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三十二花帖 제삼십이화첩
 
초목의 꽃, 공작새의 깃, 저녁 하늘의 노을, 아름다운 여인
 
이 네가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인데, 그 중에서도 꽃이 색깔로는 제일 다양하다. 미인을 그리는 경우 입술은 붉게, 눈동자는 검게, 두 볼은 발그레하게 그리고나면 그만이고, 저녁 노을을 그릴 때는 붉지도 푸르지도 않게 어둑어둑한 색을 엷게 칠하면 그만이며, 공작새의 깃을 그리는 것도 빛나는 금빛에다 초록색을 군데군데 찍어 놓으면 그뿐이다.
 
꽃을 그릴 적에는 몇가지 색을 써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김군金君이 그린 서른 두 폭의 꽃 그림은 초목의 꽃을 다 헤아린다면 천이나 백 가운데 한 둘 정도에 불과하지만 오색五色도 다 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작새의 깃ᆞ저녁노을ᆞ아름다운 여인의 빛깔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아하! 한 채 훌륭한 정자를 지어 미인을 들여앉히고 병에는 공작새 깃을 꽂고 정원에는 화초를 심어두고서, 난간에 기대어 저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꼬? 하나 미인은 쉬이 늙고 노을은 쉽게 사그라지니, 나는 김군에게서 이 화첩花帖을 빌려 근심을 잊으련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글이다.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로, 정조가 발탁한 네 명의 규장각 초대 검서관 중의 한 사람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군金君은 박제가의 '꽃에 미친 김군'에 나오는 김군과 동일인인 김덕형으로 본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물매화가 피었다. 봄을 대표하는 매화에 견주어 가을을 대표한 꽃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귀한 모습이다. 더욱 봄의 매화는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이 물매화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이 꽃을 만나면서부터 매년 때를 기다려 눈맞춤하고자 애를 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을 전하는 꽃의 표정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만 간다. 급기야는 뜰에 들여놓고 말았다.
 
외출하기 전 눈맞춤은 당연하고 돌아와 곁을 떠났던 짧은 시간 동안 변한 모습까지 놓치고 싶지않은 마음이다. 나이들어 무엇을 대하며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 꽃은 늘 깨어 있는 마음을 불어온다. 애써 찾아 꽃을 보는 이유 중 하나다.
 
꽃을 그린 김군이나 그 그림을 보고 심회를 글로 옮긴 유득공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오늘도 저물어가는 시간 이 꽃을 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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