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세 도시가 나온다. 세 도시? 그렇다면 이 도시가 의미하는 사람들은?


  시집이니, 당연히 시인일 거라 생각한다. 아니, 꼭 시인일 필요는 없다. 문인이라고 하자. 


  강릉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이율곡, 신사임당, 허균, 허난설헌? 어라, 모두 예전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이 시를 쓰기도 했겠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을 해보면, 강릉은 바로 시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강릉에 산다고 하기보다 강릉 사람이라고 하자. 그에게 강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장소다. 그러니 시인의 삶에, 시인의 시에 영향을 미친 장소가 바로 강릉이다.


그렇다면 프라하는? 프라하 하면 카프카가 떠오른다. 카프카? 변신... 소설가... 하지만 최근에 읽은 카프카의 시집도 있으니 그를 꼭 소설가로만 기억할 필요는 없다.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물론 체코어로 작품을 쓰지 않고 독일어로 썼지만, 그를 프라하 사람이라고, 프라하는 바로 카프카의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엔 함흥이다. 함흥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함흥? 백석?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석이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니까. 그곳에서 자야를 만났으니까. 함흥은 백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가 된다.


이렇게 세 도시는 바로 작가의 삶을 이루는 장소가 된다. 시인은 강릉에서 이렇게 카프카와 백석을 자신 시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즉 이 시집에는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카프카와 백석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보자.


강릉, 프라하, 함흥


카프카는

살아서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다

뾰족탑의 이끼와

겨울 안개가

그를 기억한다


내곡동 지나

보쌀 지나

남대천 둑방을 따라

바다로 간다

안목에 가면 바다가 둥지고, 바다가 무덤인

갈매기들이 산다


이홍섭, 강릉,프라하,함흥. 문학동네.2023년 3판 1쇄. 19쪽.


이시에서 왜 함흥? 할 수도 있다. 함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앟으니... 그렇다면 비슷한 제목을 가진 시 한편을 더 보면 된다. '춘천, 프라하, 함흥'이다.


춘천, 프라하, 함흥


이렇게 안개가 내리면

귀가 커 외롭던 카프카가 좋고

모르긴 해도, 당나귀를 닮았을 백석이 좋다


멀리 불빛, 불빛 같은 것도 잠기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겸손하게 사라질 때

언덕 위 자취방에 돌아와

주인집 노부부가 아끼는 노란 국화를 바라보는 일도


이홍섭, 강릉,프라하,함흥. 문학동네.2023년 3판 1쇄. 36쪽.


이 시를 보면 분명하게 백석이 나온다. 그러니 시인의 시에 영향을 준 사람은 카프카와 백석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이 문인들이 아니더라도 도시는 장소가 되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시에 영감을 준다.


그렇게 시가 탄생하기도 한다.


서정적인,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많이 있는 시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카프카나 백석의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드는 시집이다. 그런 문인들처럼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을 느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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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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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본다. '다른 노선이나 교통수단으로 갈아탐.'이라고 나와 있다. 쉽게 말하면 갈아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환승'이란 말이 긍정적으로 쓰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있다. 


'환승 연애'라고 할 때. 상대를 갈아타는 연애라고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 상대를 비난할 때 이렇게 '환승'이라는 말을 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이 대사를 사랑이라는 말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에겐 '환승 연애'란 긍정적일 수가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우리 사랑 변치 말자고 맹세했지만 변했다는 내용의 가사도 있지 않은가. 영화에서도 사랑은 변하지 않았는가. 이 영화에 또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말도 있다고 하니. 사랑은 불변하지 않는다. 변화한다. 다만, 그때 사랑했던 때의 감정, 그 사랑만은 진실한 사랑이었음을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 즉 사랑에서 사랑으로, 대상은 변하지만 사랑은 계속 존재한다.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그러니 '환승 연애'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서 했던 연애라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과연 그런 이용을 사랑이라고, 연애라고 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사랑을 잠시 제쳐두고, 대중교통을 생각해 보자. 대중교통에서 '환승'은 꼭 필요하다. '환승'이 없다면 목적지까지 더 힘들게 가야 한다. 환승은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번에 죽 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환승을 해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많은 환승을 한다. 우리가 환승해야만 하는 역들이 있다. 그 역은 우선 태어날 때이다. 비존재에서 존재로 환승을 한다. 그것이 태어남이다. 그러다 부모 곁을 떠날 때가 있다. 이것 역시 환승이다. 이때 환승하지 않으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 다음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다. 자라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다. 학교라는 환승역이다. 국민의 95% 이상이 고등학교까지 다니니, 굳이 다니지 않더라도 적절한 때에 환승을 한다. 대학, 대학원도 있고, 아예 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 역시 인생에서 환승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환승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환승을 한다. 그때마다 밀려서 환승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야할 곳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서 환승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삶에서 마지막 환승역은 죽음이다. 존재에서 다시 비존재로, 즉 기억의 존재로 환승을 해야 한다. 이때 환승하지 않겠다고 버틸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도 환승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이런 환승들을 통해서 삶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결국 우리 삶은 수많은 환승역들을 거쳐야 한다. 그 역들이 많고 적을 수는 있지만 환승을 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한정현 수필집이라고 해야 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정현의 작품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었고, 한정현이 보면서 생각한 영화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정현이 생각하는 환승도. 그런 환승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임을,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일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소설과 마찬가지로 한꺼번에 읽기에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그냥 천천히 자주 오랫동안 읽고 싶었다. 환승을 해야 하는데, 환승하기 싫어서 다음 환승역까지 더 가게 되는 경우처럼, 한정현의 이 책도 그렇게 환승을 머뭇거리게 한다.


