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언어 -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 카이로스총서 27
울리히 린스 지음, 최만원 옮김 / 갈무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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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우리나라 차 이름 중에 '에스페로'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희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국제어를 표방하는 이 인공언어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하다.

 

지금도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있는 걸로 알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에스페란토어에 대한 강습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의 존재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에게만 알음알음 전해지고 있다고나 할까.

 

이 언어를 창시한 사람이 자멘호프라는 사람. 그는 언어를 통해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는데... 특정 언어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언어를 공통어로 사용한다면 갈등은 그만큼 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에서 만든 언어.

 

예외가 없는 언어로 유명한데... 이 언어를 배우려고 시도했다고 시도에서만 그치고 만 나는 아직도 이 언어는 어렵다. 우리나라 언어와는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 언어는 그들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친숙한 언어이고 배우기도 쉬운 언어일텐데...

 

그럼에도 왜 이 언어가 공통어로 자리를 잡지 못했을까?

 

전세계의 민족들이 각 민족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국제 사회에서는 서로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 즉 인공어인 공통어를 쓴다면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데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될텐데... 서로의 언어를 존중하며 어느 민족에게도 속하지 않는 언어로 국제 사호에서 이야기한다면 서로가 더 도움이 될텐데...

 

각 나라의 학교에서 공통어로써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친다면 우리가 너무도 많은 외국어를 배울 필요도 없고, 또 각 나라 고유 언어의 고유한 의미를 몰라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으련만...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그 이유를 추적해 가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5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 주석까지 합치면 600쪽이 넘는 엄청난 책이다.

 

평화를 표방한 희망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가 어떻게 탄압을 받고 공통어로써의 자리를 잡지 못했는가를 추적하고 있는데... 주로 동유럽과 소련의 경우를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서유럽에서는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탄압하지 않았을테고, 일본과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동아시아 자료들은 그렇게 많이 있지 않을 것이며(아마도 이 책이 저자인 울리히 린스가 찾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는데...

 

적어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왜 공통어로써의 에스페란토어를 탄압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고 있으리라 추측이 된다.

 

어느 한 민족의 언어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지 않고,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세계일텐데... 그렇지 않았던 현실은 그들이 추구한 사회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에 불과했다는 저자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결국 국제적인 공통어는 공산주의 사회로 대표되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체제에 도전하는 그런 위험한 언어로 낙인이 찍혔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즉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이런 나라들에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에서는 특정한 언어를 강요할 필요가 없었을테고, 지금은 자본의 힘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나라인 미국의 언어, 영어가 세계 공통어의 역할을 자연스레 하고 있으니 굳이 에스페란토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의 수가 어마어마한데, 이들이 각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각 민족의 언어들을 다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겠는가.

 

지금 유럽연합만 보아도, 그들은 하나의 협정을 맺어도 그것을 유럽 연합 각국의 언어로 다 표기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에스페란토라는 공통어만 서로 인정한다면 협정문에는 각 민족의 언어 하나와 공통어인 에스페란토어 하나, 이렇게 두 개의 언어만으로 기록이 될텐데... 그렇다면 더 경제적이고 더 편리하고 더 의미상 혼란이 없을텐데...

 

이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어쩌면 앞으로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가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이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런 언어는 지배 권력의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힘에 의해서 자연스레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민족어들이 많다고 하는데...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처음에 국제연맹에서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 만들어 사용하게 하려고 시도했듯이 지금 유엔의 공통어로 '에스페란토'를 지정한다면?

 

정말로 전세계에서 자국의 언어와 그리고 세계 공통어로써 '에스페란토'를 교육한다면, 그리고 외국인끼리는 '에스페란토'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그때는 에스페란토는 희망의 언어, 평화의 언어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에스페란토어가 전래가 되었고, 김억같은 경우는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지금도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꽤 있고...

 

이런 상상을 해본다. 정말로 각 민족의 언어 하나, 그리고 세계 공통어 하나. 그렇게 되면 적어도 언어 패권주의는 사라질텐데...

 

그런 희망을 이 책에서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에스페란토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 언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얘기 아닐까...

 

동유럽, 소련의 역사에서 그렇게 탄압을 받았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에스페란토의 역사를 보면서... 아직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세계 시민단체들이 공통어로 이런 언어를 먼저 사용하면 어떨까?

