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대표시 선집
이기형 지음, 임헌영.맹문재 엮음 / 작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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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기형 시인이 살아있었다면 올해 얼마나 기뻐했을까? 민주정부 10년이 끝나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던 그 시절, 결국 새로운 전환을 보지 못하고 90이 넘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인.

 

젊은 시절 여운형에게 감화 받아 그와 함께 일을 했지만, 여운형이 암살당한 뒤 글에서도 멀어졌던, 그러다 60이 되어가서야 다시 문학을 하게 된 시인.

 

젊은 시절, 뮤즈의 영감을 받아 왕성하게 시를 써나가는 다른 시인들과 달리 이기형 시인은 이순(耳順)이 되어서야 왕성한 시작 활동을 했으니.

 

많은 시집을 냈지만, 그 시집들은 통일로 귀결이 될 수 있으니, 북쪽에 어머님을 두고 온 시인, 그리고 분단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시인.

 

남북이 하나되길 바랐던 여운형을 따랐던 시인. 그래서 그는 여운형을 기리는 시도 꽤 썼는데...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올 4월 27일. 역사적인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역사적인 날이다.

기억해야 할 날이다.

아무 것도 없었다.

살짝 솟아나온, 한 걸음으로도 넘을 수 있는

결코 장벽이 아니었다.

서로 얼굴도 마주볼 수 있는

언제라도 넘을 수 있는

죽어야, 죽여야 한다,

욕만 하던, 총을 쏘던

피냄새가 진동하던

남북관계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어

우리들을 가로막았다.

철조망도 아니다.

지뢰도 아니다.

우리 마음이다.

좌와 우, 왼쪽, 오른쪽

세상, 어느 쪽에 서 있어도

가족은 가족, 민족은 민족

사람은 사람

똑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 없기에

각자 자기 편한 자리에 서 있을 뿐

그 자리에 섰다는 이유로

죽일 놈이 될 이유는 없다

쫓아내야 할 놈이 될 이유도 없다

이곳 저곳 함께 있어야 더 잘 살 수 있으니

보이지 않는 선,

이념

제 머리 속에서 나온 언어가

단단한 장벽이 되어

서로 밀어내고 막아내고 있는데,

머리가 아닌 발이

한 걸음만 내디딘다면

이 장벽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북측에서 내려온

김정은 국무위원장

환하게 웃으며 한 걸음 내디딜 때

남북을 가르던 장벽은

하나의 선에 불과했다

언제든, 누구든 넘을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여줬다.

손 잡고 다시 한 걸음

북측으로 넘어감으로써

넘어왔다 넘어갔다 넘어왔다

이 말이 아니어야 한다

그냥 왔다갔다 할 뿐.

왔다갔다 할 수 있을 뿐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고

함께 나무를 심으며

이젠 전쟁이 아닌 평화를

비방이 아닌 대화를

적이기보단 한 민족임을

서로 보여주었다

남과 북 정상이

분단 상징, 판문점에서

어떤 장벽도 우리 앞에선

우리 발걸음을 막을 수 없음을

그렇게,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전쟁이 끝난 뒤

북쪽 최고지도자가

남쪽에 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

그것도 걸어서.

판문점, 남쪽에서

회담을 하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젠 서로 대화하자고

이젠 서로 왕래하자고

전쟁이 아닌 평화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그렇게, 하루,

우리는 웃으며

남북 정상이 만나는 모습

남북 정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만나야 할 미래를

그날 보았다

한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가 됨을 인정하지 않던

-그럼에도 유엔엔 동시 가입을 했으니

하지만 삼국시대도, 후삼국시대도 겪었떤

우리 아닌가.

좀더 길게 함께 공존해야 한다면

두 나라면 어떠리

차라리 두 나라가 되어

친밀하게 교류하는 두 나라가 되면

여권만 있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되고,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텐데

실질적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으로 뻗어갈 수 있는

기차 타고 유럽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될텐데

이산가족의 아픔도 많이 사라질텐데

북한 어느 곳도 못 가볼 곳이 아니고

남한 어느 곳도 못 와볼 곳이 아니니

언제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텐데

괴뢰가 아니라

정당한 나라 대 나라가 되면

서로 더 많은 교류, 협력이 이루어질텐데

자주 만나다 보면

이젠 더 정도 들고

차이도 많이 없어져

-통역 없이 정상 회담을 하는,

미묘한 어감 차이를 서로 알 수 있는

대화 상대-

통일이란 길에 더 빨리 들어설텐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하며

우리 아이들이 총을 억지로 들지 않을

그런 시대가

'국가보안법'이라는 유령이

이제는 활보하지 못하는

밝은 대낮 세상이 되어야 함을,

두 정상 환한 미소

속에서 보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더 건강해서 오래

그 자리에 있어야

-세상에 이거 국보법 위반 아냐?

