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3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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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형제3 - 자본 중국을 점령하다

 

2권까지 경쾌하게 읽혔던 소설이 3권에 와서는 무거워졌다. 그만큼 중국 현대사가 쉽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해학적인 면에서 풍자로 넘어가는데, 풍자는 사실 사회비판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돈때문에 사람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아무리 가벼운 표현으로 서술한다고 해도 읽는 사람 처지에서는 무겁기 그지 없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암담하기 때문이다.

 

돈을 번 이광두가 류진이라는 마을을 완전히 장악해 가는 과정이 2권이었다면, 이제 3권에서는 경기가 끝났다. 이광두의 장악은 완료되었으며, 사람들은 점차 돈의 노예가 되어 간다. 여기에 사회주의적 인간, 또는 보편적 인류애를 구현하는 인간은 없다.

 

두 형제 중 송강의 편에서 이 3권을 보면 송강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그는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작가가 그를 자살로 이끈 것은 당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현실이니까. 그는 죽어서 자신의 순수함을 지켰다고나 할까... 사실 자신의 아내 임홍을 위해 그 역시 자본주의의 한 쪽면을 담당하기도 했다. 돈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파는 행위.

 

하지만 오래 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순수한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본이 득세한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죽음과 함께 퇴장하는 송강.

 

그의 죽음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과연 얼마나 갈까?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자본의 맛을 본 사람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지금이 얼마나 편리한데 왜 불편한 과거로 돌아가려 하겠는가. 그러니 자본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송강의 아내 임홍 역시 마찬가지다. 순수했던, 사랑을 추구했던 여인이 육욕에 눈 뜨고, 자본의 맛을 알게 되니, 성을 상품으로 자신의 이윤을 불려가는 삶을 산다.

 

송강의 죽음으로 이제는 순수함이란 사라져 버린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3권은 자본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다. 현대판 불가사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 불가사리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돈에 얽매이지 않은 생활을 되살려야 한다. 공동체, 인류애, 상호부조 등등.

 

이것이 얼마나 먼 길인지 소설은 '그리고 남은 이야기'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래서 읽기에 불편하다. 해학은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유발해서 마음이 편해지는데, 풍자는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분노를 유발한다.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는가 하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두 형제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소설인데... 정치가 우세한 과거에서 경제가 우세한 현재로... 과연 어떤 삶이 행복한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마치 최인훈의 광장에서 '밀실과 광장'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성찰하게 했다면, 이 소설은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대체 정치와 경제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작가인 위화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두 시대가 만난 이후 태어난 소설이다. 앞부분은 유럽으로 치자면 중세에 해당하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이야기이고, 정신의 광기, 본능을 억압하는 처참한 운명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뒷부분은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날의 유럽보다 더한, 윤리가 전복되고 경박한 욕정을 추구하는 만물군상의 시대. 한 서양인이 사백 년을 살아야 경험할 수 있는 양극단의 시대를 한 중국인이 겪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사십 년. 사백 년간의 온갖 풍파와 천변만화가 이 사십 년에 농축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 두 시대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형제 두 사람이다. (314쪽)

 

이것이 어찌 중국에서만 일어난 일이겠는가. 우리나라도 중국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은 자본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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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0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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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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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2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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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2 - 개혁개방기 길이 달라지다

 

고아가 된 형제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 길이 달라지는 장면이 2권이다. 이광두와 송강 형제가 외모만큼이나 다른 성격을 지니고, 삶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지는 장면.

 

어쩌면 중국의 두 얼굴을 두 형제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친형제가 아닌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중국이 정치는 공산주의로, 경제는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방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함께 하지만 한 핏줄은 아닌 것, 그러므로 이들의 길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길이 달라졌지만 어렸을 때 겪었던 고통들로 인해 완전히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한 핏줄이 아닌 두 형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들 사이에 사랑이 개입한다. 임홍이라는 아름다운 여자. 두 형제의 관계를 파탄나게 하는 여자.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임홍.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여인을 두고 이광두는 적극적으로 구애활동을 한다. 하지만 이런 이광두에게 관심이 없는 임홍. 오히려 조용한 송강에게 마음을 주고.

