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파문 - 노자, 아나키, 꼬뮌
신철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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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문. 이 제목만 가지고는 도무지 노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노자 하면 무위(無爲)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런 노자를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 사랑이 퍼져 나가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둔 사상을 노자의 사상이라고 정리한 저자의 노자 읽기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하긴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라고 한다면, 그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치사상이라는 것에서 사랑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출현한 시대는 춘추전국시대이고, 그 시대는 조화가 무너지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침범하는 시대 아니었던가.

 

이 시대를 이겨내는 사상들은 바로 사랑에 바탕을 둔 사상들이 아니었을까? 이 점에서 제자백가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상들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바탕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사랑일까? 단순한 지식에 대한 사랑? 그것은 아니다. 지혜란 단지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는가를 아는 것 아니겠는가?

 

잘 살아간다는 것의 기본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이 어떻게 실현되느냐에 따라 각 사상가들이 달라지고 있는데...

 

노자는 기본적으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부정하고 자치를 주장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주장을 좀더 밀고 나가면 노자는 결코 춘추전국시대의 통일을 (노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시대니 주나라 중심의 통일을) 바라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는 중앙집권적인 거대 통치국을 바란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마을에서 스스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의 작은 공동체를 바라고 있으니, 오히려 춘추시대에 서로의 영토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노자가 어떤 주장을 했느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보다는 지금 이 시대에 노자의 주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 어떻게 노자의 주장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좋다는 쪽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노자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도덕경의 다른 해석본과 저자의 해석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그런 해석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랑에 기반을 둔 작은 공동체들의 연합,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남북의 긴장이 완화되어 평화적으로 교류 되어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지방자치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방자치가 지금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노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고, 이런 점에서 아나키와 코뮌을 노자의 사상과 연결지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또 플라톤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사상가들의 사상, 그리고 우리나라 소설들에 나타난 상황들을 종합하여 노자의 사상을 적용하고 있는 책이라고 보면 된다.

 

단지 노자의 사상을 먼 과거의 사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사상, 그것도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노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지방자치제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가 노자의 사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사랑의 파문'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 멀리멀리 퍼져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 사회가 좀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저자 나름대로 소화해서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시킨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도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덧글

 

책을 출판사에서 보내주었다. 노자의 도덕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법, 또 책을 자신에 맞게 소화시키는 법. 다양한 책들과 융합시키는 법을 보여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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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한승헌 지음 / 창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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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사람들이 최후로 기댈 곳은? 정답이 '사법부' 였으면 좋겠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이 말은 힘없는 사람들이 최후로 기댈 곳은 '없다'가 정답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힘없는 사람들만 그랬을까? 아니다. 나름대로 사회에서 인지도가 있었던 사람들,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던 사람들도 사법부에는 기대지 못했다. 아니, 사법부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정의'를 지킬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런 오욕의 역사가 바로 우리나라 재판의 역사, 사법부의 역사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이 더 확고해진 것은 바로 한승헌이 쓴 이 책,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를 읽고서다.

 

물론 한승헌이 쓴 "권력과 필화"라는 책에서도 재판부의 한심한, 강자에게는 한 없이 약하고, 약자에게는 무한히 강한 모습을 보기도 했고, 사법부의 오욕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홍구의 "사법부"에서 통렬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한국현대사를 재판을 중심으로 서술해 간 이 책을 통해서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를 그렇게 하고, 사회에서 나름 힘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은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삼권분립의 한 권력기구인 사법부가 이토록 눈치보며 재판을 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나라 현대사였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그런 그들이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마치 사회지도층인 양 행세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런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게끔 우리가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서글퍼지는 책읽기였다고나 할까.

 

첫 시작을 몽양 여운형 암살 사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을 고 노무현 전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해방이 된 직후 좌와 우의 대립이 심할 때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정치인, 국민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여운형이 암살되었는데, 그 재판이 어떻게 졸속으로 처리되었는지 책의 처음부터 우리 역사가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온갖 민주화 투쟁에 대한 탄압 사건들... 그런 사건들이 모여 우리 현대사를 만들어 왔는데, 물이 서서히 데워지다 특정한 온도가 되면 펄펄 끓어 수증기로 변하듯이 우리 역사도 이런 사건들이 하나하나 모여 결국 민주화라는 큰 흐름을 이끌어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우리는 과연 이루어내고 있는가? 이 책은 고 노무현 전대통령 재판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 이후 우리 사회를 격동에 빠뜨린 재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그 판결들이 과연 과거로부터 나아졌는지 생각해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던가? 우리가 이룬 것이 과연 민주주의 맞나? 이제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 마저도 위협 받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이렇게 처참한 역사 기록들이 남아 있고, 재판이라는 특성은 판결의 주체가 명시되어 있어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며 지내고 있는지...