남북 화해 분위기가 더 오래 가고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가을에 평양에 오라는 초청을

흔쾌히 수락한 문 대통령이

다시 다음해 봄에는 서울에 오라고

그래서 봄엔 서울서,

가을엔 평양에서

한 해 두 번 남북 정상들이

정기적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이 만남들이

다른 만남들을 이끌어 낼 수 있을텐데

더 많은 만남들이 모여

통일 물결이 될 수 있을텐데

한 밤의 꿈은 아닐지니

이건 우리가 꾸는 낮꿈

희망이 실현되는 첫걸음일지니

수구들이 뭐라 해도

뚜벅뚜벅 제 길을 가야 한다

2018.04.27.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그 날

함께 선을 왔다갔다 한 두 정상

장벽이 우리를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준

별것 아닌 그 장벽을

머리가 아닌 발이 너무도 쉽게

넘을 수 있음을

우린 보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발임을

머리는 잠시 쉬어도 됨을

그날

우린 축배를 들었고

우리나란 조금 더 가벼워지고

조금 더 밝아졌다

수구들이 활개치기 힘들게

유령이 나올 수 없게

그렇게 밝아졌다.

 

이런 생각. 이기형 시집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무려 세 번이나 정상회담을 한 올해. 통일로 한 발짝 더 다가간 올해. 적어도 남북 군사 긴장만은 많이 해소된 상태. 그렇게 시인이 꿈꾸던 통일 시대로 우리가 들어섰다는 생각을 한다.

 

다양한 시들이 있다. 마음을 짠하게 울리는 시도 있는데, 그렇게... 읽으며 통일을 생각한다. 시인이 보았던 6.15, 10.4 정상회담에 이어, 더 통일로 다가갔음을, 시인이 저승에서 활짝 웃으며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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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추모시집
정희성 외 261인 지음 / 화남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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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輓章)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주욱 늘어선 글들. 그를 추모하는 시들. 그렇게 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어 시인들이 시를 써서 그가 가는 길에 펼쳐 놓았다.

 

그를 따라 시들이 펄럭인다. 펄럭펄럭,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그 뜻을 잇겠다고, 그렇게 만장이 그와 함께 나부낀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철학자들은 이상을 꿈꾸고 이상을 이야기하지만, 정치인들은 이상을 꿈꾸되 현실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현실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말을 하면 그뿐이지만, 정치가들은 그렇지 않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치판에서 이상을 꿈꾸며 현실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상은 늘 저 멀리 있고, 현실은 너무도 질척거리게 된다.

 

질척거리는 현실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도 가야 할 길. 가야만 할 길. 그러나 온몸에 튄 진흙으로 남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길. 정치인의 길.

 

정치인은 철학자가 될 수 없다. 철학자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지만 정치인은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인정받는 사람과 인정받지 않아도 될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가끔은 이 구분이 모호해서 양쪽에서 다 비난을 받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다. 그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욕을 먹을지라도.

 

그렇게 정치인은 제 갈 길을 간다. 가야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 정치인들은 이리저리 눈치를 본다. 그들은 현실을 개척해 나가려 하지 않고 현실에 머무르려고 한다. 누구에게도 욕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욕을 먹게 된다.

 

자기 길을 간 정치인. 비록 이런저런 욕도 많이 먹었지만, 굴곡도 엄청나게 겪었지만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치인. 노무현.

 

노무현이 철학자이길 바라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일 수가 없었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한때 그에게 철학자가 되길 바라기도 했지만, 터무니없는 바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

 

자신의 하강으로 우리들 정신을 깨게 했을 때... 정치인 노무현으로, 그에게 온갖 진흙이 묻을 수밖에 없음을, 그 진흙을 거부하지 않고 제 몸에 붙이고 그 길을 간 사람이 그였음을.

 

다시 거의 10년이 되어갈 때 그를 추모한 시집을 읽는다. 만장이다. 펄럭펄럭, 그와 함께 가는 만장들.

 

이 시집에서 이 시...

 

지금 감옥에 가 있는 두 전직 대통령. 남들에겐 엄격한 잣대를, 자신에겐 너무도 부드러운 잣대를 들이댄 두 전직 대통령들.

 

이 시가 헛되지 않았음을 이제사 생각한다.

 

   공고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에게

                                                  윤석주

 

야이, 느자구 없는 놈들아!

 

머리 위에 하늘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마라.

 

하늘나라 법집행관 윤 석 주

 

정희성 외,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화남. 2009년.480쪽.

