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독서의 힘 - 토론을 위한 논제 만들기
김민영 외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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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란 자기 정체성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한 생각을 담는 나만의 그릇이다.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듯 질문도 제각각이다. 질문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살아온 시간과 사는 모습이보인다. 질문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대개 주목받기를 두려워한다.
인정 욕구와 정답 강박증으로 인해 질문의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자기 생각도 희미해진다.
강의 후 공개 질문하는 사람은 적지만, 조용히 앞으로 나와 물어보는 이는 있다. 줄까지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도 개인적으로 묻는다. 이렇게 좋은 질문을 왜 이제야 하느냐고 물으면, 별것 아닌 질문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그랬다고 한다. 어느새 질문은 민폐의 상징이 되었다. - P5

책 한 권은 커다란 물음표다. 다수가 "그렇다"고 한 생각에 관해
"전 아닌데요" 라고 표현한 작가만의 깃발이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나지 못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표현하는 힘이 세질 수 없다. 질문은만난 독자는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쓰여 있네‘ 라며밑줄을 치거나 페이지 귀퉁이를 접는다. 또는 마음에 고이 새긴다.
작가의 세계에 빠져들며 몰입한다. 거대한 물음표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는 일, 바로 독서다. 자신이 궁금해했던 것, 관심사, 고민을자세히 들여다보고 재발견하는 자기 탐색의 과정인 셈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물음표 만들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책에 흠뻑 빠지거나, 취하거나 동경할 뿐 자기 생각이나 질문은 풀어내지 못한다. 감탄과 동경에 길들여져서 그렇다. 이들 대부분은 책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나만의 시각으로 정리하고 확장시키는질문 만들기 경험이 부족하다. 독서 모임에서 ‘기억에 남는 밑줄‘을소개하는 것만으로도 긴장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런 부분을 좋다.
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라며 얼굴을 붉힌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자기 검열을 하는 태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나라는 존재를표현하는 힘이 세질 수 없다 .자기를 표현하는 힘이다 힘은 금세 키워지지 않는다 . 근육 운동처럼 조금씩 증량한다. 작은 질문을 자주 해본 사람이 큰 질문도 할 수 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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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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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언제까지나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 소설은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그날 저녁 식사 내내 아주머니는 그녀를 ‘도시 처녀’라고 불렀다. "우리 집 음식이 도시 처녀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라든가아니면 "도시 처녀들은 식사가 끝난 뒤에는, 그 뭐라더라? 그래,
디저트를 먹지?" 라는 식으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는 그런 말을 하던 아주머니의 표정이나 말투에 유별난 점이 있었는지, 어떤 기미 막연한 적개심 같은 것이 있었는지 되짚어본 적이있었다. 그런 게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숨기려고 갖은 애를 써도 어쩔 수 없이 불쑥불쑥 삐져나오던 어떤 감정들이. 그리고그녀는 그런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혹은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자신을 타일렀거나. 어쨌든 당시 그녀는 자신에게 약간이나마 피해망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 집에 오기 전까지는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날 그녀는 그 애와 함께 식탁에 앉아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었고, 같이 거실에 앉아서 TV를 보았다. 그러다가그 애가 피아노를 보더니 자기도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말했다. 그녀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주었고, 그 애는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단한 곡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했다. 충분히 잘했다. 한 음도 틀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단발머리 음악 선생은 그 애의 손등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애에게는 굴욕적인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아주머니가 식당 문 옆에 붙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박수를 쳤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 사실을할머니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나? 어떤 조치가있었나? 그런 건 없었다. 왜 조치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에 대해 할머니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피는 못 속인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감은 눈 앞에 광선들이 떠올랐고 그 빛의 무리는 휘어지다가 흘러내리다가 점점이 흩어져갔다. 뱃속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이치는 것 같았고,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하고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녀는화재 현장을 실제로 접한 건 처음이었고, 불에 타는 소리가래 이렇게 요란한 건지 어쩐 건지 알지 못했다. 불길하게, 끊없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소리. 마음속의 무언가가 계속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볼 때가 있었다. 그녀는 그런 연그락거리며 운동하게 만드는 소리. 침묵에 잠겨 있던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뿐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건 마치 마지막 포효 같았다. 그녀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아주머니의 눈,
아주머니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단 하나도 빼먹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는 아주머니의 열망이 느껴졌다. 환희와 승리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걸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서히 아주머니의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주머니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나달나달해지고 휘어지고 흘러내리는 중이라는사실을 알 것 같았다.
"아, 세상에."
아주머니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서 울기 시작했다. 그때 왜 그 말이 떠올랐을까? "하얀색 두건은 일할 때만하고 있는 거야. 그 정도의 품위는 우리도 지킬 줄 알았단다."
어릴 적 어머니와 방직공장을 지나가다 보면 기다란 굴뚝과 거 - P153

