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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평점 :
소설의 화자인 15세 알렉스는 일명 문제아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괴롭히고 해를 가한다.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안되기에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리고 일명 교화를 시도한다. 루도비코요법이라고 일컫는 세뇌교육을 통한 무조건 반사(?)적인 착한둥이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알렉스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로 복귀되면서 이 소설은 매듭이 지어진다. 스토리는 간략하게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만 소설 안에 담고 있는 작가의 고민, 생각들과 사회고발적인 내용들이 눈길을 끌었다.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114p)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의 선한 행위를 한 사람들 그들 역시 0% 악을 간직한 사람은 없다고 믿고 있다 (사실 이 생각은 나의 기독교적인 믿음이 바탕이다.) 많은 경우 인간은 순수한 마음으로 선한 행위에 가까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선한 마음만 간직하고 있지 않다. 위에 인용글처럼 앤서니 버지스의 질문과 고민이 매우 반갑다. 나의 생각의 어느 지점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정인이 사건을 생각해보자.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그 두부부의 마음은 악보다는 선에 가까웠을 것이다. 입양이라는 행위 자체는 충분히 선한 행위임에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입양 했다는 사실은 그 이후에 뒤따라오는 입양한 아이를 돌보는 양육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행위는 극악의 범주에 해당한다. 정인이 양부모의 이러한 모순된 행위를 앤더슨도 이 책에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없는 선한 마음으로 충분한가? 마음, 영혼없는 선한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행위와 마음의 우위를 가늠하기는 불가능하다. 선한 영향력의 방점은 영향력이 아니라, 선함에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선함은 행위 또는 행위에 따른 결과보다는 우리의 마음의 선함에 대해서 더욱 집중한다. 이는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하는 것은 선함 마음이다. 이는 기계적이고 일시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욕망, 이기심,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구..등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임을 인정할때 비로소 우리는 여전히 선함을 추구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낼 수 있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선하지 못함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을 경우, 선한 나, 그 자체로 무해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때 부터는 나로 비롯된 것들 (생각, 행동...등)은 잘못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판단되어지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