우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렇다면 사건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다른 사건일 수밖에 없다.


낯선 외계인이 접근한다. 친절하다. 선물을 준다고 한다. 외롭게 여행을 했으니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의심 많은 한 사람은 내켜하지 않는다. 그런데 활달하고 사교적인 한 사람은 외계인을 반긴다. 그들은 외계인과 식사를 하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법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듣는 도중 한 사람은 깨닫는다. 외계인이 한 이야기는 외계인 자신의 이야기라고. 결말은? 외계인은 자신의 계략이 성공했다고 믿는다. 신혼여행 중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한 대비책이 옳았다고 여긴다. 둘 다 자신들이 잘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결말은 반전이다.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떠올리는 그림, 성별이 아니다. 멋진 결말이다. (소설을 읽어야 이 소설의 묘미를 느낄 수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제목이 된 '살인자의 정석'도 마찬가지다. 살인자의 정석이라니? 무슨 뜻인지 막연히 '살인자의 기억법'을 원용하고 있지 않나 했더니, 결말은 다르다. 반성하지 않는 살인자. 우리나라 법정에서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아니 범죄자들이 썼다는 반성문. 그 반성문으로 인해 감형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 보도도 있었다. 


[반성의 역설]이란 책을 보면 반성을 강요하면 결국 더 큰 범죄자가 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형식적으로, 판에 박힌 반성문을 써내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형량을 줄이려고 하는 범법자들이 많았는데, 이 소설은 그들의 그런 반성문을 소재로 삼아 펼쳐진다. 


그런데, 소설의 결말 부분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점을 알 수가 없다. 결말 부분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그 장면을 보고 형식적인 반성문이 얼마나 가식적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반성문보다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하고 행동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렇다. 이것이 바로 김동식 소설이 주는 즐거움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 그 반전으로 인해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생각.


'나는 수염이다'는 소설... 기가 막히다. 윤회를 바탕으로 한 소설. 인과응보다. 그런데, 인과응보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떻게? 


사실, 윤회가 정말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도 실제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막 살지는 않을테니. 그래서 진짜든 아니든 사람들이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을 하기도 한다.


'지금-여기'에서 잘 살기 위해. '지금-여기'에서 잘 산다면 '다음-거기'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을테니, '다음-거기'에서 잘 살기 위해서라도 '지금-여기'에서 잘 살 수밖에 없다.


김동식 소설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환경오염을 시킨 인간이 무엇으로 환생할까? 그 점을 생각하게 해도 좋을 소설인데, 손톱으로 환생한 인간도 있다고 하니... 윤회가 있다고 가정하고, 하늘(땅 속) 법정- 그 법정이 땅 속에 있는지, 하늘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 에서 잘못에 대해서 어떤 윤회 판정을 내릴지, 안 좋은 행동, 또는 범죄 행위를 두고 환생을 시킬 때 어떤 존재로 환생시킬지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이 소설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수염으로 환생한다. 안 좋은 행위를 저지른 탓에 칼에 몸을 잘리는 고통을 겪게 되는, 수염 주인공이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을 겪어야 하는 벌을 받는 인간. 그는 그 인간의 빠른 죽음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는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깎이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 행복할까? 왜? 글쎄. 


그는 분명 수염으로 환생했다. 그런데 어떤 존재의 수염으로 환생했을까? 읽으면서 아랍인?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 조선시대 사람? 많은 생각을 했는데, 결말에서 아, 그렇구나!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 수염으로 환생한 거였지? 이 결말이 맞네.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존재의 수염으로 환생했는지는 상상하든지, 아니면 소설을 읽든지 해야 한다. 상상했던 결말과 소설이 같다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 될테니)


더 많은 소설이 있지만, 그 소설들은 직접 읽어야 더 재미가 있다. 이렇듯 김동식 소설은 짧은 분량 안에 생각지 못한 결말, 그리고 우리 사회를 환기하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고, 재미라고 하겠지만. 