 

한 번에 제도로 바뀌겠지 하지 말고, 국제적인 시민단체들부터 특정 언어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 이렇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아 누구에게도 속할 수 있는 이런 언어로 소통을 한다면...

 

자멘호프의 꿈이 실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길지만 에스페란토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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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시선 168
정양 지음 / 창비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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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이라는 시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안도현이 엮은 시집에서 '물끓이기'란 시로 그를 알게 되었는데, 일상 생활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만든 시인의 표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인을 발견하게 되면 그의 시집을 사 보게 된다. 몇 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아직까지 몰랐다니... 제법 시집을 읽었다는 나도 시에 관해서는 아직도 문외한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어떤 시집을 고를까 하다가 그래도 최근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른 시집.

 

뒤를 먼저 살피는데, 이 시집이 언제 발간이 되었고 몇 쇄나 인쇄가 되었는지를 살핀다. 여러 쇄가 인쇄되었다는 얘기는 제법 읽혔다는 얘기다. 단 한 번의 출판으로 절판이 되거나 품절이 된 시집도 있는데, 이 시집은 1997년에 처음 발간이 되었는데, 내 손에 들어온 시집은 2013년 초판 5쇄다. 최소한 다섯 번은 찍어냈다는 얘기이니, 이 시집은 시집 중에서는 그래도 많이 읽힌 축에 드는 시집이리라.

 

시를 읽기 전에 먼저 시인의 말을 살핀다. 그의 말 '시 쓰는 일, 그것이 빛깔이 되든 수단이 되든 목적이 되든, 허무나 그리움 같은 폭폭한 것에 인박히어 그 면역과 건망증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세상을 살고 있다. 진실로 맘에 드는 시집 한권 만들 때까지 이 건망증은 계속될 것만 같다.(129쪽)'는 그의 말이 맘에 쏙 들어온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이렇듯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인박히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잊는다. 잊고 살다가 어느 순간 내 맘 속에 떠오를 때 그 때 그것은 다시 나에게로 다가와 의미있는 무엇이 된다.

 

그의 시들은 그의 삶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다. 그것들이 자연스레 시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의 시를 갯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보면 별 것 아닌, 그저 그런 풍경으로서의 갯벌.

 

그러나 갯벌은 자세히 보면 엄청난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정지되어 있는 듯한, 이미 쇠락한 듯한 그 갯벌에서 온갖 생명들이 요동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생명력 또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갯벌의 포용성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시도 마찬가지다. 그냥 개인의 일상생활, 특히 시골생활이 많은데... 그리고 시의 대부분이 시인의 경험과 동떨어질 수 없는 내용들이라고 짐작이 되는데... 한 사람의 일상을 시로 풀어낸 듯한 시집이지만, 가만히 읽어보면 온갖 것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 그래서 갯벌이라는 비유를 비평가가 썼는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어디선가 본 시인데... 왜 시인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시가 '토막말'이란 시. 분명 어디에서 보고, 이렇게 시를 쓸 수도 있구나, 일상어가, 비속어가 이렇게 시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 숨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시인데.. 왜 시인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하는 시, 보자.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시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이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2013년 초판 5쇄. 38쪽

 

아름답다. 감정을 언어로 순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그 말이. 그 말을 보면서 한 편의 시를 쓴 시가. 우리네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시에 녹아 있지 않은가.

 

이런 시... 읽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시를 가까이 하게 된다. 시란 언어의 유희를 떠나 우리네 삶에 밀착하게 달라붙어 있을 때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시는 우리에게 시를 친숙하게 여기는데 도움을 준다.

 

삶을 수수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들. 그런 시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정양의 시집. 이번에는 새벽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를 본다.

 

그 새벽.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냥 해가 뜨는 장면이 아니다. 그 해 뜨는 장면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깊은 어둠을 경험해야 하는가.

 

어둠을 통해서 새벽은 더욱 아름답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이 온다는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알려주는 시다.

 

새벽은

 

한사코 끗발이 죽는 노름판에

끗발이 끝끝내 꽉 막혀야

새벽이 온다

 

화톳불 식어가는 초상집에도

술독이 바닥난 주막집에도

 

꽁초까지 떨어져야 새벽이 온다

가물가물거리는

저 촛불이 꺼져버려야 비로소

새벽은 온다

 

정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2013년 초판 5쇄. 73쪽.