'환승 인간'을 읽고 환승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한정현 작가에서 다른 작가로 '환승'하기는 망설이는 상태. 그런 상태를 경험하게 한 책인데...


덕분에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작가가 소개하는 작품 중에서 읽지 않은 작품들 찾아서 읽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이것이 바로 '환승'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작가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글도 있고, 이 책에서 작가는 소설은 진실이고, 이 수필에서는 진실이 아닌 것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수필은 사실이니 그 점을 명심하면 되고.


여러 사실들을 허구와 섞어서 진실된 세계를 창조해 낸 것이 소설이라고 보면, 소설은 허구의 세계이자 진실의 세계이다. 그러니 작가가 살아오면서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을 진실되게 형상화한 세계가 바로 소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진실의 세계일 테고, 이 책은 수필집이니 진실을 추적하는 사실들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다양한 경험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그런 경험들을 읽은 소설과 비교할 수도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작품을 쓴 작가가 이야기하는 다른 작품들을 만날 기회를 줘서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책은 나에게 다른 작가, 다른 작품들로 넘어갈 수 있는 '환승역'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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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돈키호테 - 박웅현과 TBWA 0팀이 찾은 창의력 열한 조각
박웅현 외 지음 / 민음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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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함의 대명사.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읽은 돈키호테는 정말로 엉뚱한 사람이었다. 풍차를 괴물로 착각해 창을 들고 돌진하다니... 완역본으로 읽었을 때는 2부에서 다른 생각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돈키호테는 엉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끝이었는데...


이런 돈키호테를 창의성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 책은. 그렇다. 엉뚱함이란 기발함과 통할 수 있다. 남들이 생각하는 길에서 벗어난 사람을 기발하고 엉뚱한 사람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기발하고 엉뚱한 사람들은 대개 배타적인 취급을 받았다. 남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남의 이해에 굳이 매달리지 않았다. 남의 이해보다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매진했다. 돈키호테를 보라. 주변 시선을 의식하기나 하는가.


이 책은 박웅현이 읽은 카잔차키스의 글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 역시 조르바라는 이질적인 사람을 만나 겪은 일을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지만, 그의 글에서 '스페인은 여러 국가들의 돈키호테다. ... 안전과 복지를 우습게 여기면서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영원히 좇는다. ... 콜럼버스, 그는 바다의 돈키호테였다.' (6쪽)라는 구절을 보고, 아, 이것이구나 하고 돈키호테들을 찾는 일을 했다고 한다.


찾으려고만 하면 찾게 된다. 돈키호테를 소설 속의 인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한 순간, 도처에 있는 돈키호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도 돈키호테라고 생각한다. 이런 돈키호테들 중에 스페인 사람으로 건축가 '가우디'를 들 수도 있겠고.


하지만 이들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알려져 있는 인물도 좋지만, 다른 방향에서 돈키호테들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러한 '돈키호테 프로젝트'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책답게 시작을 책에서 한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 그 잡지를 만든 한창기라는 사람. 그렇다. 발상의 전환. 그러나 단순히 발상만 전환해서는 안 된다. 그 발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추진력을 갖추고 완성도를 추구해야 한다.


발상의 신선함으로 끝나지 않고, 결과의 완성과 아름다움으로 끝나야 한다. 그래야 돈키호테가 될 수 있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뿌리깊은 나무]는 참신성과 더불어 잡지 내용의 알참, 디자인의 아름다움 등을 갖췄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새로운 시도였지만 많이 읽힐 수 있었다고...


'임스 체어'를 만든 부부도 마찬가지고...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돈키호테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 책의 말미에 가면 세종대왕이 등장한다.


그렇지. 세종대왕도 돈키호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의 길, 조선의 길을 가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중국 역법에서 벗어나려 했고, 조선의 성정에 맞는 음악, 과학을 하려 했으며, 종국에는 조선인이 쓰는 말을 표기하는 언어,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으니...


발상의 전환만이 아니라 그것을 추진하는 추진력, 그리고 완성해서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함까지 갖춘, 모양새도 아름다운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세종이라는 돈키호테에 의해. 지금 우리는 이런 한글에 '디자인'을 더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온 인물 중 한 사람인 장사익이 글씨를 쓰면서 써놓은 한글을 디자이너 이상봉이 자신의 옷에 한글을 입혀, 그것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한글은 이제 글자로 끝나지 않고 디자인으로 패션계까지 나아가게 됐다.