그녀의 테라피스트는 그녀가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방잘못되었다고,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지만 그걸 누가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불길에 휩)여서 온몸으로 소리를 지르며 몰락해가는 그녀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끼는 아주머니의는물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마음속의 어떤 길을 따라건지, 그 길로 통행 허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눈물범벅이 된 아주머니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얘, 난 너를 좋아한 적이 없어. 지금도 너를 증오하고 앞으로
도 너를 증오할 거란다. 나는 앞으로 누군가를 절대로 사랑하지않을 거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집에 살았던사람들 중 아주머니가 증오하지 않아도 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녀는 한쪽 손으로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검은 눈물을닦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아주머니는 또다시 코를 한 번 훌쩍이며 말했다.

"얘, 넌 쓸쓸하게 늙어 죽을 거다."
그녀는 흩뿌려지듯 연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재들-마치 눈송이처럼 보이는 이 종국에는 지상으로 끊임없이 하강하는 걸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낡은 대청마루에 앉은 할머니는 그걸 그냥 바라보며 웃고 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아이고, 저러면 빨래가 마르지 않을 텐데."
"너무 착했던 사람." 어머니는 지금도 할머니에 대해 그렇게말을 한다. 더 이상의 덧붙이는 말은 없지만 나는 그 표현 속에 할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원망이 부드럽게 녹아 있다는것을 안다. 부드러운 원망, 혹은 갈 곳을 잃은 원망. 어쩌면이 소설은 갈 곳을 잃은 원망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족을 덧붙이자면(사족인 줄 알면서도 덧붙이고야 마는 소설가의 실수!) 사실 나는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작가 노트를 쓰려고 했다. "모든 사람은 결국은 할머니가 된다, 라고 썼다가지운다. 모든 사람이 할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하지만어쩌면 그게 바로 내가 이 소설을 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생각이 든다. 얼토당토않은 문장이라는 걸 알지만 어쩐지나는 이 문장들이 마음에 들었기에 이 또한 여기에 남겨둔다. - P157

작가 노트

이 소설에는 내가 지난 1년 동안 써온 여러 가지 작품의 모티프들이 뒤섞여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작년 여름에 썼던 짧은 소설 「크리스마스이브」(원래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라는랫줄에 걸린 옷에 계속 물을 뿌리고 있다. 왜냐하면 빨래에제목으로 발표되었지만, 『맨해튼의 반딧불이』에 실을 때 제목을바꾸었다)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머니를 떠나 할머니 집에 머물게 되는 어린 소녀 이 모티프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그 후로 다른 소설들을 쓸 때도 나는 계속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

할머니 집에 머무는 소녀, 라는 이 이미지는 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아닌가, 굉장히 틀린 말이 되는 건가? 모르겠다. 어차피 소설이라는 게 쓰는 사람의 경험(그러니까 진짜로 경험한 것 말이다)을 뭐 얼마나 곧이곧대로 담고 있겠는가?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가 할머니 집에 머물렀던 기간은 그리 길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 시간을 내가 무척 좋아했다는 점이다.

여름, 여섯 살이었던 나는 노란색 끈 원피스를 입고 마당 빨래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계속해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 P156

이 며칠이나 됐냐고 규옥이 묻자 하은이 말했다. 월요일이 빼빼로 데이니까 오늘은 9일이라고. 셋은 토요일에 예산으로 갔다.
생각해보면 1박 2일간의 짧은 출타였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은형은 돌아와 오랫동안 그때의 예산행을 생각했다.
기해년의 빼빼로 데이였다. 빼빼로 데이라는 말이 나온 건 하은에게서였다. 서해안고속도로의 어딘가를 지날 때였다. 오늘손에 있는 세균이 죽는다고 말한 건 규옥이었을 것이다. 규옥과기해년이 다 가고 나서도 기해년의 빼빼로 데이 무렵을 자주 떠올렸다.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규옥과 하은은 귤을 까먹었다. 운전석 쪽으로도 자꾸 먹을 게 넘어왔다. 은형은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는 그들이 건네는 걸 받아먹으면서막혔다 뚫렸다 하는 고속도로를 멍하니 운전했다. 손뼉을 치면

