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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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태어나 우리나라 근대 미술을 일구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화가들만이 아니라 그들과 교류를 했던, 소위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에 대한 소개도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책은 근대 한국의 예술가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은 '화가와 시인의 우정'이다. 화가와 시인의 우정 하면 우선 떠오르는 사람이 이상과 구본웅이다. 이들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상 역시 그림도 그렸으므로, 화가와 친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고. 


이상과 구본웅 말고도 더 많은 사람들이 언급된다. 처음 듣는 사람도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 근대 예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음을 깨달으라고 하는 듯이.


백석과 정현웅, 정지용과 길진섭,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김광균과 최재덕, 박수근과 박완서, 김환기와 그가 사랑한 시인들이라고, 이러한 예술가들에 '미술과 문학이 만났을 때'라는 제목을 붙여서 서술하고 있다.


김환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에서 따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니, 미술과 문학의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박완서를 소설가로 만든 '나목'에는 박수근이 나온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 이여성은 정치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또 이여성이 화가 이쾌대의 형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이런 이야기 다음에는 화가 부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그림에 종사하던 사람들. 일제시대에 태어났단면 가부장제가 극성을 부리던 때인데도, 자신의 부인을 화가로 인정하고, 또는 남편을 화가로 인정하고 서로의 작업을 인정하던 사람들 이야기.


도상봉과 나상윤, 임용련과 백남순, 이중섭과 이남덕, 유영국와 김기순, 김환기와 김향안, 김기창과 박래현이 나온다. 물론 다 화가 부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림에 대해서 안목이 있고, 인정을 해주는 관계임에는 틀림없다.


3부는 가혹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화가들 이야기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개인적인 어떤 이유로 고난을 겪은 사람들. 그러나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기 세계를 개척해 간 사람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혜석, 이미륵, 김재원, 배운성, 임군홍, 이쾌대, 변월룡, 이인성, 오지호가 그들이다.


4부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을 꽃피운 사람들이 나온다. 미술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 한국 근대 미술은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이대원, 장욱진, 박고석, 김병기, 이성자, 백영수, 변시지, 권진규, 문신이 그들이다.


이렇게 총 30개의 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나오는 예술가는 이보다 조금 많다. 한 글에 여러 명이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이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이들 작품의 특징도 잘 설명되어 있으며, 생애를 간략하게 전달해주어서 그들을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한국 근대 미술가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운 그들로 인해 우리 문화가 풍요로워졌음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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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04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신 작가 전시 하면 가보고 싶어요.

kinye91 2024-11-04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이 책에 나온 작가들 전시 가보고 싶어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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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짧은 소설이 이렇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니... [맡겨진 소녀]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은 더한 울림을 준다. 아, 아, 아~ 무엇일까? 무엇이 자꾸 소설을 생각하게 할까?


우리 삶이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사소한 것들을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것도 사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알게 모르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그것이 앞으로의 내 삶의 방향을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을 자신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또한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행복을 유지해주고 있는 사소한 것들을 잘 모르고 지낸다는 것. 


그러다 어느 한 순간 행복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작은 행복에 더 연연하게 된다. 그것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펄롱처럼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22쪽)고 하기 때문이다. 잃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린다. 귀를 막는다. 입을 다문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시민의 삶. 소시민의 행복은 그렇다. 하지만 정말 그런 삶이 행복할까?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게 된 펄롱에게는 그것을 무시하고 가족과의 행복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수녀원 또는 수도원과 척을 지게 되더라도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느냐의 갈림길에 선다. 이때 펄롱은 자신을 돌봐주었던 미시즈 윌슨과 네드를 생각하고, 자신의 엄마를 떠올린다. 미혼모였던 엄마를 수녀원에 갇힌 세라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런 엄마를 받아들여줬던 미시즈 윌슨과 자신을 키워줬던 네드를...


