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에 광고가 크게 났다. 흑백사진인데... 어, 많이 보던 얼굴인데 했더니, 이런 박인환이었구나. 목마와 숙녀의 시인, 아니 세월이 가면의 시인. 김수영의 친구. 195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등등. 그의 얼굴이 정말로 멋있게 난 사진이 신문에 실려 있으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그동안 임응식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으니, 내 무식을 탓할 수밖에 없겠지만, 사진가 하면 최민식밖에는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내 문화적 한계도 이 광고를 통해 통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광고 사진이 바뀐다. 김환기 사진도 있고, 구직이라는 글자를 가슴에 단 사람의 사진도 있다. 야, 보고 싶다. 한 번 가보고 싶다. 어디서 하나? 덕수궁 미술관에서 한다. 가격은 5000원. 이 정도면 갈만하다. 아니 가야겠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생각난 김에 가야겠다. 하여 오늘 갔다 온 길.

 

4개의 전시관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하나도 놓치기 싫을 정도로 좋았다. 모두가 흑백사진인데, 사진을 감상하는 능력이, 사진의 기법을 읽는 능력이 있는 나는 아니지만, 그 사진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일제시대부터 1980년대까지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우리나라 근대사의 모습 중에서 여러 인물들과, 우리 문화재들과 그리고 우리 역사, 우리 자연이 사진 속에 녹아 있었다.

 

특히 내 맘에 든 전시관은 3관. 명동시대 전시관. 여기에는 명동에서 생활했던 작가들의 사진이 나열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작가들. 지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작가만 해도 김동리, 백철, 손소희, 최정희, 오상순, 조병화, 정한모, 그리고 박인환이니... 그들의 사진과 더불어 그들의 작품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기쁨. 오길 잘했다는 생각.

 

사진사에서 유명하다는 임응식. 그를 발견하고 즐거워진 오늘이다.

 

사진으로 남긴 기록.

글과는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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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이동수단 중에 자전거만큼 친환경적인 수단이 있을까?

어짜피 인간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자연과의 갈등과 타협이 중요한데,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물들에, 또는 다른 존재들에 빚지고 있는데... 이 빚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노력이 바로 공생의 노력인데...

 

이렇듯 공생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노력이 절제를 할 수 있는 도구의 사용으로 나타난다고 하고, 이동 수단 중에서는 자전거가 절제의 도구이자, 공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고 했다.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지속가능한 성장, 아니면 녹색성장을 하위해서는 우리는 자건거와 같은 도구,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자전거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일리치가 요즘 우리나라의 자전거 문화를 보면서도 과연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웬만한 자동차 값과 맞먹는 자전거의 비용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좋은 자전거를, 여기에도 명품자전거가 있으니, 구입하기 위해 외국에서 수입해 온다는 사실을 묵인하더라도, 지금, 자전거는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오히려 환경파괴의 상징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나?

 

오랫만에 춘천 쪽으로 갈 일이 있었다. 춘천, 강과 호수의 도시 아니던가. 그런데, 이 강변에 모두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자전거 하나로 전국을 돌 수 있다더니... 길이 끊기지 않고, 자전거만 타고도 갈 수 있다고 그렇게 홍보를 하더니... 북한강에도 자전거길이 만들어져 있다.

 

와, 하는 탄성이 나오는 대신, 이 길을 만들기 위해서 이미 강에 가한 인위적인 손질이, 강의 생태를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론 넘치고, 때론 똑바로, 때론 구불구불,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흘러야 하는 강은 자신의 주변을 인공적으로 손대면 꿈틀거린다. 견딜 수 없어한다.

 

물론, 자전거를 타며 강변을 달리면 기분은 좋다. 풍경도 좋다. 그러나 이 눈의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자연을 인간에 맞게 맞추는 작업을 하면서 살면 자연이 인간의 뜻에 맞춰줄까?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던 공생의 수단, 절제의 수단이었던 자전거가 강변에 따라 설치된 자전거도로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인간의 단절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지 않았는지...

