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이 일어난 지 384년째 되는 해에 압록강 동쪽으로 1000여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나의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고 밀양이 본관이다. '대학大學'의 한 구절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을 취해 이름을 ‘제가齊家’라고 하였다. 또한 ‘초사楚辭’라고 부르는 '이소離騷'의 노래에 의탁하여 ‘초정楚亭’이라고 자호하였다.

그의 사람됨은 이러하다. 고고한 사람만을 가려 더욱 가까이 지내고 권세 있는 자를 보면 일부러 더 멀리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과 맞는 경우가 드물어 언제나 가난했다. 어려서는 문장가의 글을 배우더니 장성해서는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할 학문을 좋아하였다. 몇 달씩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고명한 일에만 마음을 두고 세상일에는 무심하였으며, 사물의 이치를 종합하여 깊고 아득한 세계에 침잠하였다. 100세대 이전의 사람에게나 흉금을 털어놓았고 만 리 밖 먼 땅에 가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구름과 안개의 기이한 자태를 관찰하고 온갖 새의 신기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득히 먼 산, 해와 달과 별자리, 작은 풀과 나무, 벌레와 물고기, 서리와 이슬, 날마다 변화하지만 정작 왜 그러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들의 이치를 마음속에서 깨달으니, 말로는 그 실상을 다 표현할 수가 없고 입으로는 그 맛을 충분히 담아낼 수가 없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저 혼자만 알 뿐 다른 사람들은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고 여겼다.

아아! 몸만 남기고 가버리는 것은 정신이요, 뼈는 썩어도 남는 것은 마음이다. 이 말의 뜻을 아는 자는 생사와 성명의 밖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

*북학파 학자로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27세 때 쓴 글 '소전小傳'의 내용을 옮겨왔다. 스스로를 설명하는 내용에 공감하며 호응하듯 읽는다. 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삶에서 보이는 외로움과 자부심으로 이해한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돌이 되었다. 바닷물에 씻긴틈에 다시 흙이 채워지고 용케도 뿌리를 내려 꽃까지 피웠다. 이 경이로움을 박제가의 삶에서도 느낀다. 빈 손으로 세상 나들이 왔다가 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질 생명으로 본다면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

"몸만 남기고 가버리는 것은 정신이요, 뼈는 썩어도 남는 것은 마음이다." 알아줄이 없다한들 무엇이 아쉬울까. 세상 나들이 제 뜻대로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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