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其所友 관기소우
觀其所爲友 관기소위우
亦觀其所不友 역관기소불우
吾之所以友也 오지소이우야

그가 누구를 벗하는지 살펴보고,
누구의 벗이 되는지 살펴보며,
또한 누구와 벗하지 않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내가 벗을 사귀는 방법이다.

*이 글은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이 중국에 들어가 사귄 세명의 벗인 엄성, 반정균, 육비와의 만남을 기록한 글 '회우록'을 지어 연암 박지원에게 부탁한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홍대용과 이 세사람의 우정은 당시 널리 알려진 것으로 대를 이어 이어지며 사람 사귐의 도리로 회자되었다.

한동안 자발적으로 사회적 격리를 택했다. 극히 제한적인 사람들만 만났고 무엇을 하든 혼자할 수 있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 시간이 편하고 좋았다. 큰 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이 벽에 틈을 내도록 한 것이 꽃이었다. 꽃을 보러다니다 보니 어느새 꽃같은 사람들 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흰머리가 늘어나면서 일상에 많은 이들이 꼭 필요한가라는 의문은 여전한 화두 중 하나다. 몸도 마음도 쇠락해지는 과정이니 많은 곳에 에너지를 쏟아부을 여력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집중해 스스로를 다독여야 할 때라는 것이 그 이유다.

벗의 사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좋은 벗에 집중하여 마음 나눔이 주는 위로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사귐에 신중할 수밖에 없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틈이 없다.

노각나무에 꽃이 피었다. 순한 색감, 곱고 단아한 모습에 필히 찾아보는 꽃이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주목받는 이유는 스스로가 갖춘 내면의 충만함에 있을 것이다. 매번 찾아 마음에 담는 나는 이 꽃을 '벗'으로 받아들였다.

담헌과 연암, 그 벗들의 사귐은 나의 오랜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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