 

부끄러운 역사다. 극복해야 할 역사다. 그래서 이런 책이 소중한지도 모른다.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다만, 이 책이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한국현대사라는 제목보다는 "한국정치사"라는 제목을 달아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주로 내용이 정치적인 내용이기 때문이고, 주요 사건들 역시 지식인들과 관련된 내용이지 노동자, 농민에 대한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는데 그 강물의 표면에서 일어난 일들이 바로 이 책에 나온 지식들의 재판들이라면, 강물이 쉬임 없이 흘러가게 만드는 힘, 강물의 아래에서 끊임없이 흘러가는 그런 힘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에게서 나오는데, 이 책은 그런 민중에 대한 재판 이야기는 없다.

 

어쩌면 한승헌 변호사가 자신과 관련된 재판, 또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재판을 중심으로 책을 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 나온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한 사람들, 나중에는 어떤 식으로든 (인혁당 재건위 사건처럼 사형 집행이 이루어져 어떻게든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그래도 대부분은) 보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전혀 보상받지 못한 민중들의 사건이 빠진 것이 아쉽다.

 

막강한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민중들은 재판에서 억울해도 어쩔 수 없이 힘 한 번 못 써보고 감옥에 간 경우가 많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일은 그들의 삶을 황폐하게 하고 또 가족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앗아가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역사가 이렇게 민주화를 향해 나아간 것은 그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 책의 저자도 그 점을 잊지는 않았으리라. 다만 명확하게 우리 현대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한승헌의 "권력과 필화" 한홍구의 "사법부"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자꾸 반복하고 있는 듯한 우리 역사의 바퀴를 제대로 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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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7-28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려했으나 미처 쓰지못한 책인데
리뷰를 보니 반갑네요. ^^

kinye91 2016-07-28 17:14   좋아요 1 | URL
같은 책을 읽었다는 분이 있음에 저 역시 반갑고 기쁘네요.
 

내소사 가는 길


하늘을 바라보며

제 머리를 한껏 치든

전나무들.

한 곳을 향해

온몸으로 밀고 올라가는

모습들이 그리 좋더라.

나 하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낮은 곳

다른 것들을 쉬게 하더라.

전나무.

곧고 곧게 뻗은

그 그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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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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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저리 주저리 읊조리는 말들의 향연. 그것뿐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은 클레망스라는 사람. 전직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가 주절거리는 공간은 암스텔담, 그 중에서도 이국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는 바(bar)라고 할 수 있는 '멕시코 시티'다.

 

등장인물이 여럿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클레망스 혼자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상대가 누군지는 전혀 알 수 없으며, '바'의 주인 - 고릴라라고 불리는 - 도 그의 대사 속에서나 등장할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클레망스의 말에 따라서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그냥 그의 말을 듣는 처지에 우리 역시 설 뿐이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상대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을?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 소설은 겨우 140쪽을 조금 넘을 뿐이다. 책의 편제로 140쪽을 조금 넘으니, 앞 부분을 제외하면 140쪽도 제대로 안 되는 분량이다. 그런데도 장편소설이라는 말을 쓰는데... (카뮈가 생전에 완성한 장편소설은 <이방인>. <페스트>, <전락> 세 작품이다. - 김화영의 해설, <전락>의 구조와 물의 이미지에서. 이 책 234쪽) 그 말은 동의하기 힘들고.

 

짧은 분량이지만 한 사람의 말이라는 점에서는 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은 5일에 걸쳐 있다. 즉, 5일에 걸쳐서 '바'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는 형식인 것이다.

 

독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책에 실려 있는 해설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감을 잡기 힘들다. 해설이 오히려 작품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자. 뭐, 카뮈를 실존주의니 누보 로망이니 뭐니 하는 그룹에 넣지 말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이 작품만 생각하자.

 

남들의 해설은 다 지워버리고 내 감에 따라 이 작품을 이해하자. 그러면 된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이 소설의 핵심을 바로 두 번째 날 첫부분에서 찾았다.

 

"재판관 겸 참회자"

 

이게 <전락>이라는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재판관은 남들 위에 있는 사람,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 그 사람은 위에 있기를 좋아하고 한사코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마치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 말은 절대로 옳다'라고 하는 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재판관'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런 '재판관'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니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남들에 대해서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고 그들을 재단한다. 과감하게 단호하게.

 

이런 자세를 우리들 대부분은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클레망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의 직업이 변호사 아니던가. 변호사란 무엇인가? 남을 변호해주는 사람. 변호하기 위해서는 의뢰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보다도 위에 있다고 여겨 판사에게 변호인의 상황을 알려주고 판사가 제대로 판단하게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고귀하며 남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없다. 자신은 너무도 관대하고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 바로 '재판관'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재판관'일 수는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기에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다. 그런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기도 한다.