 

송강은 이광두에 대한 형제애와 임홍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하지만 결국 임홍을 선택한다. 이광두와 이렇게 헤어지게 되는 송강.

 

이광두는 자신에게 돈을 버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사업을 벌이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성공할 수는 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빌린 돈을 몽땅 날려버리고 그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기도 하지만 고물장사로 그는 다시 일어난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이광두를 도와주는 송강. 하지만 송강은 임홍과 헤어질 수 없기에 더이상 이광두와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고물장사로 돈을 벌기 시작하는 이광두는 일본에 가서 옷을 구입해와 떼돈을 번다. 이 장면이 참으로 해학적이다. 중산복을 벗어던지고 양복으로 복장을 바꾸는 중국인들. 일본 중고 옷을 가지고도 그 옷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고 마치 자신들의 신분인양 으스대는 모습들. 일반 민중들만이 아니라 향장을 비롯한 관료들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니...

 

이광두에게는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는 양아치, 개망나니이긴 하지만 의리는 있다. 날려버린 마을 사람들의 돈을 빚이라 생각하고 돈을 벌자 이자까지 붙여 갚아주고, 그들에게 돈을 더 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또한 송강이 진실하게 살 것을 알고 그에게 자금 관리를 맡기고자 한다. 자본주의 삶에 완전히 녹아든 이광두의 모습. 그러나 형제를 잊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송강은 이를 거절한다. 그에게는 이제 이광두와 더이상 얽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내인 임홍이 싫어하기 때문. 또한 그는 자본주의적 사고보다는 공산주의적 사고에 더 익숙한 사람. 나라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서 착실히 살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형제의 길은 달라진다. 2권에서는 주로 이광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이 돈을 버는 과정은 우리나라 재벌의 탄생과 별다를 게 없다.

 

미약한 처지에서 시작하지만 권력과 유착하여, 그것도 외국의 물품을 싼 값에 사들여 비싼 값에 파는 유통을 통한 자본의 축적. 그 다음에는 생산으로 나아가는 것. 이광두 역시 고물 사업에서 다른 사업으로 확장한다.

 

자본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기 중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반면에 송강처럼 자본의 냄새를 맡지 않고 그날그날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생활의 차이가 결국 그들의 경제적 차이를 빚어내고 마는데...

 

중국에 2006년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스촨성에 갔었는데... 그때 중국은 우리나라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가 한 성에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논인데도 어떤 데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이나 소를 이용해 경작을 하고, 어떤 데서는 트렉터를 이용해 경작을 하는 등 엄청난 차이를 보였고, 낡아서 곧 쓰러질 것 같은 집과 으리으리하게 높은 아파트가 함께 있는 그런 사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이런 차이가 있나? 이것이 개혁개방의 결과구나 하는 생각.

 

이런 개혁개방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람들, 권력과 경제력이 어떻게 유착하는지, 부패해가는 관료들의 모습 등을 이 소설 2권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정치권력이 우세했던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것이 1권이라면 경제권력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는 개혁개방기를 다룬 것이 바로 2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3권은... 경제권력으로 완전히 넘어간 중국의 모습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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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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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1 - 문화대혁명기 고아가 되다

 

위화의 글은 읽기에 편하다. 간결하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문체가 편하게 읽게 만든다. 그는 비극을 다루면서도 비극에 온 마음이 빠져서 허우적대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이 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삶.

 

위화는 중국 현대사를 비켜가지 않는다.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럼에도 소설이라는 문학을 충분히 활용한다.

 

문화대혁명기때 중국인이 겪어야 했던 갈등, 혼란 등을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은 어떤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화의 수필이 중국에서 출간이 되지 않고 있지만, 이 소설 '형제'는 출간이 되었다고 한 글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무리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문학이기 때문에 허구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구는 곧 사실이 된다. 문학적 허구는 문학적 진실이고, 이는 우리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을 이제 막 1권을 읽어서 뒤의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1권은 문화대혁명기를 중심으로 그것이 사그러질 때까지 어머니인 이란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이광두. 그리고 그의 형제 송강. 왜 성이 다른 사람들이 형제일까 했더니 어머니 이란이 송범평과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송범평의 죽음과 어머니 이란의 죽음을 관통하는 문화대혁명이 1권의 배경이다.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죄인이 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처음에는 단죄하는 처지에 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장발 손위와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자행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 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과거를, 출신성분을 가지고 그를 죄인 취급하는 것이 혁명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질문을 하게 하는 1권이다.

