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구절은 없다. 그런데 시는 어렵다. 우리 현실의 과거와 현재가 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하고, 때로는 마음을 찡하게 하기도 하는데...
'니들의 시간'에서 '니들'은 '너희들'의 줄임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너희'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의미한다.
어떨 때는 나와 함께 하는 존재였다가 어떨 때는 나와 다른 존재로,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으로,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니들과 달라.'
하지만 '니들'이 없으면 '나'가 있을까? 아니다. '나'는 바로 '남'을 바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말장난 같지만, '남'이라는 말의 받침 'ㅁ'은 발판, 토대로 볼 수 있다.
'나'를 올려놓는 토대. 그렇다면 그 토대가 크면 클수록 '나'도 커진다. 그러니 '니들'이 많을수록, '니들'이 클수록 '나'가 더 커질 수 있다. 이것을 망각하고, '니들'을 자꾸 줄이면 '나'도 줄어든다. '나'도 약해진다.
그 점을 보여주는 시가 바로 '니들의 시간'이다. 1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중 1연. 창비. 2023년. 35쪽)
그래야 하는 인간이 지금은 어떤가? 이 '니들'을 얼마나 많이 파괴했는가? 마치 지구에 '나'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인간만이 지구의 유일한 생명이라는 듯이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일본에서는 핵폭발로 인한 오염수들을 바다에 방류하고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있다.
'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라는 시를 보자. 그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2023년 8월 24일, / 인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 엘니뇨, 미래의 소년들이여, / 너희 선조들은 핵물질을 열배 희석한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 삼십만년 동안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김해자, '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 중 1연. 창비. 2023년. 100쪽)
이전에 핵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1980년대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이미 인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친환경이라는 이름을 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1년에 또다시 후쿠시마에서 핵폭발을 겪고도...
건설비만이 문제가 아니라, 발전을 할 때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핵발전으로 인해 나오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는데, 여전히 핵발전, 핵발전하고 있으니... 여기서 도대체 우리는 '나'를 제외한 '니들'을 정말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다르게 체르노빌에서는 이렇게 많은 돈과 물질을 들여 그곳을 폐쇄하고 있다. 시인의 눈을 피해갈 수가 없다.
'나는 비쌉니다 / 초기 자금만 해도 28개국에서 칠억 육천팔백만 달러 기부 받았죠 / 감마선을 견뎌내는 고품질의 강철만 팔천 톤 / 백오십 미터 이중막 / 클 뿐만 아니라 무겁기까지 한 / 내 이름은 아르카입니다' (김해자, '내 이름은 아르카' 중 3연. 창비. 2023년. 96-97쪽)
여기에 묻혀 있는 수많은 '니들'. 더 많은 '니들'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들인 그 시간과 돈과 물질들. 이것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돈과 시간과 물질을 절약한다고 더 많은 '니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오염수 방류 아닌가.
'니들'을 죽이는 시간. 아니 '니들'이 살아갈 시간을 빼앗아가는 행위. 그것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 시인은 '니들의 시간'에서 절규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수많은 '니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 앞으로 올 니들을 / 니들의 시간을' (김해자, '니들의 시간' 중 마지막 연. 창비. 2023년. 39쪽)
이렇게 먹어치운 '니들의 시간' 덕에 '우리는 각자도생의 사명을 띠고'(32-33쪽)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로 안 좋은 분야에서는 1위, 좋은 분야에서는 아래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이렇게 씁쓸한 마음을 들게 하는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배시시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시들도 많다. 시인은 '니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어치운 '니들의 시간'을 안타까워하기도 하지만, '니들의 시간'이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한번 '니들의 시간'을 생각해 보자. 이 '니들'과 '나'를 과연 분리할 수 있는지. '니들'이 바로 '나'임을, '나'가 바로 '니들'임을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