 

참회의 자세를 생각해 보라. 우선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은 행위, 자신을 낮은 곳에 위치시키는 행위다. 위에 있다는 재판관의 자세와는 정반대의 자세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클레망스는 이 소설의 중간부를 지나면서 '재판관'에서 '참회자'가 된다.

 

'참회자'가 되었지만 그는 진정한 참회를 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점을 깨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깨뜨림, 그것이 바로 일탈로 나타난다. 일탈을 통해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던 자신의 모습을 버리게 된다.

 

이러면 위에 있던 그가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소설의 제목대로 '전락'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전락'이 나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전락'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나쁘지 않을까? 그들은 한사코 재판관의 위치만을 고수한다. 자신을 아래로 내려보내지 않는다. 아래는 너무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래로 내려온 클레망스는 더이상 파리에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암스텔담으로 온 이유는 바로 이것 아닐까 한다. 아래로 내려온 참회자. 그에게는 '전락'한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바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이렇게 이해하고자 한다. 더 많은 것들이 나타나야 하겠지만 '재판관 겸 참회자'라는 말을 통해 이 소설을 판단하고자 한다.

 

여기서 마음이 갑갑해졌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재판관 겸 참회자'이다. 그래야 한다. 재판관에만 머물러서도 안 되고, 참회자로만 지내서도 안 된다. 이 이중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는 이럴까?

 

재판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어떤 잘못이 있어도 그들은 재판관으로서만 군림하려고 하지 않나. 결코 참회자의 자리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서라도 그들은 재판관의 자리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런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참회자로만 지내게 하려고 한다.

 

'너희는 아래에만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의식이 깨어 재판관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보를 통제하고, 자신들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려 하며,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서로 도와 그 자리에서 '전락'하지 않으려 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것이 참회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는 예수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절대적으로 '재판관'일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는 '참회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이 책 115-116쪽을 보라.)

 

하지만 예수와 달리 이렇게 낮은 곳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참회자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전락'을 읽자. 우리 안에 있는 이 두 모습, '재판관 겸 참회자'를 발견하자.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당신들에게도 이 두 모습이 있다고.. 거부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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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모든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기도 하다. 아니,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어떤 일에서 남의 앞에 또는 위에 서려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그런데, 거의가 이 말을 잊고 산다. 위에 올라가면 세상이 너무도 작게 보이므로, 아래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어쩌면 그들의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문제도 저 위에서 보면 하찮은 일에 불과하므로, 그들은 이를 무시하기 십상이다.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너무도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치열하게 위에 올라갔고,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만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라. 사람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커다란 건물들이 성냥갑보다도 작게 보이고, 밑에서 보면 감히 오르려 생각도 못하는 산봉우리들이 작은 모래성처럼 보이니...

 

그러니 위에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아래에서는 삶이 걸려 있는 치열한 일들이, 위에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말들이 정책이 되어 아래로 내려오면 아래에 살고 있던 사람들... 정말 힘들어진다. 힘들어서 아우성을 치면 저것들이 왜 저러나 할뿐...

 

그들의 힘겨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알지 못한다. 처한 자리가 다르기에. 이때 해결책은 하나다. 자신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

 

어쩌면 레임덕이란 현상은 이렇게 아래를 보라는 충고일지도 모른다. 위에만 있으면 모른다고, 당신도 다리를 저는 양처럼 아래에서 뒹굴어보아야 한다고. 그래야 아래 사람들의 생활이 보인다고. 그들의 생활을 알 수 있다고.

 

레임덕을 정권누수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정책을 돌아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면... 그 정치인은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겠지.

 

고은의 "순간의 꽃"이란 시집을 읽었다. '고은 작은 시편'이란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짧은 시들의 모음이다. 제목은 없다. 그냥 짧은 시들이 연속될 뿐이다.

 

이 중에서 이 시... 레임덕으로 괴로워하는 정치인들이 읽으면서 '아하!' 할 수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치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시이겠지만.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순간의 꽃, 문학동네. 2014년. 1판 22쇄. 50쪽.

 

이렇게 되지 않으면, 다음 시처럼 되지 않을까. 우리가 이런 비극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과연 시에서만 존재하는 일일까? 혹, 우리나라 정치는?

 

옛 시인

나라는 망하건만

산하는 있네라 하였도다

 

오늘의 시인

산하는 망하건만

나라는 있네라 하도다

 

내일의 시인

오호라

산하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였네

너도

나도 망하였네라 하리로다

 

고은, 순간의 꽃, 문학동네. 2014년. 1판 22쇄. 35쪽.

 

시인은 앞날을 내다볼 줄 안다고 하는데... 이런 시인의 말을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들으면 안 되는데... 그건 비극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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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원주 2016-07-25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이 예언자 역할을 하는 것 같네요. 함축된 언어로.

kinye91 2016-07-25 09:0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나 `탄광의 카나리아`라고 하기도 하던데, 시인의 감수성, 민감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