아다를 놀러 가도 신이 나고, 뭘 먹어도 맛있고, 딱 좋을 때야."
은형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은형은 걸음을 늦췄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잠깐잊고 있었던 것이다. 규옥과 자신 사이엔 어떻게 해도 좁힐 수
"지금 같은 세상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재미난 게 많니. 좋은 게 좀 많아."
없는 거리가 있다는 걸.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도 당신에겐 온전한 이해도 지지도 받지 못할 거라고, 은형은 그렇게 생각한 시간이 길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여전히.
는 신기

작가 노트소설을 쓰는 동안 일운스님의 사찰 음식 책을 자주 펼쳐 보았습니다. 무를 많이 먹으면 속병이 없다는 말이나 초겨울미역이 다르고 늦봄의 미역이 다르다는 말을 읽으면 그날은왠지 글이 잘 써졌습니다. 묵에 쌀가루를 묻혀 들기름에 구워 먹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스님들은 외출을 할때 살짝 적신 누룽지를 식사로 대신하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엄마 둘에 딸 둘인 세 명의 여자가 초겨울에, 초겨울 음식이 있는 곳으로 하룻밤쯤 다녀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은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 오늘날에 도달했을 뿐이다. 가끔씩 민아는 자신의 20대를 떠올려본다. 그때봤던 소설들, 영화들, 드라마에 나왔던 생기발랄한 주인공들과나이가 같았을 때. 그땐 누가 봐도 민아가, 민아의 세대가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오늘의 다음 날은 두근거리는 미지의 내일이었다. 노년은 하물며 떠올려볼 수조차 없었다. 기껏해이 민아가그릴 수 있는 먼 미래는 적당한 소음이 들려오는 평화로운 해변을 닮아 있었다. 그 안에서 민아는 젊음의 생기는 사라졌으나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누군가와 주름진 손을 다정히 맞잡은채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오늘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것이어야 했다. - P199

어느새 들어버린 나이처럼 삶보풀이 잔뜩 인 슬리퍼가 바닥을 느릿느릿 스친다. 민아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속도가 더 줄어들지는 않는다.

식사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밥을 먹지 못한다. 그것이 민아가 살고 있는 유닛D의 원칙이다. 유닛 A, B, C와 마찬가지로 유닛 D 또한 각 지역에 골고루 존재한다.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대사회에서 유닛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민아가 머무는 유닛 D의 정식 명칭은 ‘아리아드네 정원‘ 이다. 각각의 유닛엔 다채로운 이름들이 있고 그 누구도 유닛을 대놓고 A, B, C,D로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예전 임대 아파트들의 이름이그랬듯, 아리아드네 정원은 명칭을 듣는 순간 D 등급으로 각인되는 곳이다. 한때 민아는 결혼 시장에서 꼽는 최상위 회원 등급에 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최하위인 F 등급보다 겨우 한 등급의 지표와 등급도 숱한 날들을 거쳐 그렇게 되었다. - P201

정책이 국가의 경제를 떠받치는 큰 축을 남겨두기 위해서라는이디린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1인 가구의 안락사 절차는 까다.
고 체제가 보존된다. 죽음은 경제다. 이대로라면 민아는 머지않아 최하 계층의 보호시설인 유닛 F로 흘러들어 갈지도 모른다.
롭기 짝이 없다. 개인의 죽음이 치밀하게 기획된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그러니까 행정 비용과 증빙 가족이 없는 1인 가구는 MO라는인도적인 죽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전통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전통적인 죽음이지. 유닛 F에 수용되어 육체의 소멸을 하루하루 목도하며 추악하게 꺼져가는 원시적인 죽음이다. 그런 죽음이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건 현대사회에서 전혀 위안거리가 될 수 없다.
사실 민아는 정부가 1인 가구의 MO에 강력한 규제를 두는걸 안다. 죽지 않는 노인들이 버티고 있어야 유닛들이 돌아가

예를 들고, 타 민족의 성향을 언급하며 모두가 강하게 부정하고반대했다. 그런 의견의 표명이 현실을 막아줄 거라 생각하면서.
어쨌든, 대부분의 현재가 그렇듯 그 또한 오래된 과거일 뿐이다.
언제쯤이었던가. 민아의 눈썹 위로 흰머리가 위협적으로 돋아날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저출산 문제는 더 이상 자국민만으로는 해결할 수도 없고 방치해서도 안 되는 상태에 놓이게 됐고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국민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위협적인 낙폭의 출산율이 가져올 재앙을 막기 위해 이민자 수용 정책을 펼쳤다. 각국의 이민자가 물밀듯이 유입됐고, 채 적응하거나 구체적인 사회적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남북 간 개방이 이루어졌다. 전에 없던 혼돈이 작은 나라를강타했다. 단일성이 지배했던 유구한 문화가 순식간에 다양한인종과 계층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뒤바뀌었다. 이 나라가 늘 그랬듯 모든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직 젊었던 때, 이런 내용의 글을 신문 기사로 봤다면 어땠을까. 비웃거나, 설마설마하거나, 10초쯤 걱정하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고, 그 시점에서 돌아보는 과거는 아둔하고 순진해 보일 뿐이다.