지루하지 않고, 요즘 같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시대에 김동식 소설은 빠르게 전개되고, 예기치 않은 결말로 인해서 우리들에게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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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 우아하고 유쾌하게 나이 든다는 것
노라 에프런 지음, 김용언 옮김 / 반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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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에프런. 모르는 사람? 


영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사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쓴 작가라고 한다. 연출도 했다고 하는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를 연출했다고 한다. 물론 더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품이니... 


에프런이 나이들어서 쓴 수필이다. 수필이 지닌 솔직함이 이 책에 배어 있는데, 나이들어서 자꾸 잊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 기자가 되기 위해 언론사에 들어가서 겪은 이야기를 쓴 '저널리즘에 대한 러브 스토리'는 당시 언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여성들이 겪는 일들, 남성이라면 결코 하지 않은 일을 하게 하는 당시의 관습이 이 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럼에도 글이 어둡지 않아서 읽기에 좋고.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지만, 에프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이 많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여기에 자신이 영화를 하면서 했던 실패작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이루었다는 상투적인 주장을 하지 않아서 좋다.


에프런은 '내가 보기에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172쪽)라고 한다.


그렇다,. 실패는 과정이다. 한 번의 실패가 성공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수많은 실패들이 인생에서 벌어진다. 그렇다고 실패에 좌절해서도 안 된다. 실패는 또 다른 실패를 이끌 수도 있지만, 실패가 바로 끝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과정이다. 그런 과정, 자신이 겪어왔던 과정을 유쾌하게 펼쳐보이고 있는 이 책. 에프런의 수필집. 


영화에서,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겪었던 성공, 실패를 통해서 한 인생을 잘 살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이 책, 읽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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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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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결국 틀이다. 그것을 찢었다는 말은 틀을 거부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이 책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사회적 통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왜 여자들일까? 사회적 통념을 깬 남자들도 있을텐데... 역사에서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남자들이다. 어떤 책을 보아도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그리고 사회적 통념이 주로 남성에 의해서 만들어졌기에, 그들은 통념을 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이미 기득권을 쥐고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 틀에서 벗어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익숙한 사회 환경에서 그냥 살아가면 된다. 반면에 남성에게 익숙한 환경이 여성에게는 너무도 낯선, 그런 환경 속에서 지내려면 남성보다는 몇 배의 노력을 더해도 익숙해지기 힘들다.


실력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여성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통념이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제약이 많은데, 말로도 제약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데 많은 고난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틀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틀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꽃 피우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틀을 깨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이다. 사람들이라는 표현대신 여자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은 제약을 받았고, 그들에게는 유독 캔버스 안이라는 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여자들은 남자의 이름을 빌려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자의 이름으로 작품을 냈을 때는 찬사를 받던 그림이, 똑같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고 밝힌 순간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었던 일들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데...


틀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긴 스웨덴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는 너무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여성이 그럴 수 없다는 판단에서 죽은 지 약 300년 뒤에 무덤에서 나와 성별을 감정받았다고 하니, 여왕도 그러할진대 다른 여자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례들을 굳이 페미니즘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아직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이 성별이나 또는 자신의 성적 지향에 따라서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페미니즘은 여전히 필요하다.


미술과 관련해서 여성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또 그런 사회적 틀을 어떻게 깨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지, 그들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어떠했는지를 서술하는 이 책은 자연스레 페미니즘과 연결이 된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예술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을 이 책을 읽으면 실감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알려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 책을 읽으면 왜 페미니즘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표현된 모습을 부정하기는 힘들테니까.