 

교사로 동네에서 인정받고 착하게 살고 있던 송범평, 그는 어느 순간 죄인으로 전락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지주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런 연좌제... 과거의 끈을 벗어던져도 자신을 옭아매는 집안 내력.

 

그의 죽음은 충분히 비극적이다. 이런 비극을 겪는 두 아이, 이광두와 송강은 이 비극에 온몸이 젖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기 때문이다. 아버지 송범평이 잡혀가 온갖 고초를 겪게 되는 장면에서도 너무도 천진한 이들 형제의 말과 행동때문에 우리는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에 어머니는 그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어머니 이란 역시 오래 살지 못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 7년 뒤 어머니 이란 역시 아들 이광두의 앞날을 걱정하며 송강에게 이광두를 잘 보살피라고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동네 양아치인 이광두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하고, 이런 이광두를 한 살 많은 송강이 잘 돌봐주겠다고 이란의 무덤 앞에서 다짐하는 장면으로 1권은 끝난다.

 

그런데... 소설은 이미 늙은 이광두의 시점에서 시작하고 이다. 그리고 곧장, 한 쪽이 지나자마자 과거로 돌아가 버린다.

 

소설 처음에서 이광두가 억만장자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이제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다. 송강 마저 3년 전에 죽었다고 나오니.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줄 가족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이광두의 과거 이야기로 시작하고, 전개된다. 우리의 양아치 이광두가 어떻게 성인이 되어 억만장자가 되는지, 그것과 중국 현대사를 연결지으며 읽으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2권과 3권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중국의 모습, 그 속에서 적응해가는 이광두의 모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적절하게 극복했는지... 그들은 모두가 골고루 행복한 사회를 만들었는지 질문을 하면서 읽어야겠다. (위화가 쓴 머리말을 보면 이미 답은 정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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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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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은 충분히 된다고. 그렇게 우리네 삶은 모두들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격랑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은 소설보다도 더 진한 이야기를 살아온 사람들인데, 이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소설로, 영화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때로는 진한 슬픔을, 때로는 가벼운 웃음을, 때로는 쓴 웃음을 지닌 그런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는데...

 

김훈이 쓴 이 소설 역시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가족의 이야기다. 마동수-마차세 부자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일제시대에 태어나 박정희가 죽은 해에 죽은 마동수는 흥남철수 때 가족과 헤어진 이도순과 만나 마장세, 마차세를 낳는다. 그러나 마동수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평생을 떠도는데, 그래도 정기적으로 집에는 들어오지만 그가 정착했다고는 할 수 없다.

 

죽음의 순간에도 홀로 죽어가는 그는 평생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는 일제시대라 제 장소를 찾지 못했고, 해방이 되어서는 전쟁이다 뭐다 하여 다시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삶.

 

이도순 역시 마찬가지다. 피란민이라는 존재는 이미 밀려난 존재다. 이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지 못한다. 비록 남쪽에서 가정을 꾸렸을지라도 정신을 잃어가는 치매 상태에서 이도순은 피란 올 때 잃어버린 딸을 찾기만 한다.

 

죽을 때까지 살아온 남쪽이 이도순에게는 정착한 장소가 아니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할 공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래 살던 곳이 서울이었던 마동수가 일제시대와 전쟁을 통해 장소를 잃었다면, 이도순은 피란으로 장소를 잃었다.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던 곳, 그 공터에서 태어난 형제, 마장세-마차세. 이들 역시 부모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본디 가진 것이 없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큰아들 마장세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외국에 남아 산다. 그에게 한국은 '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동남아 역시 그가 머무를 장소는 되지 못한다.