 

이 시에서 '하늘나라 법집행관 윤 석 주'를 '하늘나라 법집행관 0 0 0'로 바꿔 000에 우리들 이름을 집어넣어도 된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000은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되어 엄정한 집행을 해야 한다.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아직 진행 중이긴 하지만...

추모시집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만장을 만들었다. 그 만장과 함께 잊지 못함을. 그렇게 그는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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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3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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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3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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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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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을 읽다가 쉼보르스카가 쓴 한 구절에 마음이 꽂혔다. 이렇게 한 구절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오랜만.

 

그 구절이 내 마음을 쉼보르스카 시집을 찾아 읽게 만들었는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끝과 시작"은 쉼보르스카 시선집이다. 12권의 시집에서 고른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읽다가 내 마음을 끈 시구를 발견했다.

 

'박물관'이라는 시에 있는 구절이다.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란 구절... 이 구절 다음에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70-71쪽)라는 구절이 따른다.

 

유한한 인간 생명. 인간이 지니고 있던 물건이 인간보다 더 오래 남아 인간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 어쩌면 우리는 유한한 생명이기에 무한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것 중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

 

물질로 남길 수 없다면, 물질로 남기고 싶지 않다면 사람들은 이름이라도, 아니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일.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일.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박물관에 남기게 된다. 인간 삶이라는 박물관에.

 

이렇게 반가운 구절도 만나고, 시대순으로 엮인 이 선집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럽 역사와 폴란드 문화와 성경에 있는 내용 등등. 참으로 방대한 내용을 시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

 

이 시선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이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시로 나타내지 않았나 싶은데...'단어를 찾아서'라는 시에서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15쪽)고 절규하고, '뜻밖의 만남'이라는 시에서는 '우리 인간들은 / 대화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84쪽)고 호소하기도 한다.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인간들, 그들은 결국 가식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미소'라는 시에서 '세상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 /거물급 정치가들은 늘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어야만 한다. /.. ./ 일상적인 슬픔을 얼굴에 맘 놓고 드러낼 수 있을 만큼 / 이 시대가 편안하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235-236쪽)라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만 보이는 시대, 속을 드러낼 수 없는 시대. 너무나 많은 가식들과 위선들이 판치는 시대. 이런 시대를 끝내야 한다. 이런 시대가 계속되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인류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간 전쟁이 20세기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겉모습만을 보이는 그런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 이런 모습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전쟁도 끝이 있다.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다. 이 시선집 제목이 [끝과 시작]이다. 이렇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끝을 보게 한 사람들이 비켜주면서 새로운 세대가 시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

 

'끝과 시작'이라는 시는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전히 끝을 보지 못했다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새로운 시작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시작을 위해, 몇몇은 끝에서 머무르지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함을, 그리고 자리를 비켜줘야 함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꼰대가 되지 않는 길... 바로 이 시에 나와 있다. 너무도 마음에 와 닿은 시다.

 

끝과 시작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 지나갈 수 있도록 /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 소파의 스프링과 / 깨진 유리 조각, /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 대들보를 운반하고, / 창에 유리를 끼우고, /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 모든 카메라는 이미 /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를 손에 든 누군가가 / 과거를 회상하면, /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 열심히 끄덕인다. / 어느 틈에 주변에는 /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 이 풀밭 위에서 /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년. 325-327쪽

 

이렇게 쉼보르스카 시를 읽으며 우리 현실을 끊임없이 소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시인들이 무엇을 노래해야 할지, 또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 우리도 전쟁의 끝을 볼 때가 되지 않았다. 끝에 다다렀으므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자꾸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쓰레기 더미로' 가져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쓰레기 더미마저 치워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 때, 우리가 '청소하고 잔해를 치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읽기 시작하면서 시집에서 손을 떼기 힘들었다. 그만큼 많은 시들이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번역의 힘인지.. 폴란드어를 알 수 없는 내게는 그래도 한글로 된 이 시선집을 읽으며 마음으로 느끼는 시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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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 인간의 운명에 도전한 최초의 영웅 어린이와 고전 1
오수연 지음, 조승연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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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신화라고 한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었던 민족들. 그들에게도 어찌 신화가 없었겠는가.

 

신화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최근에 강자로 떠오른 유럽 민족들 때문이겠지만, 역사로 따져보면 수메르 신화가 더 오래 되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점도 있고.

 

'길가메시'는 반인반신인 존재다. 반인반신이기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존재. 그러나 보통 인간에 비해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그는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무엇하나 그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으나 엔키두라는 호적수가 나타난다. 둘은 대결을 벌이지만 곧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엔키두와 함께 인간이 가 본적이 없은 곳까지 가서 삼나무 지기인 요정-거의 신적인 존재-을 물리치고 나무를 인간의 것으로 만든다.

