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소설 제목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인데, 요즘은 70-80년대 그 많던 지식인, 사회변혁, 사회정의를 꿈꾸던 지식인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이 난다.

 

누가 먹어치운 것도 아닌데... 설마 자본이 지식인까지도 먹어치웠나?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지식인의 역할이 커져야 하는데, 어지러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식인은 지식인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영리만을 추구하는 소인배에 불과하다.

 

그런데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이상하게도 민중과는 멀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많이 배울수록 자신의 지식을 이상한 쪽으로 이용해 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인정할 것을 온갖 현학적인 논리를 동원하여 합리화하려 하지 않나, 그 때의 관행이라는 둥, 시대적 한계라는 둥 하면서 지식인 개인의 책임은 모면하려 하고, 오로지 시대나 사회에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고 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고매한 생각을 우매한 민중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만 하고 있다고 되려 큰소리를 치고 있다.

 

머리 속에서는 세상을 바꿀 지식이 들었으니 현실에 적용하려니 자신에게 다가올 불이익이 두려워 차라리 아무 말 안하고 입닥치고 살겠다거나, 또는 현실은 현실이고 이론은 이론이라고, 오히려 현실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맞추는 사람도 있으니...

 

이런 사람들이 지식인이랍시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있어서 온갖 여론을 주도하고(이를 황색언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자신들의 침묵을, 자신들의 지행불일치를 합리화하고 있으니... 이런 세상이 어떻게 좋은 세상이라고 하겠는지.

 

사회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구조적인 면, 개인적인 면? 지식인들은 온갖 처방을 내놓지만,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트레버"의 소년보다도 못한 처방들일 뿐이다.

 

트레버는 이야기한다. 내가 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그 조건으로 그 사람들도 각 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계속 된다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트레버는 그렇게 실천한다. 소설 속에서 트레버는 비운의 죽음을 맞지만 그가 제시한 일들은 꼭 수학적인 산술대로 되지는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실천되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다. 지식인들의 온갖 화려한 문구들보다도 훨씬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리고 현재적이다.

 

이 발상을 거꾸로 하면 지식인들, 제발 사회에 해가 될 일을 하나씩만 하지 마라. 그리고 다른 지식인들에게도 하나씩만 하지 마라고 이야기 해라. 그러면 세상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워 지리라.

 

여기에 반대로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갈매기가 있다. 그는 지식인 갈매기라고 할 수 있다. 갈매기들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갈매기의 모습을 꿈꾼다. 그러다 비웃음을 받고 무리에서 쫓겨난다. 쫓겨난 후 그는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집단과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을 만난다. 그리고 예전 동료 갈매기와는 다른 갈매기가 된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의 성공담으로, 지식인의 성공담에 불과했을텐데,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렇게 다른 존재가 된 조나단, 그는 예전 무리들에게 돌아간다. 왜냐? 자신이 깨우친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했으니까.

 

이게 바로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민중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먼저 깨달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그들이 할 일은 민중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민중들도 함께 깨닫게 해야 한다.

 

이것이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기도 한다. 자신의 깨달음에서 멈추고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거나 또는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집단 속에서만 살거나, 아니면 자신을 더 높은 이끌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 속으로, 자신의 원존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 유기적 지식인... 이것이 바로 조나단 갈매기다. 그리고 '트레버'다. 무슨 무슨 학위가 있다고 지식인이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그런 지식인,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암흑기라 할 수 있던, 엄혹했던 70-80년대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지식인들이 큰역할을 했는데...지금은?

 

정말, 지금은?

 

이 질문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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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시성이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 중 한 구절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춘망'이라는 시의 첫구절.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존재한다 정도로 해석되는 말. 국가의 흥망성쇠와는 상관없이 자연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듯하고, 이 시와 더불어 야은 길재의 시조도 연결이 되는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여기서 두 번째 중장의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구절이 두보의 국파산하재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순간적인 삶을 살고, 인간이 만든 나라도 영원하지 않고 생명이 있는데, 자연은 그와 반대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일텐데...