작가 노트

미래는 순식간에 다가와 현재를 점령한다.

늘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휘어지도록 웃을 때 나는 소리. 어린 내가 알고 있던 예쁜 단어들이 그 이름에 달라붙어 있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자란 시간은 이후 비슷한 몸집과 나이대의여성들이 유독 눈에 잘 들어오도록 이끌었다. 숲 냄새를 풍기며,
지하철역 안에 웅크리고 앉아 칡을 팔거나 다리를 절뚝이며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들. 그 모습이 잊고 있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고, 그 기억으로 다시 거리의 할머니들을발견하면서 나는 나이 들어갔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할머니, 하고 부르면 돌아봐야할 때도 올 것이다. 어린아이였을 때 가지게 된 기억으로, 아직은 젊은 사람의 시선으로, 또 나이 든 여자가 되어, 할머니‘가등장하는 여섯 편의 이야기를 읽어본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만났으며 어떤 사이였는지, 또한 아직 생존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것이다. 우리의 눈에 할머니라는 존재가 이전보다 선명하게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직은 아니지만, 동시에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잘 모르는 여자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여자와 결국내가 되고 말 여자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만났던 여자아이들 1980년 이후에 태어났음에도 여전히 ‘여자 희(姬)‘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고 그 앞에 누를 진(鎭)이나
‘마지막 종(終)‘ 같은 한자를 쓰던 친구들을 통해 새와 종, 신나는 웃음소리를 연상케 하던 이름이 고작 남아 선호 사상의 반영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좌충우돌하며 성장하는 어린 여성들, 연대의 힘을 깨닫고 용감해진 성숙한 여성들, 여기에 나이 든 여성들을 함께 놓을 수있을까? 틀림없이 우리 곁에 있어왔지만 정확하게 응시된 적은없었던 여성들 말이다. 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과거와의 연결이면서 우리의 미래를 알아차리는 과정이 되기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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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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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베개를 베다』, 중편소설 『첫 문장』, 장편소설구경꾼들』, 『상냥한 사람』 등이 있다.


백수린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오늘 밤은사라지지 말아요』,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등이 있다.

강화길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괜찮은 사람』, 장편소설 『다른 사람』 등이 있다.

손보미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중편소설 『우연의 신』,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등이 있다.

최은미2008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단편소설 「울고 간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중편소설 『어제는 봄』,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등이 있다.

손원평2016년 장편소설 『아몬드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여 등단했다. 장편소설 『서른의 반격』 등이 있다.

간밤에 남편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남편의제사상을 차리지 않기로 했다. 제사 전날 밤이면 남편은 항상나를 찾아왔다. 지난 10년 동안 그랬다. 꿈은 늘 똑같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나 왔어. 배고파." 나는냉장고를 뒤져 뚝딱 저녁상을 차렸고, 남편은 강된장에 밥을 비벼 먹었다. 참 달게도 먹어서 꿈을 꾸고 나면 제사 음식을 정성껏 만들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남편이 먹은 강된장은 남편이죽던 날 아침에 먹은 음식이었다. 그날 남편은 늘 그렇듯 아침밥을 먹으며 아들의 욕을 했다. 한심한 놈이라고. 그러고는 내게강된장이 너무 달다고 했다. "청양고추 좀 넣어봐." 남편이 말했다. 나는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아들은 한심 - P9