그리고 그 그림들에 나온 모습이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을테니까. 그런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특히 여자에게는 얼마나 불평등한 것인지를 그림과 설명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순간순간 놓치고 있었던 모습을 이 책에서는 잘 포착해서 보여주고 있다.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대해서도, 둘의 관계가 평등할 수 있음을, 그림을 완성하는데 화가만이 아니라 모델로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모델을 객체로 만들지 않고 그림을 완성하는 주체로 만드는 화가들이 바로 여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남성 화가들이 여성 모델들을 객체로 또는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는 도구로만 여겼던 경우가 많았음을, 그것이 문제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또한 성폭력에 관한 그림들, 그런 그림을 통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피해자다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기도 하고... 그림을 통해서 삶과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니, 여자든 남자든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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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나 노, 지나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이란주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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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살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아이들. 미등록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도 안 되어 있고, 그렇다고 외국인 등록증도 없는 아이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 부모가 출생신고를 할 수가 없다. 부모도 미등록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한때 불법체류자라고 불렸던. 아이 출생신고를 하러 갔다가 자신이 추방당할 수 있으니, 아이가 태어나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 있어도 없는 아이가 된 아이들. 태어나지 않았어도 어린 시절에 부모를 따라 들어왔지만, 등록이 되지 않아 역시 미등록인 아이들.


이 소설은 르포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 처한 현실이 이 소설에 너무도 잘 나타나 있다.


주인공인 로지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아이. 이슬람을 믿는 아이. 부모 역시 방글라데시에서 왔고, 우리나라에서는 미등록 노동자로 남았고, 그들 역시 이슬람을 믿는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 소설에서 로지나가 겪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은 할랄 제품이 제법 나온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할랄이라는 말조차 몰랐다. 게다가 이슬람이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사실, 그들은 라마단이라는 금식기간이 있고, 또 하루에 다섯 번은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러니,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겪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 음식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알 수 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이슬람 율법에 맞게 도살한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러니 그 기준에 맞는 음식을 찾기가 힘들다.


로지나 역시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들어가서 겪게 되는 어려움 중에 친구들과의 관계나 학습을 따라가는 어려움보다는 바로 이런 음식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가장 크다.


먹을 음식이 별로 없는 상황.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는 상황. 돼지기름을 쓰거나, 돼지고기가 섞인 음식이 얼마나 많은가. 꼭 돼지고기만으로 만든 음식이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로지나는 나름대로 절충을 한다. 아빠가 소주를 마시듯이.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 이슬람을 배척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그럼에도 그들에게 호감을 지니고 함께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아마도 미등록이든 등록이든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선진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들은 우리나라에서 산 것이 아니라 일만 한 것이라고 하는 말에 가슴이 저려왔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고, 자본은 어느 나라든 가리지 않고 환영받으며 들어가는데, 노동자들에게는 국경이 있고, 어떤 노동자들은 환영받지 못하고 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고 있기도 하는데, 그런 불안한 생활조차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일만 하게 되는 현실. 


그러니 그들은 살았다고 할 수 없다고, 자신들은 일만 했다고 하는 장면에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로지나가 어린 시절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성년이 되기까지를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데, 로지나는 거의15년 이상을 우리나라에서 살았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빠, 엄마는 일하다 병을 얻고, 로지나 역시 고등학교를 마치지도 못하고 일을 할 수밖에 없고, 그 동생도 마찬가지다. 동생의 처지는 더하다. 로지나는 결국 엄마, 아빠와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지만,(로지나는 그래도 방글라데시 말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 동생은 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말을 하지 못하는 동생. 그는 방글라데시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다. 자신도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라면서 자신이 한국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가는 과정. 그 과정이 소설에서 로지나의 시각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는 방글라데시 사람도 될 수 없다.


이렇게 어느 나라 사람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다. 


자본이 국경이 없듯이 노동자에게도 국경이 없어야 한다. 적어도 그 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등록이냐, 미등록이냐로 불법 운운하지 말고, 그들로 인해서 한 나라 경제가 운용되고 있으니, 그들을 한 사람으로서, 동등한 노동자로서 받아들이고,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지닐 수 있게 해야 한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아이, 로지나, 그가 한국에서 겪은 일들을 소설 형식으로 쓴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등록이주 아동들의 현실을 생각하게 해준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그들도 사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조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소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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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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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서는 아름답지 않다. 어떤 용서는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용서를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모든'이라는 말을 용서에 붙이면 안 된다.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나치 SS대원이 죽을 때가 되어서 유대인에게 자신이 한 행동을 용서해 줄 수 있느냐고 한다.