 

그곳 역시 그에게는 '공터'에 불과하다. 잠시 머무는 곳.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귀향이다. 귀향이라고 해도 그는 역시 머무르지 않는다. 교도소가 평생을 사는 곳도 아니고, 이곳 역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공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래도 끊임없이 장소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이가 바로 둘째 아들 마차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에게 얽혀 있는 인연의 끈들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그렇다고 형처럼 그 끈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내가 되는 박상희와 첫딸인 '누니'다.

 

하얀 눈이 오는 날 태어났다고 해서 누니라고 붙인 이름.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세상의 때를 덮는 눈처럼 맑고 깨끗한 세상이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다. 마차세가 직업을 잃고 임시직으로 다시 배달일을 하는 데서 소설이 끝나는 것은 이들이 공터를 장소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제목은 '공터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때 공터는 바로 우리가 살아온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인 것이다. 이것이 장소가 아니고 공터인 것은, 우리 모두 이 공터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실상 우리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공터는 곧 빈곳이고 진공이다. 무엇이나 다 빨아들이는 진공, 그러나 진공은 다시 뱉어내야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도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우리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만에 불과하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그걸 모르고 자신이 그 공터의 주인인 양 행세했던 마차세의 친구이자 사장이었던 오장춘의 최후는 비참할 뿐이다. 역사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으니, 그는 죽음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공터에서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묶인 끈은 무엇보다도 질기다. 쉽게 끊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마장세가 그토록 부정하고 버리고 싶었지만 버리지 못했던 것, 마차세 역시 그 관계를 버릴 수가 없다.

 

공터가 이어주는 그런 관계들, 역사들... 그 속에서 조금씩의 변화는 일어나겠지만 공터가 없어지는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니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계속 힘들게 살 수밖에.

 

이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중들이 살아온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김훈은 그의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문체의 간결성, 전혀 끈적거림이 없는 그의 글들로 인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 그것도 현재진행형이 아닌 이미 끝난 과거의 일들을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전달해주는 느낌을 받게 하는 소설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거리를 두고 살필 수 있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인물들에게 감정이 들어설 수 없게 만들고 차분히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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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조네 사람들 김소진 문학전집 1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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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신경림의 시를 떠올렸다. '파장(罷場)'이라는 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 모두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 (신경림, '파장' 부분)

 

이 시에서 서울이 그리워지나라고 하여 지방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에서는 서울에 온 지방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소위 달동네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산다. 그것도 제 집이 아니라 장석조씨네 집에 세들어 사는 것이다.

 

'못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은 결코 못나지 않았다. 있는 사람들의 도덕 기준에 비추어보면 참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삶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규범에 충실한 척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가난한 사람들, 그럼에도 인간적인 정을 잃지는 않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 햇볕이 들까마는, 그들은 그래서 작은 햇볕이나마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김소진의 소설이 어두운 분위기를 많이 냈는데... 이 소설에서는 생활은 어렵지만 분위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도망갔던 아내가 돌아와도 그냥 함께 살고,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삶을 이어가고, 없는 재산을 노름으로 날려도 그냥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이들의 삶이 몸에 충실한 그런 삶이라면 조금 있는 것들은 이들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삶을 산다.

 

마지막 제목인 '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된 '장석조'씨가 얼마나 비열하게 돈을 긁어모으는지, 여자들을 후리는지 - 후린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에게는 도덕이 없다. 제 맘에 드는 여인을 돈으로든 무엇으로든 제 욕망을 채우고만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벌을 받지 않는다. 그게 우리 현실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는 사람들, 오히려 약한 사람들, 정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다친다.

 

'빵'에 그 점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에게 가장 맛있는 빵은 배부를 때, 편안할 때가 아닌 가장 힘들었을 때 먹은 빵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밀가루를 받으러 간 마당에서 다시 이런 '빵'을 먹는다.

 

못난 사람들,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그 장면에서 먹는 빵. 그 빵이 맛없을 리가 없다. 그렇게 소설은 지지리도 궁상을 떠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생활은 지지리 궁상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할 정도로 서로를 도우며, 흥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삶.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서민들의 모습을 김소진은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을 쫓아내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이들이 서로 웃으면서 지낼 수 있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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