작가 노트


할머니는 화투점을 자주 봤다. 아침에 학교 가는 나에게 좋은 소식이 온다거나 산보를 갈 일이 생긴다거나 하는 말을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열두 장 화투 패의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괘는 5월 창포와12월 비가 함께 나오는 패였다. 비가 오고 국수를 먹는다. 일요일에는 나도 가끔 화투점을 보곤 했다. 할머니가 한 번, 내가 한 번, 그러고 나서 우리 둘은 민화투를 쳤다. 방학 때는더 자주 쳤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식물도감을 사서 봄에 피는 들꽃의 이름을 외웠다. 훗날 조카들이랑 산책을 하게 되면 척척박사처럼 들꽃 이름을 말해주는 고모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카랑 산책할 일은 거의 없었고 들꽃들도 볼 일이 많지 않아서인지 금방 까먹었다. 식물도감외우기는 언젠가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손주들은 없겠지만…… 들꽃을 볼 때마다 혼자라도 이름을 불러보는 할머니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할머니는 화투점을 보는 할머니와 들꽃 이름을 외우는 할머니가 반반 섞여있다. 그건 내가 되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밤 할머니를 꿈에서 본 건 아마도 상우가 한 말 때문일것이다. 할머니의 네 번째 기일을 맞이해 온 가족이 모여 성묘를 갔던 날, 나는 남동생인 상우로부터 할머니에 관한 놀라운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누나, 그 할아버지 기억해?"
가을볕이 좋은 토요일 오후였고, 공원묘지에는 잠자리들이한가롭게 날아다녔다. 아직 어린 조카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햇살에 비석들이 반질거리며 빛났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보러 오기에 여러모로 딱 좋은 날이었다.
"누구?"
"왜, 예전에 우리가 프랑스에 살았을 때, 아파트 일층에 살던할아버지 있잖아. 키 크고, 보청기를 끼던."


백수린 흑설탕 캔디 - P39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그렇지만, 나는가까스로 생긴 친구들 눈에 지나치게 심각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있는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 P51

"난실!"
CD 재생이 끝난 줄도 모른 채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 깜빡졸고 있는데 갑자기 브뤼니에 씨가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눈을 떴을 때 발견한 것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엄청난 높이의 각설탕 탑이었다. 켜켜이 쌓인 높다란 각설탕 탑.
"와!" 할머니가 탄성을 질렀다. 마치 경이로운 일을 난생처음목격한 사람처럼.
할머니의 반응에 신이 난 브뤼니에 씨가 부엌에서 언제 가져온 것인지 모를 설탕 상자 안의 남은 각설탕들을 테이블 위에아주 조심스럽게 마저 부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정육면체의 갈색 설탕들, 할머니는 각설탕들을 바라보다가 가까운 쪽에놓인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아이, 달아.‘
이런 천진한 달콤함이라니. 각설탕을 입 안에서 굴리자, 단맛이 서서히 퍼지고,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떠올랐다. 무슨 일인가로 혼난 후, 양장점 입구 앞 흙길에 앉아울고 있던 어느 초봄, 할머니가 보았던 여자 손님의 우아했던보라색 클로슈 모자. 인력거에서 내린 그녀가 할머니 손에 쥐여줬던 흑설탕 캔디. 난생처음 맛보았던 그 황홀하도록 달콤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런 것뿐이다. 그러니까, 할머니가나에게 찾아왔던 지난밤 꿈에 대한 일, 꿈속에서, 할머니는 ‘
아가시기 전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70대의 건강한모습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채 희붐한 빛에 둘러싸여 서 있다. 그 세계에서 아마도 소녀인 나는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가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품에 안긴다. 그런데 이건 무슨 향일까?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기는 순간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향을 맡는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자 속이나 치마 속 어디서도 향의 진원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점점 초조해진다. "할머니, 할머니, 나를 좀 봐."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가나를 돌아보고, 나는 할머니가 주먹을 꼭 쥐고 있다는 걸 불현듯 알아챈다. "할머니, 손을 펴봐." 나는 할머니에게 떼를 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가 울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무엇이든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에 차서.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 P72

작가 노트

「흑설탕 캔디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열여덟 살 때 습작으로 썼으나 완성하지 못한 첫 장편소설의 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피아노 연주곡들을 종종 찾아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은 것은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16번이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던 슈만이 호프만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후 연인인 클라라에게 헌정했다는 곡.
나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노년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이 난실과 장 폴의 사랑이야기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난실과 장 폴사이에는 정말 무엇이 오갔던 것일까? 그것에 대해서는 나역시 모르지만, 바라건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에게 다가와 다정히 말을 걸던 ‘난실‘의 사랑스러움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 한번 뵈러 가야겠네."
할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한 날, 명주가 말했다. 그러나 이후10개월간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명주의 암이 재발했기때문이다.
명주가 서른일곱 살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 할머니는 그녀에게 유기농 브로콜리와 파프리카를 한 상자씩 사줬다. 수술직후에는 병문안을 가는 내게 현미떡 두 상자를 들려 보냈다.
"이걸 명주 혼자 어떻게 다 먹어."
내가 투덜거리자 할머니는 신신당부했다.
"너 명주한테 잘해라. 잘해야 돼."
막 수술을 마친 환자에게 현미떡을 갖다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이 맞나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나마 명주가