그래서 그는 결국 수녀원에서 세라를 데리고 나온다.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나중 일이다. 그때 세라를 데리고 나오면서 그가 한 생각이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119쪽)


자, 마음은 가벼워졌다. 비록 그의 앞길에 불행과 어려움이 밀어닥칠지라도, 그는 오히려 행복하다. 왜냐하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21쪽) 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짧은 소설 안에 펄롱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지금 가족과 지내는 단란한 생활을 펼쳐보이고 있다. 그러한 소소한 행복이 펄롱으로 하여금 세라를 구하게끔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소한 친절, 행복들이 모여서 지금의 그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쪽) 


이렇게 깨달은 펄롱이 어려움에 처한 세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앞에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펄롱은 최악의 어려움을 건너갔기 때문에 견뎌낼 것이다. 자신을 이룬 사소한 것들의 행복을 배신할 수 없기에... 


아, 이렇게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사소한 것들이고, 그런 것들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불행을 무시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왜냐하면 남들도 그러한 사소한 것들, 조그마한 친절이나 도움 등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짧은 소설이다. 제목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지만 알고보면 이 사소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의 삶을 만들어낸다. 우리들의 행복을 유지시켜주는 요소들이다. 그러니 사소한 것들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눈, 귀, 입을 지녀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들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끝장을 덮으면서 더 큰 울림으로 마음을 울린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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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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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한때는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나라. 지금은 미국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경제도 어려워 미국으로 넘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나라. 그런 멕시코에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것.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볼라뇨 소설을 읽기 시작하다. 어느 책에선가 볼라뇨란 작가에 대한 소개를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그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소설로 구현해 냈다고 해서 어떤 작품일까 꼭 읽어봐야지 했다.


첫작품으로 [부적]을 읽기로 하다. 멕시코에서 일어난 학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았다. 멕시코 대학에 군대가 진입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체포해갈 때 화장실에 숨어 13일을 버틴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을 소설에서는 아욱실리오라는 여성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아욱실리오의 생각이 여러 곳으로 뻗쳐 나가는 모습을 소설은 표현하고 있다. 즉 아욱실리오의 독백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우루과이 사람인 아욱실리오가 멕시코에 도착해서 겪게 되는 일. 이렇게 라틴아메리카는 특정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라틴아메리카라는 대륙을 공통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공포물이다. 탐정 소설, 누아르 소설, 호러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고, 그래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잔혹한 범죄 이야기다.' (9쪽) 


이미 소설의 시작에서 선언하고 있다. 잔혹한 범죄 이야기라고. 누구의 범죄. 멕시코 독재 정권의 범죄. 1968년 9월에 멕시코 대학에 난입하고, 10월 2일에 학살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은 멕시코에서 벌어진 학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화장실에 갇힌 아욱실리오가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시집을 읽으면서, 그 시들을 외우면서 또 화장지에 시들을 쓰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과정. 라틴아메리카의 생활이 생각을 통해서 드러나고, 여기에 칠레에서 일어난 1973년 피노체트의 쿠테타(또다른 9.11이다)까지도 언급이 된다. 이것들이 직접 묘사되지 않고 생각 속에서 펼쳐진다.


그렇지만 그 생각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가 겪고 있던 현실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가 있게 되는데, 독재 정권의 탄압이 바로 잔혹한 범죄가 될 것이고, 그럼에도 문학은, 예술은 부적처럼 사람들을 살아남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들은 노래는 비록 전쟁과 희생당한 라틴 아메리카 젊은 세대 전체의 영웅적인 위업에 관한 것이었지만, 나는 다른 무엇보다 용기와 거울들, 욕망 그리고 쾌락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노래는 우리의 부적이다.' (180쪽)


주인공인 아욱실리오가 환상 속에서 듣는 노래. 끌려가는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 비록 그들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노래는 살아남아서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미래를 이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학(예술)은 독재 정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는, 독재 정권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부적에 해당한다는 것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문학(예술)을 아무리 죽이려 해도 문학(예술)은 죽지 않음을 아욱실리오의 예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한 문학(예술)의 부적 역할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 시인 김남주를 떠올렸다. 아니, 자연스럽게 아욱실리오에 겹쳐 김남주가 떠올랐다. 이 소설과 연관지을 수 있는 김남주의 시가 있을까 찾아보다 '시인의 일'이란 시를 만났다.


