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자 폰 프레이타크 로링호벤을 기억하며
예전 막스 에른스트의 프로타쥬 기법의 엽서를 냉장고에 붙여놓은 적이 있었다. 남편은 도대체 이 요상한 그림이 뭐냐고 물었다. 어릴 적 동전 위에 얇은 종이를 얹고 연필로 문질렀던 거 기억나냐고, 그런 기법을 처음 만들고 그런 기법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더니, 막 웃는다. 무슨 애들도 아니고...... 그렇다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는 아이들 같기도 하다. 기존 세력에 반발하는데서 시작했기에 자유로웠고 아이같은지도 모른다.
세계대전은 악몽이고 지옥이었다. 시체들은 분해되고 제대로 치료하거나 묻힐 곳도 없었고, 수많은 화가들은 배에 짐짝처럼 실려 미국으로 피난을 떠났다. 헐값에 그림들은 팔리고 불 탔고, 생존앞에서 인간성과 존엄은 흐려졌다. 전쟁을 외쳤던 기성세대들은 그저 껍데기같은 말들로 선동이나 해대며 뒤에 숨은 탓에, 결국 총을 들고 나가 싸워 온전한 시체로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은 젊은이였다. 남아서 굶주림과 폭력으로 죽어가야 했다. 그들은 기성세대의 위선과 기만을 보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부정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조롱하고 조각들을 비웃었으며, 그들의 기법을 증오했다. 기성세대가 만든 식민주의와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하기 위해 선동한 민족주의 등에 조롱과 경멸을 보냈다.
그렇게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전쟁의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시작된 것이 다다이즘이라고 한다.
다다는 다양한 외국어로, 아이들이 타는 목마나 혹은 안녕, 네가 맞다 혹은 아이들의 의미없는 소리라고 하지만, 결국 다다란 하나의 반란이 되었다.
다다는 연극과 시 등 문학에서 시작되었다.
다다시를 쓰는 방법을 트리스탄 차르가 소개한 적이 있는데, 간단하다. 신문기사 속 단어들을 오리고, 주머니에 넣어 흔든 다음, 나온 순서대로 쓰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에서 누구나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우연성을 도입했다. 물감이 묻은 실을 떨어뜨려 작품을 만들고(뒤샹의 세 개의 표준 정지기란 작품) 장 아르프는 잡지등을 뜯어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대로 풀로 붙여 작품을 완성했다. 레디메이드(기성제품)란 재료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을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가가 누구인지 결과가 어떤지보단 행위가 중요한 것.
조각과 유화는 사라진다. 독자성도 사라진다. 조각은 오브제이며, 유화는 우연의 결과일뿐 (자신의 조각을 처음으로 오브제라 부른 것이 자코메티라고 한다.)
그러나 다다이즘은 부정하는 것, 없애는 것, 파괴하는 것이 본질이다. 이런 다다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것이 초현실주의라고 한다. 대부분의 다다이스트들은 앙드레 브르통이 주축이 된 초현실주의운동에 흡수된다.
초현실주의란 개념은 철학과 문학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다에서 시작되었기에 그들의 사상도 비슷했다. 전쟁이란 악몽으로 몰아넣은 기존세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반발과 혐오를 조롱으로 혹은 비웃음으로 맞섰고,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그림이 가지는 강렬함은 초현실주의에서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냈고, 시발점이었던 철학과 문학을 앞서게 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고, 화가들은 초현실주의란 이름으로 함께 모였다. 브르통의 독단이나 혹은 초현실주의 자체에 어떤 규정을 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며 탈퇴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현대미술에서 초현실주의가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브르통은 1차대전 중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며, 노이로제 환자 등이 끊임없이 의미없는 중얼거림을 하는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을 억압받지 않고 최대한 빨리 그리는 것이다.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것들을 그리고 쓰는 것이 개개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자유 드로잉,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등이 있다. 이런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경의와 놀라움을 선사한 작가는 조르조 데 키리코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초현실주의 화가도 아니라 했고, 초현실주의자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초현실주의 하면 떠오른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바로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와 오펜하임의 털 달린 잔, 그리고 뒤샹의 샘이란 제목의 변기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천재라 불리며 현대예술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되는 뒤샹, 레디메이드로 예술가가 만들거나 창조하지 않아도 의미를 부여함으로 예술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뒤샹이 누군가를 모방한 것이라면? 사실은 그가 레디메이드의 최초가 아니라면?