강화길 선베드77 - P77

다행히도,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자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나는 나였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과하게 다가섰다. 기대했고, 실망했고, 미워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는견디지 못했다.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아주간신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와 결코 가까워질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선을 지켜. 선을.)명주를 만났을 때, 그러니까 서른두 살에,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가까워진 지 일주일 만에 싸웠다. 그녀가 내가 소개한 책의 2권을 보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내 취향이 아니야."
그 말에 나는 미쳐 날뛰었다. 그녀가 마치 나를 거부한 것처럼 굴었다. 나를 비난하고, 평가한 것처럼 굴었다. 나는 이후 그녀를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랬듯 그녀도 나와 연락을 끊을 것이고,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싫은 게 아니야. 그 책이 재미없는 거지. 그건 달라."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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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전쟁
이종필 지음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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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아.
잠결에도 느낄 수 있었다. 바깥에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조성환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침대 옆 협탁에있던 스마트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었다. 베란다를 통과하며 한결 온순해진 빗소리가 잠을 재촉했다. 방학인데 너무 일찍 깼나. 월요일 아침이지만 성환은 느긋했다. 지난주에 1학기 성적처리를 끝냈으니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여름방학이다. 어제는 동료 교수들과 새벽까지 달렸다. 아직 싱글인 30대 청춘이고 휴일에 챙길 가족도 없는 사람들이다. 강남의 와인 바까지 출동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게 4차였던가? 아니면 5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 P9

"네? 목 없는 시체요? 장군님 동상에? 시체가 왜…… 아니,
그걸 누가 매달았답니까? 거기 어떻게?"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성환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았다. 폭우 소리가 좀 더크게 들려왔다.
"그러니까요! 지금 난리 났어요. 시체는 경찰이 좀 전에 수습한 모양인데, CCTV 영상을 보면 드론이 배달을 했어요. 저도 보기 전까지는 안 믿었어요."
"네? 드론이 떴다고요? 세종로에 드론이 떴으면 군대가 출동하거나 대공포라도 왔을 텐데요."
"드론이 뜬다고 군대가 출동해요?"
"아마……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1방공여단이 하는 일이그걸 거예요. 서울 도심은 비행금지구역이라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뜨면 20밀리 발칸포나 대공미사일을 쏠 수 있어요."
"정말요? 도심에서 미사일을 쐈다가 빗나가기라도 하면 큰일 날 텐데……."
"그건 그러네요. 게다가 저공비행이라면 탐지조차 못했을지도 모르고." - P11

"과학적으로 가능했으니 현실에서 일어났겠죠."
"그러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를 물리적으로따져보자는 거죠. 저한테 얘깃거리 좀 주세요, 교수님, 과학으로 어떻게 썰을 풀 수 있을지………."
‘썰‘만 풀면 과학인가? 사이비 구라지. 성환은 슬슬 부아가치밀었다. 기자들은 늘 이런 식이다.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내용이라도 어쨌든 풀어서 그럴듯하게 짜맞춘 스토리를 원한다. 그게 정말 과학적인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우선 뉴스부터 봐야겠네요." - P12

"혹시 간 (GAN)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네? 간요? 순대 먹을 때 나오는?"
영란의 대답을 들은 성환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는 우리말로 하면생성적 적대 신경망 정도가 됩니다. 최근 널리 쓰이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이에요. GAN에는 두 개의 인공신경망이 있는데,
생성자라 불리는 한쪽 신경망에서는 가짜 데이터를 만들어내고 판별자라 불리는 다른 쪽 신경망에서는 그 데이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하죠. 생성자는 판별자를 속이는 게 목적이고 판별자는 가짜를 구별하는 게 목적이에요. 이 둘이 서로 경쟁한 결과 진짜 같은 가짜 데이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진짜 이미지를 바탕으로 진짜 같은 가짜 이미지를 만드는거죠.
흔히 생성자를 지폐위조범, 판별자를 위폐감별사로 비유하곤 합니다. 위조범은 계속해서 진짜 같은 위조지폐를 만들어내고 감별사는 계속해서 지폐의 진위 여부를 판별해요. 처음