 

행복이 자전거를 타고 오려면, 이러한 인위적인 자전거길이 아니라, 우리가 이동을 할 때 자가용이 아닌,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곳에서 자전거길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나.

 

사실, 10킬로미터 이내에서 자전거는 빠른 이동수단이고, 몸에도 좋은 이동수단이지만, 이렇듯 우리의 여가를 위해서, 또는 그냥 자신의 장거리 여행을 위해서 자전거길을 인위적으로 만들면 길게 보면 우리에게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나친 기우일까? 확대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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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교육청에서, 아마도 교육감 권한대행인 부교육감의 결단(?)이겠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안을 서울시의회에 재심의 요청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서울시 의회의 정기회의가 열리면 이 안건이 다시 심의가 될텐데... 그동안에 서울시교육감의 재판이 어떻게 결정되어지느냐에 따라, 재심의는 취소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학생, 또는 청소년에 대한 인권조례가 교육감 역할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거부되거나 수용될 수 있다는 얘기는 청소년(이하 청소년이라고 하자. 학생은 청소년에 포함이 되니 말이다)은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않은 보호받아야만 할 대상이라고 규정짓고 있다는 얘기이리라.

 

너희는 자립하지 못하니, 권리를 어느 정도 유예해야 하지 않나 하는 대답이 돌아오리라. 그러나 자립의 문제와 권리의 문제는 다르고, 또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는 자립 여부를 떠나 누구에게나 존중되어야 할 권리이다. 게다가 청소년은 자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규제가 있나?

 

특히 학교라는 제도에서 벗어나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데, 자립을 못했으니, 권리를 유예하라니... 

 

겨우 학생인권조례라고 시의회를 통과시켰는데... 교육을 다루는 교육청에서 그를 거부하고 나서는 꼴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4호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청소년들도 이제는 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아니, 나서고 있다고.

 

그래서 특집 글이 "청소년, 그들의 저항 그리고 정치"다.

 

청소년들도 정치적 입장을 지녀야 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야 하며, 정치 공간에서 자신들의 권리가 관철될 수 있도록 조직하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한다. 많은 청소년 단체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공과를 파악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충분히 시도해야 할만한 문제고, 당연히, 그리고 시급하게 시도해야 할 문제다. 청소년이 조직되어 있었다면, 서울시 교육청이, 아니 서울시 교육청의 몇몇 관료들이 학생인권조례안을 거부하는 이런 사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몇 십년을 앞서가도 시원찮을 교육청이, 몇 십년을 뒤로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이 때 그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 든다. 이 책에도 나와 있자만 청소년의 권리는 어른들로부터 주어져서는 안된다. 청소년들이 찾아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니 말이다.

 

너무 앞서간다고? 아니, 청소년을 이렇게 사람 대접 안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한다. 다른 글들, 즉 청소년의 성을 말한 글을 보더라도 이는 잘 드러나고 있고, 또 청소년들의 대담에서 어른들, 더 나아가 진보운동을 한다는 어른들이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보호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청소년을 규정하는 한, 인권은 저 멀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나이,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권리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구분을 없애는 노력부터 해야 인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생각 못했던 부분, 생각하게 해 준다. 꼼꼼하게 읽어볼 일이다. 이 책은.

 

 

아직도 인권이 꽃피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인권이 꽃필 수 있게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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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전철을 탄다.

먼 거리를 갈 경우, 전철은 책을 읽기 좋다.

아니 좋았다.

예전엔 신문을 보는 사람부터 두꺼운 책을 읽는 사람까지 참 많았다.

30분 이상 가는 거리일 때는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되었다.

여기에 책들을 보면 무슨 무슨 도서관이라고 책의 주인임을 알리는 표시도 된 책도 많았고.

 

하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아닌, 노래소리, 드라마 소리.

저마다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전자기기들.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들.

그러나 이어폰을 비집고 소리가 나오고 있다.

저렇게 크게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책이 없으면 차창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생각할 틈을 지니지 않는다.

생각은 이미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조금도 심심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심심함, 그 권태는 요즘 세상에서는 죄악이다.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니, 몸도 정신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생각이 자리를 잡을 여유도 공간도 없다.

