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난설헌, 허초희(1563~1589)의 시 '연밥 따기 노래' 전문이다. 풀꽃시인 나태주의 편역으로 발간된 시집을 만났다. "시문의 영원함이여. 영광이여. 난설헌, 시인은 죽었어도 여전히 오늘에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난설헌에 대한 나태주 시인의 시각이 그대로 나타난 문장에 멈춘다.
여인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긴 시에서 연꽃 피어나듯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반나절 부끄러웠다는 그 마음에 깃들어 있는 연꽃향기를 무엇으로 다 짐작할 수 있을까? 읽고 또 읽으며 반복한다.
익히 알다시피 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다. 스물일곱 송이 꽃이 책 다 피기도 전에 지고만 안타까움을 뒤로하고라도 그 삶을 반영하듯 애달프기 그지없는 시를 온전히 읽어낼 모진 마음이 서질 않는다. 시마다 맺힌 아픔이 읽는 이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힘을 거스를 수 없기에 한 편의 시조차 온전히 읽어낼 힘이 없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여인이 감당해야할 몫이 얼마나 큰 무게로 다가왔을지 상상을 불허한다. 겨우 시에서 풍기는 느낌으로 짐작할 뿐이다.
남편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던 부인,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 시대를 앞서간 여인의 삶을 각기 다른 영역으로 분리할 수 없듯이 난설헌의 시에 담긴 감정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극한 슬픔이 한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만큼 큰 무게로 안겨왔으면 이토록 진한 슬픔으로 넘칠까.
페이지마다 흘러넘치는 애달픔을 만회하려는지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림으로 치장된 책은 그것으로 인해 더 큰 슬픔을 불러온다. 과유불급일까. 화려함의 극치가 지나쳐 시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림만 보면 나무랄데 없는 작품이나 왠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태주 시인의 감성이 난설헌의 마음과 만나 훨씬 깊고 풍부한 슬픔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50여 편의 시 하나하나가 모두 절창이다. 그 중심에 한과 슬픔을 폭로하는 감정의 극한을 표출한 것은 난설헌의 시가 갖는 특정인지 편역자의 적극적인 개입인지 의문이다. 쉬이 넘길 수 없는 페이지를 붙잡고 오랫동안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