 

우리의 새벽은 이렇게 오겠지. 그게 바로 새벽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날짜의 변화, 시간의 변화, 자연의 변화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아무리 어둠이 짙어도 그 어둠의 끝에는 반드시 새벽이 온다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아야 한다는... 그런, 갯벌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썩여야 뭇생명들을 머금을 수 있음을... 이런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활동을 해왔던 시인인데... 이제서야 그의 시집을 읽고 그렇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듯 생활이 바로 시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시가 한둘이 아니겠지마는, 이번에 읽은 정양의 시집은 한 마디로 좋다였다. 그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 사회를 볼 수도 있었고, 민초들의 삶을 통하여 인간 삶을 생각할 수도 있었고, 그의 내력을 드러낸 시들을 통하여 우리 현대사를 생각할 수도 있었기에...

 

내 마음에 들었던 시들은 더 있는데... 길어서 인용은 그만하고, 제목만 말하면 '사진찍기2', '평양소주','낯도 안 붉히고'가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이 시집은 정말로 갯벌이다. 많은 생명들이 이 시집에서 자신들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 이 시집은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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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택광 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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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일기를 출간해 놓고 일기가 아니라고 제목을 붙였다. 일기가 내면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낸 글이라면, 일기임에도 일기가 아니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테다.

 

아마도 일기는 자신만이 보도록 쓰여진 글이라면 바우만의 이 일기는 자기만이 보는 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글이라는 뜻이리라.

 

처음 시작에 왜 일기를 쓰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글쓰기는 그에게는 삶 자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삶 자체. 따라서 일기는 그가 세상을 살아간 모습을 기록한 것이고, 이것은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근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기록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그의 일기를 읽으며 사회를 읽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참 많은 문제들이 이 책에 나와 있지만, 이 책에서 그가 다룬 내용들이 다른 책으로 쓰여져 번역되어 나온 것들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바우만의 다른 책 내용들과 함께 읽게 된다. 말 그대로 그의 저작들을 함께 엮으며 읽을 수 있고,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책들을 썼는지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바우만의 이 일기가 아니라고 하는 일기를 읽고 난 뒤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모든 독후 활동이 읽은 책에 의탁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내는 일이라면 바우만의 책을 읽고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바우만에 의탁해서 내 얘기를 하는 것에 불과하리라.

 

하여 바우만 읽기는 곧 바우만을 통해서 나를 읽은 행위이며, 나를 읽는 행위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읽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 속의 나...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바우만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가 나온다. "탈구"라는 개념으로...

 

탈구... 쉽게 말하면 장소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이 공간이든, 사회적 위치든... 바우만은 폴란드계 유대인으로서 그의 조국에서 떨어져 나와 영국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며, 주류 사회학에서는 좀 떨어진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니, 그의 인생은 '탈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탈구된 삶이 바로 근대사회를 바우만 식으로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액체 근대,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에서 그는 소비자사회로 넘어간 우리 시대를 읽어내고 있으며, 이러한 소비자시대의 대표격으로 '페이스북'을 언급하고 있으며, 여러 책에도 나온 것이지만, 프랑스 학자가 근대의 기점을 찾는 연구를 했는데... 근대의 기점을 개인적인 사생활을 공적인 자리로 끌고 나온 텔레비전의 한 방송으로 잡는다는... 그래서 우리는 사적인 것의 공적인 행위로 만들기, 또는 공적인 삶을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들이 이 책의 곳곳에 나와 있다.

 

이것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 사회도 역시 페이스북, 요즘은 '카카오톡'이든지, 아니면 '카카오스토리'라는 것이 더 유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외로움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은지.

 

또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든지, 사회에서 배제된 집단들을 배제시킴으로써 우리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방송을 통해서, 또는 다른 활동을 통해서 우리들 역시 유동하는 근대에서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도 바우만처럼 '일기가 아닌 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써야만 하지 않을까. 그런 일기를 쓴다면 자신이 처한 위치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적어도 고민은 할테니까. 이런 고민들이 쌓이면 자연스레 실천으로도 나아갈 수 있을테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바우만처럼 '일기가 아닌 일기'를 쓰자. 사색하는 시간,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이런 일기를 쓰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는 고독한 시간, 사색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사회에서 연결망이 아닌 공동체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가장 내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기록하는 일기가 자신을 공동체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책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일기이면서도 일기가 아니다.

