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 기행 -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김봉규 글.사진 / 담앤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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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에 담긴 역사와 문화 만나기

얼마 전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을 방문했다. 필암서원은 사적 제242호로 1590(선조 23) 호남 유림들이 김인후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24년에 복원하였으며, 1662(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필암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이 필암서원에 확연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정면 3, 측면 3칸의 중층 팔작기와집이다. 그 현판 글씨 확연루(廓然樓) 편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다. 확연의 확자는 곽자로도 읽히는 글자로 필암서원의 확연루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원형백과 등에 곽연루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건물을 두고 표기가 이렇게 다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혼란스러움이 앞서지만 필암서원을 관리하는 문중도 지방자치단체도 국가기관도 이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화유적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태도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서 전국에 산재해 있는 궁궐, 고택, 사원, 사찰, 정자, 누각 등 우리 옛 현판에 관심을 갖고 현판이 가지는 역사, 문화적 의미를 밝히는데 주목한 사람이 있다.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의 저자로현판기행을 집필한 김봉규가 그다. 현판이라고 하면 그 건물의 얼굴이지만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현판은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큰 글자에다 그것도 나무에 세겨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 온 것이지만 현판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안타까운 우리의 실정에서 반가운 일이다.

 

저자 김봉규가 주목한 현판으로는 정자와 누각, 서원과 강당, 사찰로 구분하여 각기 걸린 현판을 찾아 현판과 글씨 그리고 건물이나 장소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밝히고 있다. 특히, 글씨를 쓴 사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글씨에 얽힌 에피소드와 함께 현판글씨에 더 친근하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 된다. 현판을 쓴 사람들로는 왕으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도 인정했던 김종호의 글씨까지 시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로 불러 온다. 글씨가 그냥 글씨가 아닌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표상이었으며 학문의 흐름과 서체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문화의 지표이기도 했던 점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부록에 담긴 서체 대한 정보는 이후 현판을 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현판이지만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나마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추사 글씨인 봉은사 판전板殿(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 현판과 명종 글씨인 영주소수서원紹修書院(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0)’ 현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유적을 대하는 우리의 현주소의 또 다른 현실임을 알게 한다.

 

현판은 글씨 자체가 가진 가치뿐 아니라 그 문구가 담고 있는 의미가 주는 가르침, 그 현판에 담긴 일화, 글씨를 쓴 서예가의 예술혼 등 유무형의 값진 유산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여행이나 나들이로 흔하게 방문하는 곳에서 만나는 역사적 공간의 얼굴과도 같은 현판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때 유적은 본래의 가치를 획득할 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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