그 말은 들은 비젠탈은 침묵을 지키고 그 방에서 나온다. 그리고는 그 일이 마음에 남아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한다.


이 책은 그러한 비젠탈이 경험한 내용과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보내준 사람의 글을 모아놓았다. 자, 과연 용서를 할 수 있을까? 


학살에 가담한 행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미 사람들은 학살당해 죽었는데, 그들은 용서를 할 수가 없는데... 또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실을 같은 유대인이라고 대표로 용서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독일인은 진정으로 참회했는가? 


다양한 논점에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정답은 없다. 상황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용서에 대한 개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글쎄 개인의 차원과 집단의 차원이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용서하지 못할 문제가 있다.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입은 피해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표로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있다.


비젠탈이 침묵을 지키고 용서를 하지 않은 일은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용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자신의 죽음에 임박해서 용서를 구하는 일은,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청준이 쓴 '벌레이야기'와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밀양'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용서의 문제... 누가 용서를 해줄 것인가? 당사자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다른 존재에게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존재에게 용서를 받기 전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참회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을 해야 한다. 용서를 받느냐 마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진정한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냥 해야 한다.


용서는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가해자의 행동을 보고 피해자가 결정할 문제다. 그것이 용서의 의미다. 그런데 가해자가 당사자도 아닌 그 집단의 일원인 한 사람을 제멋대로 대표로 설정해서 용서를 해달라고 한다?


그러면 안 된다. 이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 자기만족일 뿐이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는 비젠탈이 용서를 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젠탈 역시 유대인으로 희생자에 속하지만, 학살을 당한 사람들을 대표할 수는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나치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용서 운운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치 대원은 진정 참회를 했다면 유대인을 불러서는 안 됐다. 그들에게는 앗 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아무 유대인이나 불러달라고 한 그의 행동은, 아무 유대인이라는 말에 진정한 참회가 담겨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무 유대인이라니, 유대인들이 개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이 개인 행동을 했다가는 사살당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유대인을 아무나 불러달라고 하다니...


그가 만약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을 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정 참회하려면 수용소장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유대인 중에서도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말을 듣는 유대인도 위험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런 절차, 행동을 하지 않고 무작정 아무 유대인이나 불러달라고 한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진정으로 참회했다고 할 수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 제목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 대해서 아니다. 모든 용서는 아름답지 않다고 답하겠다. 어떤 용서는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수용하게 하기도 하니까. 또 어떤 용서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 자기만족에 불과하기도 하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이 절규하면서 하는 말, 내가 용서를 안 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가 있지라는 말. 그렇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일이다. 가해자가 받고 싶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가해자는 자신이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행동해야만 한다. 피해자가 용서해주든 해주지 않든. 그것이 참회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용서를 언급하지 않는가. 너무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편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는가.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용서로 인해 악이 근절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용서를 구하기 전에 진정으로 참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고쳐야 한다. 그때서야 용서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 이것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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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2-09-07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는 이 책 읽다가 조금 남기고 중지중인것 같은데 리뷰 덕분에 완독의지를 다져 봅니다!ㅎ 즐거운 저녁시간되십시요!

kinye91 2022-09-07 2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2부에 실린 비젠탈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들이 여러 생각을 하게 해요. 그 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하라 2022-09-08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kinye91 2022-09-08 13:49   좋아요 1 | URL
이하라 님께서도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thkang1001 2022-09-08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kinye91 2022-09-08 15:19   좋아요 0 | URL
thkang1001 님께서도 즐겁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渼沙_常水 2023-02-27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은자가 죽은이를 대신하여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살아남은 유가족 으로서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용서를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만 입니다. 가해자는 잘못했다는 사과와 반성만을 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는것 자체가 이기심입니다.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kinye91 2023-02-27 15:55   좋아요 0 | URL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가해자는 사과와 반성만을 해야 한다는 말씀 요즘 더 새겨야 할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