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문성원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자유.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도 하고 너무도 당연하기에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유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도 하고, 법적으로 사유하기도 하는데... 바우만의 이 책은 사회학적으로 사유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 사회적 조건과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고 한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도 있지만,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고... 하여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중심으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바우만의 책을 읽으면, 바우만은 벤담의 '판옵티콘'에서부터 자유의 논의를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지금의 신자유주의인 소비자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를 마치는데...

 

판옵티콘은 나는 너를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의 차이로 나타나고... 당연히 자유는 권력을 쥔 자의 손에 더 많이 주어지게 된다.

 

감시 당하는 사람, 이에게는 자유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다. 하여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권력이 개입한다. 고대나 중세 시대의 절대적인 권력에서부터는 자유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때 노예들은 자유보다는 생존이 더 절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근대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의 위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권력의 문제를 자유의 문제에서 배제하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소비자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을 쥔 자는 자유를 많이 향유한다. 지금 이 시대의 권력은 바로 경제 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경제 권력을 많이 잃었기에 그들의 자유를 그다지 향유할 수가 없다.

 

자유롭게 생활하려고 하여도 생계가 확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 이 시대의 사회학적인 자유에는 바로 경제 권력의 평등이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너는 자유이나, 살 권리도, 죽을 권리도 네가 선택할 수 있으나,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정해져 있다가 된다.

 

이 점을 인식하면 자유는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개념이 아니다. 자유는 그 사회의 권력 배치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이 된다.

 

마치 조선시대 노비해방이 노비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이었음과 같이, 중세의 끝에 농노 해방이 이루어졌으나 그들에게는 오로지 죽을 자유밖에는 없었다는 것과 같이... 경제 권력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는 경제 권력이 제대로 분배되거나 감시되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자유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만, 즉 굶을, 나앉을,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 자유밖에 지니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예전에 극복되었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나게 한다. 노예가 인간 선언을 하면서 자기의식을 지니고 주인과의 투쟁을 통해서 대자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라면, 이 자유를 획득한 노예가 주인이 되었음에도 세상이 변해서, 생산과정의 주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사실 이렇지도 않지만) 소비과정에서는 다시 노예로 전락한 상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정-반-합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노예는 합의 위치에 다다랐으나, 이 합이 다시 정이 되어 반과의 투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노예로서 그냥 그렇게 정말로 내던져진, 쓰레기가 된(바우만의 용어로 한다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권리. 그러나 자유는 쉽게 말하면 선택의 권리이기도 하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말로만 하면 참 보편타당한, 불편부당한 그러한 말인데, 선택에는 권력이 개입한다.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선택을 할 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과 선책할 수 있는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자유를 향유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여 바우만의 이 사회학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 권력의 문제로 치환한다. 이렇게 치환하여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유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말로만 넌 자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조건이 갖춰진 사회를 꿈꾸는 것이 바로 사회학 아니겠는가.

 

그래, 자유란 말을 쉽게 하지 말자. 자유라는 말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 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유라는 말에는 죽음의 길이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 지금 이 21세기에.

 

우리의 자유라는 말에는 삶이라는 말이 함께 따라다니게 해야겠지.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해서 사회학적으로 고찰한 이유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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