이 책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이다. 바로 뒤샹의 독일 지인이었던 다다이스트 “엘자 폰 프레이타크 로링호벤”이다. 그녀를 검색하면 거의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으로 길에서 주운 커다란 금속 고리에 비너스를 나타내는 여성의 상징이라며 “영원한 장신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그리고 싱크대 크랩 모양의 배관 부품을 “신”이란 이름으로 제목 붙여 전시했다.
자신을 다다 작품으로 삼아 각종 행위에술 등 다양하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면 얼굴에 소인이 찍힌 우표를 붙이고 머리를 박박 밀고 요오드를 발라 주홍색으로 만들었다. 엉덩이에 자전거 미등을 달았고, 석탄통을 쓰고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샘”
샘에는 R.무트라는 서명이 되어있는데 엘자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가난 이란 단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거기다 엘자는 무트라는 개를 키우고 있었다.
뒤샹은 자신의 누이에게 내 여자 친구 중 한명이 리처드 무트란 가명으로 소변기를 조각품으로 출품했다라고 쓴 편지도 있다. 물론 뒤샹이 샘이란 작품을 마치 여자친구가 보냈고, 그걸 전시하는 것으로 계획했단 설도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대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레디메이드는 결국 엘자란 독일인 여성 예술가가 만들어낸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잊히고 그 곳엔 뒤샹이란 이름만이 남은 걸까.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스 불을 켠 채 잠들었다가 사망했다. 엘자는 뒤샹을 열정적으로 따라다녔고, 그런 그녀가 뒤샹은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만큼 엘자의 자유분방함과 앞선 예술은 뒤샹에게도 버거운 면이 있었다.
레디메이드, 누가 먼저 했는지 뭐가 중요하나, 널리 알린 것이나 개념을 정리한 것은 뒤샹이지 않느냐고 한다. 그렇다면 왜 뒤샹의 이야기에 엘자는 등장하지 않는 걸까. 그렇게 레디메이드에 뒤샹의 역할이 컸다면, 엘자가 먼저 시작하고 “샘”이란 작품도 그녀의 아이디어라는 걸 밝혀도 상관없지 않은가. 왜 그는 자신의 출품작이란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을까.
그러니 레디메이드의 탄생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셈이다. 이 책을 쓴 작가인 데즈먼드 모리스는 레디메이드를 정립하고 영업한 것은 뒤샹이라고 말한다.
나라도 꼭 기억하고 누군가 뒤샹을 말하면, 엘자 폰 프레이타크 로링호벤의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레디메이드의 창시자이자 뒤샹에게 영감을 준 멋진 다다이스트 예술가로!
(파렴치하고 야비했던 여성에게 무자비했고 이기적이었던 뒤샹은, 돈이 부족하면 자신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비싼 값에 팔았고, 그 후로 부유한 과부를 만나 잘 먹고 잘 살았다.)
반대로 오펜하임의 작품과 관련해선 꼭 피카소가 등장한다. 오펜하임이 카페에서 피카소와 마르도라를 만난 자리였다. 그녀는 털가죽으로 덮힌 금속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걸 보고 피카소가 무엇이든 털가죽으로 덮을 수 있겠다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서 착안해서 오펜하임은 찻잔세트를 중국 가젤의 털가죽으로 덮었고, 오브제란 이름으로 전시했다.
뒤샹의 예로 들면 굳이 피카소의 이 한 마디가 이렇게 중요하고 세세하게 나올 필요가 있는가, 털 달린 찻잔을 만든 건 오펜하임인데 말이다.
아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