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주저리 주저리 읊조리는 말들의 향연. 그것뿐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은 클레망스라는 사람. 전직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가 주절거리는 공간은 암스텔담, 그 중에서도 이국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는 바(bar)라고 할 수 있는 '멕시코 시티'다.

 

등장인물이 여럿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클레망스 혼자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상대가 누군지는 전혀 알 수 없으며, '바'의 주인 - 고릴라라고 불리는 - 도 그의 대사 속에서나 등장할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클레망스의 말에 따라서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그냥 그의 말을 듣는 처지에 우리 역시 설 뿐이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상대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을?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 소설은 겨우 140쪽을 조금 넘을 뿐이다. 책의 편제로 140쪽을 조금 넘으니, 앞 부분을 제외하면 140쪽도 제대로 안 되는 분량이다. 그런데도 장편소설이라는 말을 쓰는데... (카뮈가 생전에 완성한 장편소설은 <이방인>. <페스트>, <전락> 세 작품이다. - 김화영의 해설, <전락>의 구조와 물의 이미지에서. 이 책 234쪽) 그 말은 동의하기 힘들고.

 

짧은 분량이지만 한 사람의 말이라는 점에서는 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은 5일에 걸쳐 있다. 즉, 5일에 걸쳐서 '바'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는 형식인 것이다.

 

독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책에 실려 있는 해설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감을 잡기 힘들다. 해설이 오히려 작품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자. 뭐, 카뮈를 실존주의니 누보 로망이니 뭐니 하는 그룹에 넣지 말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이 작품만 생각하자.

 

남들의 해설은 다 지워버리고 내 감에 따라 이 작품을 이해하자. 그러면 된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이 소설의 핵심을 바로 두 번째 날 첫부분에서 찾았다.

 

"재판관 겸 참회자"

 

이게 <전락>이라는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재판관은 남들 위에 있는 사람,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 그 사람은 위에 있기를 좋아하고 한사코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마치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 말은 절대로 옳다'라고 하는 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재판관'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런 '재판관'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니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남들에 대해서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고 그들을 재단한다. 과감하게 단호하게.

 

이런 자세를 우리들 대부분은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클레망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의 직업이 변호사 아니던가. 변호사란 무엇인가? 남을 변호해주는 사람. 변호하기 위해서는 의뢰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보다도 위에 있다고 여겨 판사에게 변호인의 상황을 알려주고 판사가 제대로 판단하게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고귀하며 남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없다. 자신은 너무도 관대하고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 바로 '재판관'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재판관'일 수는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기에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다. 그런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기도 한다.

 

참회의 자세를 생각해 보라. 우선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은 행위, 자신을 낮은 곳에 위치시키는 행위다. 위에 있다는 재판관의 자세와는 정반대의 자세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클레망스는 이 소설의 중간부를 지나면서 '재판관'에서 '참회자'가 된다.

 

'참회자'가 되었지만 그는 진정한 참회를 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점을 깨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깨뜨림, 그것이 바로 일탈로 나타난다. 일탈을 통해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던 자신의 모습을 버리게 된다.

 

이러면 위에 있던 그가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소설의 제목대로 '전락'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전락'이 나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전락'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나쁘지 않을까? 그들은 한사코 재판관의 위치만을 고수한다. 자신을 아래로 내려보내지 않는다. 아래는 너무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래로 내려온 클레망스는 더이상 파리에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암스텔담으로 온 이유는 바로 이것 아닐까 한다. 아래로 내려온 참회자. 그에게는 '전락'한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바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이렇게 이해하고자 한다. 더 많은 것들이 나타나야 하겠지만 '재판관 겸 참회자'라는 말을 통해 이 소설을 판단하고자 한다.

 

여기서 마음이 갑갑해졌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재판관 겸 참회자'이다. 그래야 한다. 재판관에만 머물러서도 안 되고, 참회자로만 지내서도 안 된다. 이 이중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는 이럴까?

 

재판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어떤 잘못이 있어도 그들은 재판관으로서만 군림하려고 하지 않나. 결코 참회자의 자리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서라도 그들은 재판관의 자리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런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참회자로만 지내게 하려고 한다.

 

'너희는 아래에만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의식이 깨어 재판관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보를 통제하고, 자신들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려 하며,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서로 도와 그 자리에서 '전락'하지 않으려 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것이 참회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는 예수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절대적으로 '재판관'일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는 '참회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이 책 115-116쪽을 보라.)

 

하지만 예수와 달리 이렇게 낮은 곳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참회자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전락'을 읽자. 우리 안에 있는 이 두 모습, '재판관 겸 참회자'를 발견하자.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당신들에게도 이 두 모습이 있다고.. 거부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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