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보서百花譜序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구성되어,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의미가 된다. 벽이 편벽된 병을 뜻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전문기예를 익히는 것은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김군이 화원을 만들었다. 김군은 꽃을 주시한 채 하루 종일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다. 꽃 아래에 자리를 마련하여 누운 채 꼼짝도 않고, 손님이 와도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런 김군을 보고 미친 놈 아니면 멍청이라고 생각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웃음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만 남기고 생기가 싹 가시게 되리라.

*북학의를 쓴 초정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쓴 백화보서百花譜序의 일부다. 독특한 시각에서 남과는 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것이 글쓴이의 심성을 짐작케 한다. '꽃에 미친 김군' 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군은 규장각 서리를 지낸 김덕형으로 본다.

무려 다섯 번의 청을 넣었다. 지난해 초겨울 우연히 방문한 산골에서 물매화 핀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해를 기약했다. 꽃피면 소식 달라고 했으나 마음이 급한 건 언제나 청을 넣은 사람 쪽이다. 가을이 되어서도 오지 않은 꽃피었다는 소식은 몸도 마음도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급기야는 일방적으로 일시를 통보하고서야 청에 대한 답이 왔다.

억지 청을 넣었다는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소 만한 등치에 커다란 눈의 순박하기 그지없는 안내자를 반가움으로 만났다. 머쓱한 속내를 드러내니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는 미소로 반기는 그를 따라 나섰다.

무리지어 핀 물매화를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마음은 앞서나 몸은 한발짝 물러선다.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햇빛 들어오는 방향과 자생지의 모습, 꽃봉우리 맺힌것 활짝 핀 것 등 군락지의 전체 판세를 파악해야하기 때문이다. 멀리서 가까이서 윗쪽 아래쪽 살피다가 가까이 있는 꽃부터 눈맞춤을 사작한다. 무리지어 또는 홀로 핀 개체들이 충분히 눈에 익을 무렵에서야 손에 들었던 카메라의 전원을 켠다.

그렇게 보던 꽃을 올해는 청을 넣지 않고 조용히 혼자서 다녀왔다. 산중의 요란한 불청객에 대한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서지만 느긋하게 온전히 즐길 마음이 더 컷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될 것이다.

박제가의 '백화보서百花譜序'에 등장하는 '꽃에 미친 김군'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 마음만은 넘치고도 남을 것이다. 하여, 여러 사람들이 벽癖이 있다 눈치할지라도 기꺼이 감당할 마음이다.

책 속에만 나오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제법 많다. 이른 봄 매화 피는 섬진강가, 찬바람 부는 눈쌓인 계곡을 함께 걸으며 시작하는 꽃놀이도 어느덧 마감하는 때가 왔다. 지나온 1년을 돌아보며 다시 만날 이른 봄을 기다린다.

옛사람의 글에서 꽃보는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 꽃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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