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시선 168
정양 지음 / 창비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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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이라는 시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안도현이 엮은 시집에서 '물끓이기'란 시로 그를 알게 되었는데, 일상 생활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만든 시인의 표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인을 발견하게 되면 그의 시집을 사 보게 된다. 몇 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아직까지 몰랐다니... 제법 시집을 읽었다는 나도 시에 관해서는 아직도 문외한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어떤 시집을 고를까 하다가 그래도 최근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른 시집.

 

뒤를 먼저 살피는데, 이 시집이 언제 발간이 되었고 몇 쇄나 인쇄가 되었는지를 살핀다. 여러 쇄가 인쇄되었다는 얘기는 제법 읽혔다는 얘기다. 단 한 번의 출판으로 절판이 되거나 품절이 된 시집도 있는데, 이 시집은 1997년에 처음 발간이 되었는데, 내 손에 들어온 시집은 2013년 초판 5쇄다. 최소한 다섯 번은 찍어냈다는 얘기이니, 이 시집은 시집 중에서는 그래도 많이 읽힌 축에 드는 시집이리라.

 

시를 읽기 전에 먼저 시인의 말을 살핀다. 그의 말 '시 쓰는 일, 그것이 빛깔이 되든 수단이 되든 목적이 되든, 허무나 그리움 같은 폭폭한 것에 인박히어 그 면역과 건망증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세상을 살고 있다. 진실로 맘에 드는 시집 한권 만들 때까지 이 건망증은 계속될 것만 같다.(129쪽)'는 그의 말이 맘에 쏙 들어온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이렇듯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인박히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잊는다. 잊고 살다가 어느 순간 내 맘 속에 떠오를 때 그 때 그것은 다시 나에게로 다가와 의미있는 무엇이 된다.

 

그의 시들은 그의 삶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다. 그것들이 자연스레 시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의 시를 갯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보면 별 것 아닌, 그저 그런 풍경으로서의 갯벌.

 

그러나 갯벌은 자세히 보면 엄청난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정지되어 있는 듯한, 이미 쇠락한 듯한 그 갯벌에서 온갖 생명들이 요동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생명력 또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갯벌의 포용성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시도 마찬가지다. 그냥 개인의 일상생활, 특히 시골생활이 많은데... 그리고 시의 대부분이 시인의 경험과 동떨어질 수 없는 내용들이라고 짐작이 되는데... 한 사람의 일상을 시로 풀어낸 듯한 시집이지만, 가만히 읽어보면 온갖 것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 그래서 갯벌이라는 비유를 비평가가 썼는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어디선가 본 시인데... 왜 시인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시가 '토막말'이란 시. 분명 어디에서 보고, 이렇게 시를 쓸 수도 있구나, 일상어가, 비속어가 이렇게 시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 숨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시인데.. 왜 시인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하는 시, 보자.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시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이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2013년 초판 5쇄. 38쪽

 

아름답다. 감정을 언어로 순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그 말이. 그 말을 보면서 한 편의 시를 쓴 시가. 우리네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시에 녹아 있지 않은가.

 

이런 시... 읽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시를 가까이 하게 된다. 시란 언어의 유희를 떠나 우리네 삶에 밀착하게 달라붙어 있을 때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시는 우리에게 시를 친숙하게 여기는데 도움을 준다.

 

삶을 수수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들. 그런 시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정양의 시집. 이번에는 새벽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를 본다.

 

그 새벽.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냥 해가 뜨는 장면이 아니다. 그 해 뜨는 장면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깊은 어둠을 경험해야 하는가.

 

어둠을 통해서 새벽은 더욱 아름답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이 온다는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알려주는 시다.

 

새벽은

 

한사코 끗발이 죽는 노름판에

끗발이 끝끝내 꽉 막혀야

새벽이 온다

 

화톳불 식어가는 초상집에도

술독이 바닥난 주막집에도

 

꽁초까지 떨어져야 새벽이 온다

가물가물거리는

저 촛불이 꺼져버려야 비로소

새벽은 온다

 

정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2013년 초판 5쇄. 73쪽.

 

우리의 새벽은 이렇게 오겠지. 그게 바로 새벽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날짜의 변화, 시간의 변화, 자연의 변화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아무리 어둠이 짙어도 그 어둠의 끝에는 반드시 새벽이 온다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아야 한다는... 그런, 갯벌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썩여야 뭇생명들을 머금을 수 있음을... 이런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활동을 해왔던 시인인데... 이제서야 그의 시집을 읽고 그렇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듯 생활이 바로 시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시가 한둘이 아니겠지마는, 이번에 읽은 정양의 시집은 한 마디로 좋다였다. 그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 사회를 볼 수도 있었고, 민초들의 삶을 통하여 인간 삶을 생각할 수도 있었고, 그의 내력을 드러낸 시들을 통하여 우리 현대사를 생각할 수도 있었기에...

 

내 마음에 들었던 시들은 더 있는데... 길어서 인용은 그만하고, 제목만 말하면 '사진찍기2', '평양소주','낯도 안 붉히고'가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이 시집은 정말로 갯벌이다. 많은 생명들이 이 시집에서 자신들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 이 시집은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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