 

인천 아시안게임과 또 다른 뉴스 방송을 보다가 너무도 놀란 것이 강인데, 그 강이 직선으로 아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강이 직선이라?

 

강은 곡선이어야 하지 않나? 이 때 곡선이 강이 유연하게 휘게 정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강 가의 곳곳이 드나듦이 있어서 온갖 생명체들이 그곳에 머물 수 있어야 하는데...그렇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정비된 강에서 어떤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강이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4대강은 녹조로 녹조라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는데...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영원해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나라는 멀쩡한데 산하를 망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더 좋을 산하를 인위적인 힘으로 변형시키려 해서 결국 산하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산천도 망하고 인걸도 없는 그런 상태로 변하지 않았나 싶다.

 

천혜의 자연이라는, 금수강산이라는 우리나라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강은 인공적인 냄새가 너무 풀풀 나고, 푸른 산들은 하나둘 깎여나가 이제는 고층빌딩들이 숲을 대신하고 있으며, 자연스레 만들어졌던 길들이 온갖 인공적인 도로로 덮여버린 세상.

 

산하를 이렇게 파괴하고도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아름다운 옛시절이라고 하던데...비록 가난했지만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댓가가 자연 파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지...

 

심호택의 "하늘밥도둑"이라는 시를 읽고 싶어졌다. 반듯반듯한, 녹색으로 뒤덮힌 강물의 영상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옛날을 노래한...그래서 더욱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 시집을...

 

두보나 길재의 시가 앞뒤가 바뀐 지금... 다시 바로잡아야지. 순간이 영원을 뒤집으면 안되지. 영원에 맞춰 순간을 살아가야지. 

 

그의 시집에 나온 두 시... 마음이 짠하다.

 

그만큼 행복한 날이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니

싸리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심호택.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7쇄. 8쪽

 

하늘밥도둑

 

망나니가 아닐 수야 없지

날개까지 돋친 놈이

멀쩡한 놈이

공연히 남의 집 곡식줄기나 분지르고 다니니

이름도 어디서 순 건달 이름이다만

괜찮다 요샛날은

밥도둑쯤은 별것도 아니란다

우리들 한 뜨락의 작은 벗이었으니

땅강아지, 만나면 예처럼 불러주련만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살아보자고, 우리들 타고난 대로

살아갈 희망은 있다고

그 막막한 아침 모래밭 네가 헤쳐갔듯이

나 또한 긴 한세월을 건너왔다만

너는 왜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거냐?

하늘밥도둑아 얼굴 좀 보자

세상에 벼라별 도적놈 각종으로 생겨나서

너는 이제 이름도 꺼내지 못하리

나와보면 안단다

부끄러워 말고 나오너라

 

심호택.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7쇄.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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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슨 구름 따먹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그가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에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또 춘추전국시대 인물이기에 한참 지나간 과거의 인물일 뿐이라고, 그의 사상은 이미 한물 간 사상이라고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녹색평론에 연재된 배병삼의 글을 보면서 논어가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았고, 왜 그가 성인이라는 소리를 듣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말들은 그 시대의 말들이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말들이기도 했으니, 그의 말들은 역시 영적인 말이다.

 

논어의 많은 편 가운데 요즘 위정편이 마음에 내내 머문다.

 

정치가 하도 엉터리라서 그런지, 정치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말하는 위정편을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 논어를 펼친다.

 

처음 시작이 학이(學而)편이고, 다음이 위정편이다. 이번에는 위정편을 집중적으로 읽기로 하고 읽어 보았다.

 

오래 전에 읽은 논어에 대한 기억으로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이것들과 정치를 연결지으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굳이 위정편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논어의 편제가 그렇듯이 처음 시작이 위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치와 관련된, 지금 이 시대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말을 찾아 본다.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위정이덕, 비여북신거기소이중성공지)

- 덕으로 하는 정치는, 북극성이 자리 하고 있으면, 뭇별들이 그 주위에 함께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게 공자가 생각하는 정치다. 덕으로 하는 정치. 덕은 자연스레 주위로 스며든다. 그래서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남들이 따른다. 훌륭한 정치가는 북극성과 같아서 그 주위에 훌륭한 별들이 모여들고 함께 하기 나름이다.