 

그런 행위 때문에 그는 엔키두를 잃게 된다. 신들의 분노를 사서 둘 중 하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로 했는데, 엔키두가 선택된 것이다.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보면서 길가메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진다.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여행을 떠난다. 불사의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엔키두의 죽음 이전에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신적인 존재와 대결을 해 이름을 남기면 된다고, 이름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면 그뿐이라고 여기고 지냈다.

 

그러나 죽음을 목격한 이후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름이 아닌 자신 몸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되길 간절이 원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고 인간이지만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우트나피슈팀'을 만나게 된다.

 

죽지 않는 인간, 그에 대한 이야기에서 대홍수 이야기가 나오고, 신들의 분노 얘기가 나온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이야기,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비슷하다.

 

우트나피슈팀을 만나지만 불사의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다만 젊어지는 풀을 얻게 되지만 그것도 아차 하는 순간 뱀에게 빼앗기고 만다.

 

인간이다. 길가메시는. 비록 신의 피가 섞였다고 해도 그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길가메시. 죽음 앞에 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에 도달하기 전에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야 함을 길가메시는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죽어간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신에게 도전하지만 결국 죽음은 이기지 못하는, 어쩌면 유한하기 때문에 삶을 더욱 값지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이지 않을까 싶다.

 

엔키두를 등장시킨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엔키두가 없었다면 길가메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평생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삶. 그것보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사는 삶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신화라는 생각이 든다.

 

두려움을 이겨내며 사는 삶, 그것은 운명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운명을 내것으로 만드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런 삶을 길가메시 신화가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안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 책을 통해 길가메시에 대해서 알고 좀더 자세히, 깊게 읽고 싶은 사람은 다른 번역의 책을 찾아 읽으면 된다. 이 책은 수메르 신화에 접근하는 징검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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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천국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2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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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렀다. 천국에서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베아트리체다. 단테 하면 짝으로 연상되는 인물, 베아트리체... 구원의 여인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단테는 천국에 가서도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점점 다른 단계에 가서야 빛을 볼 수 있게 되지만, 신의 존재를 정면으로 보기 위해서는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천국편에는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책 중간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유명한 인물들을 이야기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

 

이름 없는 사람이 천국에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름이 있어야만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스베덴보리의 책에도 나오듯이 천국에는 어려서 죽은 아이들이 천국에 있다. 이들은 세상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삶을 산 사람들, 그 사람들 역시 천국에 있겠다. 중세 시대에 쓰인 이 책에 의하면 순수하게 살면서 종교적 삶을 영위한 사람들은 비록 아주 높은 단계의 천국은 아니지만 천국에 있을 수밖에 없다.

 

또 낮은 단계, 높은 단계라는 구분이 천국에서는 무의미하다. 모든 단계에 하느님의 빛이 비추기 때문이고, 이 빛은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만족하며 지내는 것, 이것이 천국의 삶이다.

 

천국에서는 다른 단계를 넘보지 않는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른 단계를 넘보는 것, 이미 시기, 질투라는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연옥 단계에 있는 것이지, 천국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마음이다.

 

천국도 9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지옥도 9단계로 나눈다고 보면 천국과 지옥이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중간 단계로 연옥이 있고.

 

하지만 천국은 단지 지옥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된 삶, 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 그리고 실천이 따라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하면서 최선의 삶을 사는 것,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 책의 천국편에서는 천국에 있는 존재들이 당시의 현실을 개탄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기독교 역사에서 1300년대가 되면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테가 이 작품을 통해 당시 부패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시작할 즈음에 지녔던 순수함, 열정 등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고 권력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종교가 서서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이럴 때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된다.

 

단테는 당시 종교가 초기 종교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가 천국에서 만나는 성인들은 단테가 살던 당시 종교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이 정도(正道) 벗어났다고. 그대로 가다간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그래서 단테를 통해 경고를 하고 있다.

 

지옥과 연옥, 천국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 그곳에 어떤 존재들이 있는지 알려줌으로써 더 이상 종교가 타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어쩌면 단테의 이 작품은 당시 권력자들이 싫어했을 수가 있겠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 이미 그 단초를 여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 특히 지도자라고 목회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단테 신곡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었다면 마음에 많이 걸렸을텐데... 이 작품이 단지 문학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종교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천국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단테를 통해서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여긴다면 말이다.

 

지옥에서부터 연옥을 거쳐 천국까지 이르는 여정을 통해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종교를 지니든 지니지 않든 잘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첨언하면 서양 문화, 역사, 인물 들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 있으면 더 재미있게, 더 깊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배경지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품. 이렇게 작품 속에 수많은 이야기, 역사, 문화가 녹아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고전이 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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