"근데, 양자컴퓨터라는 게 대체 뭔가요? 컴퓨터를 양자로 들뒷자리의 영란이 피식 웃으면서 쏘아붙였다. "아휴, 그게 무였다는 건가?" 운전대를 잡은 태형이 물었다.
슨 아재 개그예요?"
성환이 조수석에서 대답했다.
"양자역학의 근본원리로 작동하는 컴퓨터죠. 지금의 컴퓨터는 0과 1로 모든 정보를 표현합니다. 반도체에 전류가 흐르냐안 흐르냐, 동전이 앞면이냐 뒷면이냐. 그게 정보의 기본 단위예요. 그 단위를 흔히 1비트‘라고 부르죠."
"그런데 양자컴퓨터는 비트를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다?"
"그렇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0과 1 또는 동전의 앞면과뒷면이 섞여 있는 이상한 상태가 가능합니다. 뉴턴역학에서는 이런 상태가 없죠. 예컨대 동전을 던졌다가 받았을 때, 뉴턴역학에서는 손을 펴기도 전에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 - P44

지 명회하게 길정집니다. 반면 양자역학에서는 손을 펴기 건까지 결정되지 않습니다. 앞면과 뒷면이 섞여 있는 아주 이상한 상태, 이긴 양자 중칩이라고 하죠. 영어로는 4wantumsuperposition......."
"설마 앞면과 뒷면이 포개져 있단 말인가요?"
"맞습니다. 마치 지하철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여들리는 것과도 비슷해요. 그러다 누군가의 얼굴을 깁중해서보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겁니다. 동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것 하나로결정되지 않은 거죠.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결정되는 것은 손을 펴는 순간입니다. 즉, ‘관측이 일어나면 중첩이 붕괴되고,
가능한 상태들 중 하나의 상태로 귀착해요. 앞면인지 뒷면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다만 양자역학적 계산을 통해 그 확률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죠. 물론 동전은 워낙 거시적인 물체라 실제 동전에서는 이런효과가 생기지 않습니다만, 혹시…… ‘슈뢰딩거 고양이‘라고들어보셨나요?"
"고양이요?"
성환은 짧게 한숨을 쉬고 설명을 이었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학생이 시험을 치기 전 점수를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을

죠, 하드웨어만으로 되는 건 아니지만, 빅데이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면서 인공지능이 발전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어제 말씀드린 GAN 이야기 기억 나시죠? 만일 양자컴퓨터에GAN을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짜 데이터의 생성과 판별이 훨씬 대규모로, 다양하게,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겠죠. 말하자면 여러 가지 버전의 위폐를 한꺼번에 만들어 한꺼번에검증하거나, 여러 나라 화폐에 대해 한꺼번에 위조와 검증을할 수도 있겠죠. 이런 양자컴퓨터가 비지도 기계학습을 한다.
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인공지능이 해낼지도 몰라요.
이미 퀀텀 머신러닝이라는, 양자소자와 양자 알고리즘과 머신러닝을 결합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이라고 봐야겠죠."

"원래 연구하시던 게 양자얽힘 아냐?"
"그렇죠. 광자를 이용한 양자얽힘, 알면서."
미시세계에서는 빛도 입자 알갱이처럼 행동한다. 그 빛 알갱를 광자라고 부른다. 광자를 이용한 양자얽힘이라……….
양자얽힘은 양자역학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현상 중양자얽힘 섬여조성환은 양자얽힘이라는 말을 하거나 들을 때마다.
부를 떠올렸다. 이 개념이 워낙 어려워서 흥부와 놀부를 예로들어 학생들에게 설명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얀 박씨와 검은 박씨가 함께 들어 있는 똑같은 주머니가둘 있다. 흥부와 놀부에게 주머니를 하나씩 준다. 흥부와 놀부는 주머니에서 딱 하나의 박씨만 꺼낼 수 있다. 이 경우 흥부가 어떤 색깔의 박씨를 꺼내든 놀부의 결과에는 전혀 영향을주지 않는다. 흥부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박씨를 꺼내는 사건과 놀부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박씨를 꺼내는 사건이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부와 놀부가 하나의 주머니에서박씨를 하나씩 꺼낸다면? 이때는 흥부의 결과가 놀부의 결과와 강력하게 연결된다. 흥부가 하얀 박씨를 꺼내면 놀부는 반드시 검은 박씨를 꺼낼 것이기 때문이다.

