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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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으로 방대한 저작활동을 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하긴 그가 80이 넘은 노학자임을 감안하고, 그동안 사회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왔다면 이 정도 책들은 내 수 있겠지.

 

왜 우리나라에서 지금 바우만이 인기를 얻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학자의 책이 이렇듯 거의 번역이 되는 경우는 정말로 많이 알려진 학자들 외에는 별로 없을텐데... 폴란드계 유대인인 영국의 교수 책이 이렇게나 많이 번역이 되다니...

 

그것은 아마도 바우만의 책들이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을 적확하게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지금의 현실을 말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에도 놀라게 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 그의 분석을 가져다 놓아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책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다른 말로 하면 세계화시대, 지구화시대라고 하니까 한 나라의 특수성을 지니기가 상당히 힘든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본은 지구적으로 활동하고 문제는 지역적으로 해결하게 한다고 그가 말하듯이 아직도 각 나라들은 자신들만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분석이 우리나라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분석은 지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현대 자본의 모습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자본이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게 행동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의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이 우리나라에도 타당하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제목이 "새로운 빈곤"이다. 빈곤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해결이 된 적이 없는 문제이겠지만,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빈곤은 늘 존재했는데... 그가 새로운 빈곤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이 빈곤에 접근하는 우리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그는 자본주의 역사를, 아니 근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살 때, 없으면 없는 대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던 시대에서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해진 근대... 그 때 등장한 노동윤리부터 시작을 한다.

 

더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 자신의 빈곤에 만족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 이들을 노동력으로 전환시킬 필요에서 노동의 윤리가 나온다. 이는 빈곤한 사람들을 더 살기 힘들게 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노동의 현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한다.

 

이렇듯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에는 잠재적인 노동력도 꾸준히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복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실업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다음에 노동력을 활용하기 편함을 깨달은 자본은 복지에 투자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복지는 이루어지게 되고, 절대적인 빈곤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은 곧 노동력을 잉여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산 사회에서 소비 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소비 사회에서는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노동력은 더이상 많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노동력은 계속 줄어들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실업자들에게 투자하는 일은 낭비로 치부된다. 하여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일은 자본의 발목을 잡은 일이 된다.

 

실업자는 재활용이 가능한, 순환가능한 존재였다면, 이제 소비 사회에서는 쓸모 없어진 노동력은 잉여, 즉 쓰레기가 된다. 폐기물이 된다. 이런 폐기물은 여기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없어지거나 적어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의 모습이다. 이제 빈곤은 재활용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한 번 내쳐지면 보이지 않거나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복지란 이름은 사라지게 된다. 하여 이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빈곤"이다.

 

새로운 빈곤 계층을 최하위계급이라고 하여 이 계급은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는 존재로 취급이 된다. 이들은 철저히 격리되어야 하며 우리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집단이 된다. 그리고 이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복지는 이미 사라지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이런 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타당하다. 바우만의 다른 책에서도 이런 개념들은 여러 번 나왔기에 친숙한 개념으로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책의 마지막 장에서 바우만은 대안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이것을 비현실적이라고 무시하겠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는(우리나라는 비판 정도가 아니라 무시라고 해야 한다)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다.

 

그는 이것을 '소득 수급권과 소득을 벌어들이는 능력의 분리'(219쪽)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사회에 퍼지는 순간, 또는 우리들이 지니고 실현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윤리를 회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재미삼아 보여주는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너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돼'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기본 소득을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에게 '소득 수급권'을 보장해 준다면, 그는 불안에서 어느 정도 해방이 될 수 있고, 불안에서 해방이 된다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출발점에는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 앞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기준이 될만한 책이다.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는 "교차로"에 서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한다. 자본의 힘에 떠밀려서 가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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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 - 제2판
지그문트 바우만.팀 메이 지음, 박창호 옮김 / 서울경제경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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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있고, 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지혜로운 존재라고 하니, 인간에게 있어 생각이란 바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바로 생각을 하는 존재임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을 빌리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럼에도 생각은 제각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생각인지 고민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각은 어떤 것일까? 우리네 삶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한 것이 철학적 사고라고 한다면, 인간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이 철학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여기에 인간의 건강을 생각하는 학문이 의학이고, 과학적인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 과학이라면... 사회학은 무엇인가? 도대체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냥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이다 하면 될 것을, 철학적 사고, 과학적 사고, 인문학적 사고도 모자라 이제는 사회학적 사고를 하라고 한다.