'수천의 시민을 학살하여 / 양키의 이익을 지켜주고 / 그 대가로 세자책봉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 장군인 너의 일이라면' (김남주, '시인의 일' 1연.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년 초판. 304쪽.)으로 시작하는 시.


첫연에서 바로 너의 일은 독재다. 잔혹한 범죄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이런 이에게 동조하는 이들도, 찬양하는 이들도 모두 너희들, 그들의 일이다. 결코 시인은 하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일을 할까? 바로 이런 일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부적 역할을 해야 한다. 


부적은 악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문학(예술)은 잔혹한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지켜주지는 못할지라도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아욱실리오처럼 화장실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욱실리오가 화장실에서 시를 읽고, 외우고, 쓰는 일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감옥에서 시를 쓰면서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던 김남주 시인을 생각하게 된다. 김남주 시인에게도 시는 부적이었다.김남주 시인은 이렇게 시인의 일을 말한다. 바로 '부적'과 같은 일이다. 이 소설에서 아욱실리오가 하는 일이다.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부적은 멈춤이 아니라 전진이다.


'시인인 나의 일은? / 이 자가 저질러놓은 죄악 / 그 하나하나를 파헤쳐 / 만인에게 만인에게 만인에게 고하고 / 일깨워 민중들 일어나 단결하게 하고 / 자유의 신성한 피의 전투에 / 나아가자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노래하는 일.' (김남주, '시인의 일' 마지막 연.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년 초판. 305-306쪽.)


하아, 어디 김남주 시인뿐이랴. 이런 '부적'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 중에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만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이렇게 아욱실리오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부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 여전히 우리나라는 독재자들의 잔혹한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전체가 아욱실리오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그리고 언뜻언뜻 언급되는 멕시코와 칠레의 학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정신이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볼라뇨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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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서사시다. 시인이 십여 년을 환경파괴에 맞서 싸운 기록이다.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이 된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자들에 맞서는 시인의 마음이 이 시집에 온전히 들어가 있다.


  말이 필요없다. 그냥 읽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을 보호하자는, 환경을 파괴하지 말자는 구호보다 더 마음에 와닿게 된다.


  자연스레 자연에 마음이 쏠리고 환경을 보호해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를 또한 우리 미래 세대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집을 읽으면 시인의 말에서 한 '문학의 원사(原絲)는 '비애'입니다'(16-17쪽)라고 한 말이 가슴에 들어박힌다.


비애... 그렇다. 슬픔이다. 무엇에 대한 슬픔인가. 나를 둘러싼 또다른 '나'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슬픔, 아픔이다. 이런 아픔을 무시하지 못하고 나서게 되는 것이 바로 시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시인은 시로써 나서기도 하지만 행동으로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행동이 행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행동은 다시 시로 나타난다.


자연과 함께 했던 일들이, 보금자리를 골프장에 빼앗기고 쫓겨나게 될 운명에 처한 뱀을 보고도 징그럽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러한 뱀을 보고도 슬픔을 느낀다.


       허물


골프장 쪽 둔덕을 내려온 초록색 뱀은

내 오른손 검지를 스쳐

오엽딸기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산길에 떨어진 골프공을 줍던 나도 놀라고 비탈을 흐르던 저도 놀라고

야생이 스쳐간 손에 뱀 비린내가 돋아

슬픔이 독처럼 몸에 퍼졌다


조정,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 이소노미아. 2023년. 42쪽.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쫓아내야 하는지... 그 생명 중에 사람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까? 골프장이 들어서면 동네 사람들이 골프장을 이용할까? 골프장으로 더 편리한 생활을 할까?