 

이런 덕의 정치 이루어지고 있는가? 지금 정치인들은 과연 덕으로 정치를 하려고 하기는 하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 덕은 법이나 형벌과는 다르다. 그것을 구분하는데, 공자의 장점이 있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 백성을 정치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벌은 면하여도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도 알고 잘못도 바로 잡게 된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얼마나 타당한 말인가? 모든 것을 법, 법 하는 시대에, 도대체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 위에 법이 있다는 식의 정치가들의 말이 통하는 시대는 과연 올바른 시대인가?

 

공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덕과 예로써 인도되어야 한다. 그것은 형(刑)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와는 다르다.

 

다음 글은 위정편의 중심이라고 할 만하다. 진정으로 정치가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 (거직조제왕 칙민복, 거왕착제직 칙민불복)

 

- 정직한 사람을 기용하여 그릇된 사람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복종할 것이요, 그릇된 사람을 등용하여 정직한 사람을 다스리게 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 어떤 대통령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인데, 정직한 사람을 자신의 주변에 두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는 얘기다.

 

인(人)의 장막에 가려져 있으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 자신에게 올바른 말을 해줄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가장 기본일진대, 과연 그러한지...

 

청문회를 제대로 통과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청문회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소리를 하지 않나, 그 정도는 관행이라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대 우리나라 정치, 과연 공자가 그 모습을 보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사라진 시대, 도와 덕이 사라진 시대라고 개탄하지 않을까?

 

더 많은 말들이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기에는.

 

다시 꺼내 읽은 논어의 위정편... 지금 우리나라 정치와 연관되어 마음을 쿡쿡 찌른다. 몇 천 년 전 공자의 말씀이 아직도 허공에서만 떠돌고 있으니...

 

그의 말이 지상에 내려와 우리 정치인들의 가슴에, 머리에 콕콕 박혔으면 좋겠다.

 

하지만 거꾸로 그런 정치인들을 만드는 게 우리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함석헌 선생 말처럼 깨어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깨어 있는 국민이라야 덕이 있는 정치가를 뽑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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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겨레 신문 첫면에 난 기사의 제목

 

"침묵 깨고 강공…박대통령 '세월호법' 걷어찼다"(2014년 9월 17일자)

 

대통령의 면담을 요청하고, 여당과 야당이 제대로 정치를 이끌어가지 못하니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고, 삼권분립이라지만 아직은 제왕적 권한을 지니고 있는 대통령이 나선다면 문제 해결에 한 발 다가설 것이란 생각에 대통령의 나서주기를 바라던 유족들의 바람이 어제 장고 끝에내린 대통령의 결단(?)으로 끝나버렸다.

 

대통령은 자신이 나서면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하면서 세월호에 대한 대통령의 결단을 거절했다

 

이 거절을 한겨레 신문에서는 걷어찼다고 표현했는데, 언제든지 자신을 만나러 오면 만나주겠다는 대통령의 약속도,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던 대통령의 말도 어제 이 말 속에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대통령의 권한이 큰데, 삼권분립이라고 하지만 국무총리부터, 대법원장, 국회의장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없는 지경인데...

 

지금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세월호이고, 이 세월호 문제가 도대체 삼권분립 체계 안에서, 또 현 사법체계 안에서 해결이 안되고 있기에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대통령이 이번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 버렸다.

 

"그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 누가 관여하지? 해경은 일종의 경찰인데, 그 해경이 문제의 핵심에 있는데, 또 여러 가지 의혹을 사고 있는 집단들이 힘있다고 하는 집단인데... 현재의 사법체계 안에서 잘 해결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의심을 받는 것 자체가 이미 현 사법체계가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인데...

 

대통령마저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교육부에서는 이렇게 한단다.

 

역시 한겨레 신문 2014년 9월 7일자 첫 면의 기사다.

