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은희경 소설을 제대로 이해했던가 ? 하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20대의 나는 은희경 소설을 좋아했다. 날선듯한 이야기와 문장 ,단어, 그리고 덤덤한 감정, 그리고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때까지의 삶은 항상 억울한 ,분노, 부정이라는 온갖 감정적인 부분만 표출되던 시기여서 더욱더 아름다운 언어보다는 읽으면서 같은 감정이라고 느끼는 소설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렇게 그의 소설을 이해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작가가 진정으로 이야기하려는 것보다는 , 내감정에 치중해서 잘못 받아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삶이 조금더 편안해지면서 , 웬지 슬프고 아픈 이야기들은 읽기 싫었던 것 같다.
이제 40대가 되어서 다시 읽는 은희경의 소설은 어려우면서도 낯설지 않다.
아픈데 너무 아프지 않다. 이야기들이 이해가 되면서 또는 이해가 안되는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생긴다.
아름답고 , 낯설고, 허망하다.
초기 은희경의 소설들은 면도칼 같아서 읽는 중에 여러번 당신을 긋고 지나갔다.
그것은 기꺼이 즐길 만한 통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소설은 칼이 아닌 척하는 칼이어서 당신이 베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깊이 베이게 된다.
쉽게 알아보기 힘든 어떤 힘이 밀고 들어와 , 조용히 빠져 나가고,
마침내 피 흐를때, 비로소 그것이 칼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묵직한 통증의 미학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이 소설의 장르는 그래서 그냥 "은희경"이다.
2006년-2007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작품 6가지가 실려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거대한 고독,인간의 지도 "라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고 평했다.
삶의 고독과 허망함을 다룬 이야기는 십몇년이 지나 현재에도 똑같이 통하는 이야기이다.
환경이 달라지고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허무함 , 그리고 인간사에서 겪는 고통은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책의 여섯 단편들도 평범해 보이지만 그안에 담긴 각자의 고통과 고독을 써내려가는 듯하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 에서는 어릴적 아버지와 같이 간 식당에서 본 비너스 그림으로 시작된다.
같이 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 그리고 자신의 못남으로 인해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아닌 뚱뚱한 비너스 같은 몸매에 대한 수치심 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 앞에 다이어트가 성공하면 가려고 했던 후회등을 통해서 존재에 대한 강박을 이야기한다.
날씨와 생활 )에서는 소년소녀 명작동화를 좋아하는 소년의 몽상을 망치는 책 수금원의 등장, 그리고 그 수금원을 따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소년의 노력, 그리고 이어지는 결말. 유머스러운듯 하면서도 그안에 담긴 생활의 처절함이 내 이야기 같아 안쓰럽다. 어린시절의 가난이 추억이 아닌 무서운 생계일때 느껴지는 두려움을 제대로 표현한것 같다.
그외 지도의 중독)에서 여행을 싫어하는 나가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떠난 여행에서 만난 선배, 그 선배가 지도에 집착하는 이야기 속에서 , 인간사에서 어느 하나에 집착하는 일상을 보여주면서 ,모두다 나는 달라하고 생각하지만, 그 선배처럼 어떤 의미없는 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
나머지 세편의 단편들 모두도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이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그리고 시스템속에서 변해가는 나, 그리고 변하지 않는 나에 대한 그런 이야기이다.
변하는것이 맞는지 , 안변한는것이 맞는지,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와 후회 ,추억 그리고 고독과 허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읽을 때는 모르겠는데 읽고나면 슬프다.
슬퍼서 아프고 , 아파서 슬픈 뜻모를 이장르는 그래서 은희경인 것 같다.
아파도 읽어야 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은희경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읽기 시작한다. 20대에는 아파서 읽었고 30대는 행복해지려고 안읽었지만 40대에는 읽어서 안 슬프거나 읽었다고 불행하지는 않을 그저 그런 나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은희경 장르에 맞설 용기가 조금 생겼기도 하다.
김중혁 소설가의 추천사의 말처럼 흑백 풍경의 섬뜩함을 약간은 받아들일 마음의 담력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흑백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알것 이다.
흑백의 피가 더 섬뜩해 보이고, 흑백의 풍경에서 더 무궁무진한 색감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
아마도 나는 예전의 컬렉션보다 새로운 은희경 브랜드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옷은 조금 불편할지 모르지만,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더 잘 깨달을 수 있고,
불편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봄눈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처음 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때늦은 봄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카펫이 깔린 이태리 식당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곳이 내가 알던 곳과는 다른 세계임을 알았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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