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밤이다. 연일 내린 함박눈으로 들판도 하얗고 산도 하얗고 더욱 긴 겨울밤도 하얗다.
"차가운 산속이라 시내 온통 얼음 눈뿐
곧 피어날 홍매 가지 그것만 걱정일세"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보낸 나이 마흔아홉의 어느날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심회를 읊은 시 중 한 대목이다. "취한 듯 술 깬 듯 반평생을 보내니/하늘 끝서 세월은 말 달리듯 빠른데/해마다 봄빛은 약속한 듯 오누나"로 시작하는 시다.
'감지坎止'라는 말이 있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물이 구덩이를 만나 멈춘다는 뜻이라고 한다. 흘러가던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 꼼짝없이 그 자리에 멈춘다. 가득 채워 넘쳐흐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강진 유배시기가 다산에게는 '감지坎止' 가 아니었을까. 다산은 그 시기를 마냥 앉아 있기만한 것이 아니다. 기약 없는 훗날이지만 스스로를 갈고 닦아 때를 기다렸다.
겨울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 보인다. 온통 얼음 눈 뿐인 때에 봄날 높은 가지에서 피어날 홍매를 떠올려 본다. 지금은 눈 속에 묻힌 내 뜰의 홍매도 긴 겨울이 있어 비로소 붉은 속내를 보일 수 있다.
긴 겨울밤의 한 때를 건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