아니다. 골프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밀어버린 산, 새로 만든 웅덩이, 잔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뿌리는 온갖 제초제들... 그리고 수시로 날아오는 골프공.


동네 사람이 아닌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마을 사람은 물론이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던 동물들이 집을 잃고 떠나야 한다. 한 순간에...그러니 시인이 마음에 '슬픔이 독처럼 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슬픔을 마냥 안고 살아갈 수 없기에 시인은 슬픔을 털기로 한다. 슬픔을 이겨내기로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자연을 지키는 일이다. 산황산을 지키는 일. 골프장이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렇다면 이는 전국으로 확대될 수가 있다. 개발 광풍으로 사라지는 자연ㅡ생명에 시인은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인의 마음, 행동이 시집 전체에 펼쳐져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은 하나하나의 서정시이면서도 서사시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사람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장대한 서사시.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자연을, 새싹들을 '마법사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시인. 이런 마법사의 제자들을 우리가 막으면 되겠는가. 마법사의 제자들은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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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시간 틂 창작문고 14
김숨 지음 / 문학실험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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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정의기억연대'에 따르면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한다. 거의 십만 명에 가깝게 끌려갔던 위안부 중에 생존자가 이제 한 자리 숫자가 되었다. 그런데, 한자리 숫자로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과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던가?


어떤 사람이 그랬다. '위안부'라는 명칭을 쓰지 말자고.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위로와 편안함을 주었단 말인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대가로? 아니다. 이들은 위안을 준 사람들이 아니라 성 착취를 당한 '성노예'였다.


근대에 들어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니, 현대판 성노예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어느 정도 들어설 여지가 있어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고. 가끔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기에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가 어쩌면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예는 자신의 의지를 빼앗긴, 다른 존재에 의해서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존재다. 


노예제도가 없는데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 치욕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입으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 말을 할 때마다 그 고통이 떠오를 테니.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아도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특히 가족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상황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역사적 비극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고, 세계 곳곳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워 잊지 말자고,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었을까? 아니 제대로 들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작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했다. 또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 중에서도. 


세상에, 노예라는 말에 자발성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그들의 말하기는 정말 '듣기' 능력이 영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안 된다.


이들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들으려고 해도 말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은 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김숨의 소설에 드러나 있다. 증언을 녹취하기 위해 황 할머니를 만나러 간 화자는 할머니 앞에 녹음기를 놓고 할머니 말을 들으려 하지만 할머니의 긴 침묵, 그리고 여동생의 반대에 부딪치고 만다. 


할머니가 말을 하게 하려 하지만 할머니는 말을 하지 않는다. 침묵, 침묵... 이 침묵이 고스란히 녹음기에 담긴다. 그렇다. 침묵 속에 있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녹취를 하려는 화자는 그 침묵 속에서 말을 찾아내고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녹취록으로 나올 수가 없다. 할머니가 한 말은 단 몇 마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온몸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할머니의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담겨 있는가? 화자는 그 점을 안다. 그래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지만 하루 동안 할머니는 몇 마디 말만 할 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듣기는 어떠해야 하는가? 침묵 속에서 발화되지 않은 말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말을 들어야 비로소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꼭 입을 통해 음성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통해 나오는 그 말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녀야 하지 않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163쪽) 모르는 소리를 듣는다. 온몸으로 듣기 위해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몸을 다 가져갔어……

그래서 ……  몸이 없지 ……

다 가져가서……

죽지도 못해 …… 몸이 없어서……

피는 나……

피는 눈에서 나는 거니까……

거기…… 굴 속에……

눈을 감아도 피가 흘러……  (163-164쪽)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평균 연령은 94세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별로 없다. 그 점을 알고 제대로 들어야 한다. 


김숨의 이 소설 [듣기 시간], 바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들을 드러내주는, 잘 듣기를 통한 표현이 이루어진 작품들이 있다. 김숨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그래서 더욱 잘 들어야 하는 일들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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