 

사회학적 사고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일테고,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근대의 학문이라면... 왜 철학이나 과학에서 사회학이 분리되어 나왔을까 하는 의문도 갖게 된다.

 

어쩌면 과학의 발달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에 대해서 파악할 필요가 생겼을테고, 이러한 필요에 부응해서 사회학이 발달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여간 왜 사회학이 탄생이 되었고, 사회학적 사고란 무엇인지 세세하게 추구할 필요는 없다. 바우만과 팀 메이가 이 책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러한 사회학의 역사, 또는 개념 추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기 때문에, 이 사회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학적인 사고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란 그냥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가장 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나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하라는 얘기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이 책은 영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사회학 입문서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왜냐하면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책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김찬호가 쓴 "사회를 보는 논리"(문학과지성사.  2004년 초판 11쇄). 내가 갖고 있는 책이 이미 10년 전 책이니, 아마도 이 책은 더 많이 찍어내었을테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게 하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만과 팀 메이의 이 책을 읽을 때 이들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 읽어야 된다는 얘기가 성립이 된다.

 

이들 역시 사회학적인 생각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바람직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더불어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세까지 지니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우주로... 우리의 존재가 무한히 뻗어나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내가 지내고 있는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이다.

 

이 시공간에서 나라는 존재가 남이라는 다른 존재와 함께 어울려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의 성공한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들에는 생각할 거리들과 더 읽으면 좋을 책들이 소개되어 있어서 사회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고 있는 책이다.

 

사회학에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자신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사회가 현대사회다. 전혀 나와는 상관없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이는 현대 사회인데...

 

그래도 나와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으니...이것이 사회학적으로 생각할 필요이다. 더 위험한 사회일 수록 그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김찬호의 책과 함께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덧글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할 때 십진분류법을 사용한다. 그 중에 사회학과 관련된 부분은 300번이다. 이 300번에 어떤 것들이 속해 있는가 보면 이렇다. 이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회과학인데, 더 범위를 좁혀서 사회학이라고 하면 330번이다. 책의 뒷표지 바코드 위에 있는 숫자 중 마지막 세 숫자가 책이 십진분류법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300 사회과학

 

310 통계학   320 경제학    330 사회학, 사회문제     340 정치학                350 행정학  

360 법학      370 교육학    380 풍속,민속학            390 국방, 군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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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로트레크 - 세기말 파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초상 시공아트 61
버나드 덴버 지음, 이윤희 옮김 / 시공아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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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시간에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다. 불행하게도. 미술에 관해서는 학창시절에 배운 것 말고는 그 이상의 지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정말로 아주 가끔, 아마도 삶의 전반에 걸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미술관에 들르기는 하지만, 그 미술품들은 나와는 너무도 멀리 있다.

 

그냥 지나쳐가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집에 걸어두려고 구입하려고 하면 그 가격은 내 경제생활과는 터무니 없이 멀어 비싸기만 하다.

 

이번에 수덕사에 갔을 때도 수덕사 선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서양화가의 작품... 채색이 참 화려하고 벗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따스함과 포근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그림들이었는데... 그림 밑에 붙어 있는 가격표는 입을 다물게 하고 말았다.

 

집에 걸어두고 보아도 좋을 그림들이 집에 걸어둘 수 없는 가격을 하고 있었으니... 그럼에도 미술가의 그 지난한 여정의 결과물을 그 정도 가격에 판매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하니...이래저래...