 

덧글

 

오타임에 분명한 부분

89쪽에 '보이치에 사디가 2011년에 ~'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일기는 2010년 10얼 7일자 일기이기 때문에 오타임이 분명하다. 몇 년인지 찾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 사람 이름. 그래도 많이 알려진 이름으로 해야 하지 않나. 303쪽에 한스 조나스라고 나오는데, 이 사람은 한스 요나스라고 주로 읽는다.  한스 요나스로 통일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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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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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서 44개의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게 닿았다.

 

44편 모두가 마음으로 파고들면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 '고독'을 찾게 하였고, 그래서 바우만이 '수용하는 그 행위는 반항을 만들어낸다. 만약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때 가장 그럴듯한 결과는 바로 반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88쪽)'라고 했듯이, '고독'을 깨닫는 순간 '고독'하게 만든 사회에 대하여 반항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우만의 44편의 편지에 이어서 한 편의 편지를 띄운다. 

 

우리 역시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으며, 고독을 잃어버리고 있고, 그래서 반항마저도 빼앗겨버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공위시대'라는 말이 지금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낡은 것은 사라져 가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시기로 말해질 수 있는 그런 '공위시대'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낡은 가치들은 무시되고 있으나, 새로운 가치는 등장하지 않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 그것이 바로 '반항하는 인간'이 되는 일.

 

어쩌면 바우만의 이런 책은 젊은이들이 읽어야 할지 모른다. 이 책은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고, 현재를 분석하고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현재를 이야기하는 목적이 바로 미래를 만들어가는데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이념이나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소위 기성세대들보다는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읽으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만들어가는데 도움을 받으면 좋을 책이다.

 

그래서 45번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기존의 가치에 안주하지 마라. 눈은 앞을 보게 되어 있다. 앞을 보고 걸음을 걸어라.

 

대학의 죽음이 논의된 지 오래. 대학에서 학문 추구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말이 들린다. 대학은 오로지 취업의 한 관문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취업과 관련이 없는 전공은 홀대당하고 있다고... 그리고 학생들도 전공과 관계없이 너도나도 영어 공부나 취직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이것은 바로 현재의 공포다. 취업 불안이 취업에 대한 공포로 나타나고 있다. 비정규직이 양산이 되고, 그나마 이러한 비정규직 일자리도 찾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다. 그래서 이런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

 

소위 스펙을 쌓으려고 한다. 이것이 취업에 도움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너나없이 취업 준비 학원을 다닌다든지, 영어가 필수라고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든지, 조금이라도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선택하려고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고민할 시간도 없다. 오로지 달릴 뿐이다. 그런데 이 달림이 이상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제자리 걸음을 하던지, 아니면 거꾸로 달린다는 생각이 든다.

 

취업 공포. 이것은 기존의 가치다. 그리고 현재에 매몰되어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취업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다. 거창하게 자아실현이니 뭐니 하지만, 본질은 내가 살기 위해서 취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열하게 자리를 정해져 있으니,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즉 의자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명적인 '의자놀이'를 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게 문제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란 책에서 했던 말대로 '토플을 집어치우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개인적인 해결책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눈을 앞으로 돌리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자. 그러면 이런 '의자놀이'가 우스워진다.

 

성경에서도 생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우리 말에서도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만큼 생계는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일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유동하는 근대, 액체 근대의 문제이다.

 

젊은이들도 이런 액체 근대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가치를 보여주는 주장들이 있다.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생계를 보장해주는 제도를 만들자는 운동이 있다. 그러면 생계 걱정 때문에 창조적인 일에 도전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생계 걱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위 시대. 새로운 가치를 주창하고 있다. 그런데 외면한다. 아직 이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기본소득'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 바로 '고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범은 스마트폰, 참 스마트하게 쓰여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고독을 뺏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할 시간을, 함께 하는 시간을 뺏어가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음에도 파편화된 경험밖에는 공유하지 못한다.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사용해야 한다. 수용해야 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를 수용한 다음,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에 보면 우리나라에는 네티즌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댓글, 이런 스마트폰과 관련된 일 아니던가.