 

책을 읽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줄어들었겠지.

서점에서는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찰길이 멀수록 복되다. (이태준의 '책'이란 수필에서)

따라서 전철에서 읽을 수 있는 크기의 책도 사라져가고 있다.

일명 문고판.

가격도 싸고, 손에 잡기도 좋고, 또 주머니에 넣기도 편하고.

일석 삼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주었던 그 문고판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직 나오고 있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전철을 타면, 이 디지털 시대에 아직은 아날로그로 살고 싶어진다.

그래서 가끔 전철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른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너무 무거워도 안되고, 너무 두꺼워도 안되고, 내용이 너무 어려워도 안되고...

그러다 한 권 고르고...

가는 내내 읽으며 생각하는 재미.

전철을 타고 가는 맛이 난다.

즐겁다.

 

이번엔 이태준의 무서록을 골랐다.

두서없이 쓴 글. 순서가 없는 글.

수필집이다.

순서 없이, 자기 생각을 체계적으로 썼기에 아무 부분이나 맘에 드는 부분을 고른다.

그리고 읽는다.

그냥 손가는 대로 읽는다.

첫 번째 무심히 펴들었는데... "책"이다.

이런 기막힌 일이.

순간,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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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교 폭력에 관한 문제가 날마다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개개인의 싸움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인 폭력이라고, 이거는 미성년자라고 봐줄 수준이 아니라고, 법에 의해 엄정히 처벌해야 한다고 한다.

 

학교와 시와 경찰이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고 한다.

 

마치 지금까지는 안해왔다는 듯이 호들갑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퇴직경찰이나 퇴직 교사들이 학교 지킴이란 명목으로 학교에 배치된 경우도 있고, 학교폭력대책위원회에는 지역 경찰이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전문 상담인력까지 학교에 배치하려는 노력도 있어왔고.

 

그럼에도 왜 이놈의 학교폭력은 근절되지 않을까? 집단 생활을 하면서 근절될 수 없는 문제일까? 그건 아니다.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게 되어 있다. 학교 폭력도 마찬가지다. 다만 어디서부터 풀어갈지 고민을 해야 한다.

 

학생들을 범죄자 취급을 하고, 학교에 경찰이 상주하면 학교 폭력이 해결될까? 아니다. 이는 다른 여러나라에서 보더라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학교의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결이 될까? 이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형제가 있는 나라에서 흉악범죄는 이미 다 없어졌어야 한다.

 

결국 학교 폭력은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처벌이 문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학교의 구조, 교육의 구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교육의 목표를 민주시민의 양성이라고 해놓고는, 민주시민이 어떻게 해야 양성되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교육의 목표는 거창하나 도대체 민주시민교육을 하는 경우는 없다. 아니, 오히려 민주적이지 않은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축산업에서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가르는 사업을 옳지 않은 축산방법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교육현장인 지금 학교 공간에 들어서 있는 아이들을 보라. 과연 학교 교실이 인간적인 공간인가? 인간적을 쾌적함을 느끼는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있는가? 자신이 배워야 할 과목조차도 선택할 수 없고, 오직 주어진 대로 배워야 하는 아이들, 그리고 교칙이라는 선험적으로 정해진 규율에 자신을 맞춰야 하기에 머리부터 옷까지 어느 하나 자유가 없는 아이들이 과연 "나"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라도 할 기회가 있었던가?

 

"나"도 생각 못하는데, "남"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남"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전혀 없는데,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을까? "나, 남,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도 없는 아이들에게 학교 폭력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최소한 교육의 구조부터 바꾸어야 하고, 아이들이 "나, 남,우리"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이들이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나? 이게 선행이 되어야 배려, 남에 대한 존중, 차이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나? 이게 이루어져야 폭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나?

 

단순히 처벌 위주로 가면 학교 폭력은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때다.

 

예전부터 학교 폭력에 대해 고민한 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책으로 펴냈었는데... 많은 경우가 나타나 있고, 교사들의 노력이 들어 있다. 교사들, 지금까지 손놓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소설 중에서 학교 폭력을 다룬 소설이 있다. 해결방법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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