 

로트레크라고도 하고 툴루즈-로트레크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긴 이름을 외우기 힘들어 하니 그냥 로트레크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후반에 주로 활약을 하고, 20세기가 되는 순간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 신체의 불구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보한 사람. 그렇다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 다른 선배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배울 것을 배운 사람.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파와도 관련이 있고, 이 책에 고흐라는 이름도 제법 언급이 되고, 또 드가라는 이름도 언급이 되고 있으니,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지 그는 당대에 미술계에서는 꽤 알려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그림은 대중들이 생활과 멀지 않다. 요즘 말로 하면 주로 연예인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카바레에서 춤추는 사람이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또 일상생활을 하는 세탁부 등을 그렸고, 자신의 친구들도 역시 그림에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포스터를 예술작품으로 한 단계 격상시킨 공로가 있다고 한다. 그냥 막 그리고 한 번 쓰고 버리는 포스터가 아니라 예술품으로 거리를 장식하고, 그 다음에는 판매도 되어 소장되는 그런 그림으로 포스터를 인식시켰다고 한다.

 

단순한 색채와 선명한 인물 이미지, 그리고 일본판화풍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렇듯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화가라고 한다. 

 

단지 그는 불구였으며 나중에는 알콜중독까지 걸려 오랜 기간 제정신을 잃고 살게 되지만, 그래도 귀족 집안 출신답게 경제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화가 구본웅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 대한 평은 긍정과 부정으로 갈린다고 하는데...요즘 그의 작품은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고 하니, 그리고 이 책의 끝부분에 피카소에 미친 그의 영향도 이야기해주고 있으니, 그는 나름대로 화단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미술은 나와는 거리가 먼데... 이렇게 로트레크처럼 우리와 가까이 하려는 화가도 있을텐데... 한때 돌아가신 김점선 화가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민중화가들이야 지금도 우리네 삶 속에서 함께 지내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툴루즈-로트레크...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도판이 많이 수록된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도 전기식으로 태어남부터 자람, 그리고 죽음까지 시간의 순서대로 책을 전개하고 있고, 그 중간중간 그의 작품과 해당되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이 함께 실려 있어서 로트레크란 사람을 알아가는 재미도 주고, 또 그림을 감상하는 기회도 제공해주고 있는 책이다. 

 

미술관에 가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렇게 하기가 힘든 지금... 이 책을 통하여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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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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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나왔다. 바우만의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바우만의 다른 책들보다도 먼저 읽어야 할 책이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제일 먼저 읽고, 다음 정도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바우만의 여러 저작들을 발표된 년도와 상관없이 주욱 읽어가고 있는데, 읽으면서 바우만이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은 짐작이 된다. 그런 선상에서 이 책은 이전에 읽은 바우만의 책보다는 훨씬 쉽게 이해가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쓰레기:사용할 수 없어서 버려진 물건. 또는 사람. 사람다운 행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 등등

 

참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인데,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버려지는 사람들" 또는 "버려지는 삶"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하다.

 

현대가 발전하면서 세계 경제는 발전하는데, 근대 초기에는 영토가 넓어서,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는 미개척지가 많아서 잉여 인력을 그곳으로 보내면 되었는데, 현대에는 더이상 개척할 땅이 없기에 자신들의 땅에서 구획을 지어서 버려지는 사람들을 몰아넣어야 한다는 얘기가 이 책의 핵심이고...

 

시대가 소비시대로 바뀌면서 계속해서 새것을 추구하게 만들고, 빠르게 만들고, 쓸모있음이 지속되지 않게 만들어 인간의 삶이든, 물건이든 쓰레기를 양산하게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 역시 사회 전반의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해결책만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불안과 공포가 조장이 되고, 버려지는 사람들은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이 찍히며 사회에서 필요하지 사람들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도 필요하지 않은.

 

예전에는 그래도 쓰레기를 치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들 중에서는 존재의 상승을 이룬 사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생활하게끔 구획되고 분리된다고 하고... 이들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생활을 보호하게 하는, '우리'와 '그들'로 분리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문제의 분석이 정확하다. 정확한 분석이 되고 있는데, 그래서 답답하다. 어째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에도 적용을 시키면 우리 사회에서도 이렇듯 쓰레기가 된 삶들이 꽤 있지 않은가. 대도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들... 이들을 사회경관을 해칠 뿐만이 아니라 사회불안의 요인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또한 언제 해직이 될지 모르는 노동자들, 비정규직들, 그나마 그런 일자리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 여기에 외국에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 이들은 사는 공간도 정해져 있다시피 해서 정말로 사람들을 구획했다는 말이 들어맞는 경우가 된다.