마찬가지로 한글의 모양을 여러 폰트로 만드는 작업도 이뤄지고 있으니, 세종이 업적이 다른 방향으로 계속 뻗어나가고 있다. 이것이 돈키호테들의 매력이다.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 다른 분야로 계속 확장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중 몇몇을 예로 들면 '겸재 정선, 고흐, 장사익, 서명숙, 제너, 마네, 구본창' 등이 있다. 이들 말고도 더 많은 돈키호테들이 있겠다.


그럼 이런 돈키호테를 찾는 작업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단지 그들에게 감탄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 아니다. 돈키호테를 찾는 작업은 나의 삶을 살아가는 길을 가기 위해서다. 그들을 통해 내 삶을 반추하고, 내 삶의 길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돈키호테를 찾는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돈키호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길을 간 사람들.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절대 안 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 사람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간 사람들. 그 길에 남겨진 발자국들로 우리가 자신의 길을 찾게 해준 사람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내 길을 찾아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으니... 각자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엉뚱하고 무모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가야할 길, 가고 싶은 길이어서 그냥 가는 길일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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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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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 해도 좋고, 에세이라고 해도 좋다. 아마도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으면 에세이로 생각하기 쉬운 글들이다. 여러 장소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 그리고 그 장소에서 사람을 떠올리면서, 그들과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각 장소에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사람이 현재 살아 있지 않더라도 과거에 살았던 그 장소에 그 사람은 계속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기억하는 한. 그래서 나는 내가 있던 장소에 가면 그 사람과의 일을 떠올린다. 장소는 사람과 동떨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책 제목이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다. 과거에 만났던 곳이 아니라 다시 그 장소에서 만나는 곳이다. '여기'는 바로 그런 장소다.


소설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그 전에 읽은 애트우드의 [숲 속의 늙은 아이들]이 떠올랐다. 티그가 떠난 뒤 살고 있는(있던) 곳곳에서 티그의 존재를 발견하는 넬의 모습처럼, 존 버거의 이 소설은 어떤 장소에서 버거가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현재로 불러내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장소와 사람.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어우러져 한편의 소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특별한 갈등은 없지만 잔잔하게 장소와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버거는 특정 사건들도 소환하고 있는데, 버거가 살았던 시대를 감안하면 2차 세계대전 때의 일들이 이 소설에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럼에도 그것이 주가 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개가 되고 있다. 죽은 자도 불러내어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상상이 소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상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 그 장소에서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을 불러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일화를 통해서 그 시대를 보여주고, 그런 시대 속에서 삶이 어떠해야 했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버거의 이 소설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각 장소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희망을 지니게도 한다. 우리 역시 그들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


버거는 '한국의 독자들께'라는 글에서 '세계 곳곳, 너무나 다른 여러 역사 속의 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냘픈 희망이지요. 하지만 살찐 희망은 헛소리입니다. 그러니 이 가느다란 희망을 간직해 나갑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 없는 사람들을 불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가냘픈 희망을 지니게 하는 것. 그것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 지금-여기의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예전-여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


그래서 이 소설에는 희망이 있다. 버거가 불러온 사람들과 함께...그리고 존 버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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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8-28 09: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냘픈 희망! 어쩌면 그것이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kinye91 2024-08-28 10:33   좋아요 3 | URL
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이 희망이라고 하니, 그 희망이 바로 가냘픈 희망이겠지요. 그것이 우리를,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고 저도 생각해요.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그 이미지들이 하나로 합쳐져야 하는데, 합쳐지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서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런 이미지들이 어렴풋하게 계속 무엇으로 합쳐지려 하고 있다. 합쳐진 이미지가 시인이 의도한 이미지가 아닐지 몰라도...


  퀼트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조각조각들을 모아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하나의 형태 속에 다른 형태들이 있는데, 그 형태들은 독립해 있으면서도 전체의 구성으로 존재하는 것. 모자이크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시집에는 서랍이 참 많이도 나온다. 그래서 제목이 된 시에 나온 시어 '퀼트'와 '서랍'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랍 역시 독립된 부분이다. 그러나 퀼트의 조각이 그렇듯이 서랍 역시 홀로는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때로는 다른 서랍들과 함께 더 큰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서랍은 서랍으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퀼트가 여러 조각들의 모임이듯이, 서랍은 더 큰 존재의 일부로 존재할 때 제 기능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잃고 내용물도 잃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 인생이 바로 퀼트와 서랍 아닐까 한다. 삶의 단편들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던가. 삶의 단편들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삶이라는 전체 속에서 조망했을 때 우리 삶을 이루는 부분이 된다. 그러니 단편들이라고 하지.


이런 단편들이 모여 우리 삶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에는 수많은 서랍들이 있다. 그 서랍에 채워놓은 것이 무엇이든, 많은 서랍들을 지니고 살고, 때로는 그 서랍들을 열어 밖으로 내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서랍을 꺼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면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퀼트와 서랍'을 통해 삶의 조각조각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삶들이 나라는 삶을 구성하고 있고, 이것들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것도.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늘 말하지만 오독도 독해니까...


한밤의 퀼트(43쪽), 서랍들(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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