 

스마트폰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개별화, 파편화시켰지만, 반대로 사람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로 불러내는 역할도 한다.

 

즉, 스마트폰을 수용하고, 그 한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때 우리는 '반항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를 이용해서 '기본소득'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때 우리는 다른 세계로 한 발 도약할 수 있다. 이게 4번째 편지이다. 바우만의 논리를 내적으로 더 밀고나간 그런 편지.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지금은 이런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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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과 홀로코스트 - 유럽 최고의 아말피 상 수상작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홀로코스트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책이다. 홀로코스트 하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량학살, 절멸 등으로 쓰이는 이 용어는 우리 현대사이 암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는 과연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 순간으로 홀로코스트가 머물렀다면 읽으면서 그렇게 맘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과거의 것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그것은 현재를 지탱하게 하는 하나의 축으로서 기능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세계를 보라. 과연 홀로코스트는 끝났는가?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 지뢰가 단지 발목만을 날리지 않고 공동체의 삶을 끝장내고 있지는 않은가.

 

홀로코스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지 않은가. 아니면 현대라는 벌판에 숨어 있는 지뢰이지 않은가. 언제든지 밟으면 터질 수 있는. 늘 우리 주변에는 있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그래서 평소에는 의식하고 있지 않는.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그런 존재.

 

바우만이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분석한 책이다. 그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사회학적 의미를 추구한 책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일이고, 그렇다면 바우만이 하고자 한 일은 홀로코스트가 우연히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내면적으로 폭력성을 지닌 사람이 그 폭력성을 표출한 것이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 현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홀로코스트는 현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홀로코스트는 현대와 떨어져서는 얘기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뜻인데...

 

현대의 관료제는 홀로코스트의 기반

 

체계적이고도 대규모의 살상이 가능한 기반은 바로 관료제라고 한다. 관료제는 다른 말로 하면 합리성과 체계성에 기반한 조직이다. 여기서는 도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합리성만이 추구된다.

 

즉,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도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문제없이 처리할 것인가를 관료들이 고민하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는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관료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로 일이 분리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이 일의 전부를 알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일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이것은 현대의 분업이 야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 관료제가 확립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철저한 분업화에 기인한 것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분업화는 사람들에게도 일의 전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았으며, 덕분에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자기의 일만 하면 되지, 일의 전체 과정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고, 이는 법대로, 원칙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낳게 된다. 어차피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진다.

 

이게 홀로코스트가 가능해지게 되는 이유다. 이런 관료제 사회에서는 서로가 대면할 기회가 사라진다. 대면할 기회가 사라짐. 이는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는 얘기다.

 

즉 구체적인 개인을 만나지 못하고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사람들만 만난다는 얘기다.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사람들을 구획해버린다. 이런 구획을 통해 개인이 지니는 책임은 사라진다.

 

개별적으로는 인간적이라는 나치 당원들이 그렇게 잔학한 행위들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성이 그렇게 구조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섭다. 우리도 가장 고도화된 관료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엄정한 법 집행. 참 많이도 들은 말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러한 법 집행을 위해 많은 공권력이 동원되고, 공권력은 자신들의 힘을 정당하게 행사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오히려 공권력을 막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고, 이들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불온세력이기 때문에 격리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권력의 행사를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책임은 없다! 아니, 책임이라는 말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한 이유였다.

 

디지털 시대, 일명 스마트 시대,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대면할 기회를 잃어 왔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데, 모르는 사람은 진짜로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그와 나의 거리는 너무도 멀어서 그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나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일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회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세계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홀로코스트는 반복된다. 나치가 자행한 만큼의 대량 학살은 아닐지라도,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목숨은 하나든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다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으니...

 

하여 세계 곳곳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지뢰가 터지고 있는데... 이 지뢰를 우리는 우리 곁에도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남의 일이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다. 바우만이 우려한 일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이 사회학자의 책에는 여전히 대안은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답답하다. 그래도 제대로 안다면... 그 다음엔... 어떤 고민이... 어떤 행동이... 따르지 않을까...이게 바우만의 책을 계속 읽게 만들고 있다.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한다면, 홀로코스트가 가능한 정원사의 세계, 원예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원성을 회복하는 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일이라고... 그러면 홀로코스트를 벗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데...

 

이런 다원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몸부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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