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말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자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이,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의문이 든다. 과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의 공감능력이 필요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고리들이 만들어져야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일까? 그것이 과연 가능은 한 일일까?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친아버지에게 초등학교 5학년부터 9년간 성폭력을 당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9년이라는 지옥같은 삶이, 그리고 김서영 작가의 삶을 흔들어버린 그 고통이 내가 고작 224쪽에 적혀 있는 기록을 읽고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 알았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김서영 작가도 그런 삶을 원망한다. 그리고 평범한 남들과 다르게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나도 생각해본다. 왜 나는 그것을 겪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찾기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실 그 이유를 알게 되든,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리라.
지하철 내에서 눈만 뻐끔거리며 읽어 내려가며 눈물이 마스크를 적셨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고통의 완전히 알 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어쩔 수없는 당연함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미안함도 부족하다. 김서영 작가의 삶 가운데 떠나지 않았던 고통과 눈물이빛을 만나면 반짝이다고, 그리고 향기나는 삶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녀의 말이 아프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고 나는 그녀의 고통을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2주전에 읽은 체호프의 [산딸기] 단편집에 나온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이 평안한 건 불행한 사람들이 말 없이 자기 짐을 지는 덕분이라는게 명백하니까요" 나의 행복이 불행한 사람의 덕이라면, 반대로 불행한 사람들이 계속 불행한 이유는 행복한 자들의 덕을 누리고 있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통의 이유를 모르더라도, 그리고 설명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지 않음이 남겨진 책임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모두 고통을 받는자, 앞으로 고통을 겪게 될 자, 그리고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