 

또 자신의 삶터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기는 사람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안전하다고 해서 지속적으로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까지 농사짓던 땅이 수몰이 되거나, 개발로 수용이 되거나, 거대한 송전탑이 지나가거나, 갯벌이었던 곳이 육지가 되어버리거나, 강 옆의 한적한 곳이 강이 되어버리거나...

 

이런 불안들이 우리를 더 깊은 불안으로 내몰고, 깊은 불안들이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기 보다는 내 살 길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내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도대체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우만도 이 책의 말미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이걸 우리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당장 할 수 있는 일. 나만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일.

 

신뢰가 중요하다고 바우만이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도 서로간의 신뢰를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좀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우만의 현실 분석을 우리의 미래에 적용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역시 추상적인 말일 뿐이다.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하는데...

 

조급해 한다고 해서 나올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 사회를 비롯한 현대에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양산하고 있는 기제들이 있는데, 그 기제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분석을 했다면 대책은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맑스의 말대로, 인간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제시한다고... 자, 문제점이 나왔다. 그게 왜 문제인지도 나왔다. 그것을 알았다면, 우리 모두가 안다면 이제 시작이다. 해결책을 찾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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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문성원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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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도 하고 너무도 당연하기에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유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도 하고, 법적으로 사유하기도 하는데... 바우만의 이 책은 사회학적으로 사유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 사회적 조건과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고 한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도 있지만,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고... 하여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중심으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 바우만은 벤담의 '판옵티콘'에서부터 자유의 논의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지금의 신자유주의인 소비자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를 마치는데...

 

판옵티콘은 나는 너를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의 차이로 나타나고... 당연히 자유는 권력을 쥔 자의 손에 더 많이 주어지게 된다.

 

감시 당하는 사람, 이에게는 자유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다. 하여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권력이 개입한다. 고대나 중세 시대의 절대적인 권력에서부터는 자유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때 노예들은 자유보다는 생존이 더 절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근대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의 위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권력의 문제를 자유의 문제에서 배제하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소비자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을 쥔 자는 자유를 많이 향유한다. 지금 이 시대의 권력은 바로 경제 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경제 권력을 많이 잃었기에 그들의 자유를 그다지 향유할 수가 없다.

 

자유롭게 생활하려고 하여도 생계가 확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 이 시대의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경제 권력의 평등이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너는 자유이나, 살 권리도, 죽을 권리도 네가 선택할 수 있으나,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정해져 있다가 된다.

 

이 점을 인식하면 자유는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개념이 아니다. 자유는 그 사회의 권력 배치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이 된다.

 

마치 조선시대 노비해방이 노비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이었음과 같이, 중세의 끝에 농노 해방이 이루어졌으나 그들에게는 오로지 죽을 자유밖에는 없었다는 것과 같이... 경제 권력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이 제대로 분배되거나 감시되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자유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만, 즉 굶을, 나앉을,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 자유밖에 지니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예전에 극복되었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나게 한다. 노예가 인간 선언을 하면서 자기의식을 지니고 주인과의 투쟁을 통해서 대자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라면, 이 자유를 획득한 노예가 주인이 되었음에도 세상이 변해서, 생산과정의 주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사실 이렇지도 않지만) 소비과정에서는 다시 노예로 전락한 상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정-반-합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노예는 합의 위치에 다다랐으나, 이 합이 다시 정이 되어 반과의 투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노예로서 그냥 그렇게 정말로 내던져진, 쓰레기가 된(바우만의 용어로 한다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권리. 그러나 자유는 쉽게 말하면 선택의 권리이기도 하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말로만 하면 참 보편타당한, 불편부당한 그러한 말인데, 선택에는 권력이 개입한다.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선택을 할 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과 선책할 수 있는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자유를 향유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여 바우만의 이 사회학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 권력의 문제로 치환한다. 이렇게 치환하여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유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말로만 넌 자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조건이 갖춰진 사회를 꿈꾸는 것이 바로 사회학 아니겠는가.

 

그래, 자유란 말을 쉽게 하지 말자.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 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유라는 말에는 죽음의 길이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 지금 이 21세기에.

 

우리의 자유라는 말에는 삶이라는 말이 함께 따라다니게 해야겠지.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해서 사회학적으로 고찰한 이유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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