 

'세월호 리본달기' 금지령 내린 교육부

     점심 단식·공동수업도 불허

 

교사는 추모해도 안된단다. 교사가 추모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란다. 세월호 가지고 특별법 만들어 달라고 동조 단식을 하는 것도 정치적 행위이고, 세월호에 관하여 공동수업을 하는 것도 정치적 행위다.

 

이것이 정치적 행위 맞다. 한나 아렌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정치적 동물이다. 우리가 공동 생활을 하는 한 정치적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문에서 또는 교육부에서 말하는 정치적 행위라는 것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또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 정치 행위는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특정 정당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것은 막을 수 있지만, 세월호에 관한 것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또는 정부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닌,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기본적으로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또는 자기 지인들이 수장당하는 모습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아야 했던 그 심정을, 그 한을 풀어달라는 것이고, 그 한이 풀려야 함에 동조하는 말,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닐까?

 

적어도 지도자라면, 정치가라면, 리더라면 그런 행동을 오히려 장려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옳음을 위해서는 법과 원칙에 얽매이지 않을 것... 이것 아닌가.

 

원칙은 아름답지만 원칙에만 매달리면 추하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진정한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때 읽으면 좋을 책.

 

케샤반 나이르, 간디 리더십. 씨앗을뿌리는사람.1999년

 

예전에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사람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한 책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성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간디에게 배우는 책.

 

 

김종철 선생은 요즘은 '정치가 계급'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를 하는 사람이 '정치가 계급'이 아닌 진정한 정치가가 되려면 간디 리더십에 관한 이 책을 읽고 조금이라도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 책도 읽으면 좋다.

 

"위대한 영혼의 스승이 보낸 63통의 편지" 지식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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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조사위원회에 조사권과 기소권을 주자는 유족들의 의견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헌법은 우리나라 최고의 법이다. 그리고 다른 법률들은 이 헌법에 기초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헌법에 위배된다는 얘기는 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얘기다.

 

이만큼 헌법은 우리네 삶의 기본을 규정한다. 그만큼 헌법은 공명정대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헌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법은 공정한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희망버스를 조직했던 송경동 시인에게 벌금 100만원이 내려진 판결, 파업에 성공한 노동자들에게도 각종 벌금이 부과되는 판결들, 그리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강하면서도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판결들.

 

'000했으나 000은 아니다'라는 판결과 '당시의 관행이었다'는 말로 넘어가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이것은 힘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판결이었고, 힘없는 사람들은 각종 소송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법, 법, 헌법, 헌법 하는 시대. 과연 법치만능주의가 성립하는가? 법이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법이 사람 위에 군림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법의 잣대에 맞추려고만 해서는 안된다. 사람에게 법이 맞추어야 한다. 법이 경직되어 있다면 고쳐야 한다. 헌법 역시 수차례 개정을 하지 않았던가.

 

또한 법은 해석에 따라 적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판결하더라도 만장일치로 판결이 난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소수 의견들이 나오기도 한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도 이럴진대, 지금 자식의 죽음을 눈 앞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유족들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헌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이지 위배된다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헌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나? 최소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느끼지 않도록 법 적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법가라고 불리는 한비자. 그가 법을 중시했지만, 법 만능주의에 빠졌을까 하면 그것은 의문이다. 법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비자가 기초한 법가의 사상을 정치에 응용한 사람이 상앙이라면, 그 상앙이 법을 글자 그대로 집행하려고 하다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기억하는 것이 좋다.

 

이들 법가는 힘있는 사람이나 힘없는 사람 구분하지 않고 공정하게 법적용을 하자고 하는데, 지금은 과연 그러한지도 의문이고...

 

법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법가가 천하통일을 하지 않고, 인의로써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한 유가가 세상을 통일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엄정한 법 집행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살리는 법 집행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 위에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법이 있다. 이것이 사실 법가의 궁극적인 주장이 아니었을지.

 

"한비자"가 다시 생각나고, 이들이 살았던 시대의 제자백가들에 대해서 잘 정리한 신영복 선생의 "강의"가 다시금 생각난다.  

 

사람을 위한 법... 그러한 정치...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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