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살 차이나는 언니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자 엄마한테 나도 어디든 보내달라고 종일 졸라댔다. 심심해서가 아니다. 집에 있는 남동생이랑 놀면 되고, 지천에 널린 자연놀이가 많았기 때문에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못함이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시설에 등하교 하는 언니를 따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이는 5살 (만4살). 또래 아이들보다 몸집도 키도 작은 비실비실한 5살아이가 들어갈 만한 곳은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는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시달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한 태권도 학원의 원장님에게 특별 부탁해서 다닐 수 있게 해주셨다. 나 파란띠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ㅎ 여튼 그곳은 태권도를 추가로 가리치는 정도 뿐 취학 전 아이를 돌보는 일반 유치원과 비슷했기 때문에 모두 다 나이 많은 오빠 언니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때 소풍가서 찍은 단체 사진 속 나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냥 가장 쪼그만 꼬마. 바로 나였다.
등하교의 의식을 치르는 내가 뿌듯해서 좋긴 했는데, 문제는 친구가 없었다. 한두살 어린 동생을 친구로 대해주지 않은 무리속에 어느날 등하교길에 동행해주는 아이가 나타났다. 집이 서로 같은 방향이었던, 나보다 5살 많은 다운증후군 해근이.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덩치 큰 해근이가 나를 보호해주는 느낌도 있었지만, 오가는 길에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인생 첫 친구.
어느 날 밤, 엄마가 해근이가 죽었다고 했다. 가족들이 해근이를 집에 두고 잠깐 외출했는데, 그때 도둑이 들어와서 해근이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했다. 사라지는게 죽는것 같은데..해근이가 사라졌구나. 그렇게 첫 친구가 사라졌다. 해근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울었는지는에 대해선 기억이 없지만, 해근이가 떠오르거나 해근이와 비슷한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많이 슬퍼지고 그리고 운다. 그렇게 첫 죽음.상실에 대한 의식은 여전히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고통과 슬픔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다른 고통과 비교하면서 폄하하거나 억누르면 안됩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친구를, 동료를....잃은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마음 속에 남겨져 있는 상실의 아픔. 눈물을 어찌 다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을까?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들조차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상실한 자, 그리고 상실을 동반한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생이 우리에겐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