자역학적인 신비감이 없다. 이제 박씨가 코펜하겐 해석의 양자중첩과 측정에 의한 붕괴라는 규칙을 따르면 어떻게 될까?
흥부가 박씨를 하나 꺼냈지만 손바닥을 펴기 전까지는 관측이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흥부의 박씨는 하얀색과 검은색의 중첩상태에 놓이게 된다. 즉 확률분포로만 존재한다. 놀부의 박씨도 마찬가지이다. 흥부가 박씨의 색깔을 확인하는 순간 중첩상태는 깨지고 하나의 상태만 남게 된다. 놀부의 박씨도 흥부의 관측에 의해 중첩상태가 깨지고 하나의 상태로 고착된다.
놀부가 자신의 박씨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놀부의 박씨 상태는 흥부가 박씨를 확인하느냐 마느냐에 따라결정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흥부와 놀부가 아주 멀리, 우주 끝에서 끝까지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볼 수도, 평생 소식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 해도 흥부의 선택이 놀부의 상태를 결정한다. 이것이 얽힘‘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인 신호가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상대성이론의 광속불변에 어긋난다. 놀부는 흥부가 박씨를 확인했는지알 길이 없다. 즉, 흥부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박씨의 상태가이미 결정돼 있더라도 정작 놀부 자신은 그 사실 여부를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물리적인 정보가 흥부에서 놀부에게 즉각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주머니 하나에서 박씨를 나눠 갖는 예

시는 가장 간단한 경우이다. 새로운 종류의 박씨를 담은 새 주머니가 추가되고 하이젠베르크의 그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상황은 대단히 복잡해진다.
슈뢰딩거가 슈뢰딩거 고양이 실험을 제안했던 1935년, 이미 미국에 있던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며 우리 우주에는 이른바 ‘숨은 변수(hiddenvariable)‘가 있어 이것만 발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저자 세 명의 머릿글자를 따서 ‘EPR논문‘이라 불린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과학자들은 EPR을 검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수많은 실험은 한결같이 EPR을 기각하고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결과를 보여줬다.
"최근 논문에 보니…… 양자얽힘을 이용해 광자의 과거 경로를 역추적할 수 있다며? 그거도 너네 연구실에서 나온 거맞지?"
"가장 흥미로운 성과 중 하나죠."
"과거 경로를 역추적한다는 게 어떤 거야?"
"양자역학은 기본적으로 유니터리(unitary) 변환이잖아요. 그래서 정보가 보존되고……."
"그래서 블랙홀에서도 정보가 손실되지 않는다고 거의 결론이 났지."

우리 인간보다 인간의 뇌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
가 너무나 성공적인 게 명확한 것처럼, 장담하건대 태황후는
"빅데이터가 뇌하고 무슨 상관이죠?"
"우리는 뇌의 시각피질에 저장된 일생의 시각정보를 추출해내는 데에 성공했어. 운이 좋았지.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봐온그 무수한 장면들, 본인은 기억조차 못 하는 무궁무진한 시각정보를 태황후의 학습자료로 사용하고 있어. 그야말로 혁신이일어난 거야."
성환은 할 말을 잃었다. 단어들이 목구멍에 걸린 채 뒤엉켜있었다.
"놀라운 게 뭔지 아나? 여태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인간 뇌의작동방식을 태황후가 스스로 학습하면서 성능이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는 점이지. 전두엽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린 모르지만 태황후는 알고 있을 거야. 마치…… 알파고가 어떻게 인간을 이겼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인간을이긴 것처럼, 딥러닝이 왜 그리 성공적인지는 몰라도 그 결과

브이 같은 대형 로봇을 만들어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꾸곤 했여러이 질문을 한 꺼풀 벗기면 드러나는 과학과 사회와의 관계,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같은 주제들은 지난 30년 동안 나를 괴롭히면서 단련시켰다. 과학문화 활동을 한답시고 글 쓰고 강연하며 여기저기 나댄 세월도 결국 이 지점으로 귀결된다. 확실히 한국은 이 주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기엔 대단히 부적합한 나라이다. 독자적이고 자생력 있는 과학을 아직 발달시키지 못했고 (내가 생각하는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여전히 과학은 국가발전이나 경제성장의 도구로여겨질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과학사 기말고사 문제에대한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 아니, 맨해튼 프로젝트 같은 기획은 너무나 먼 나라 얘기여서 애초에 저런 질문 자체가 잘 와닿지 않는다.
현실에서 쉽지 않다면 꾸며낸 이야기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한국에서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상상이 내겐 아주 낯설지 않았다. 어릴 때는 태권이게 마징가나 태권브이가 궁극이 가장

다.
과학은 정보이고 기술은 정보를 실현시키는 능력이다. 그래서 기술에는 욕망이 투영된다. 기술은 욕망의 실현태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래왔듯이 남들이 하니까 해야겠다는 식으로는명작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지 식별이 바둑이든 욕망 또는목적의식이 구체적이고 강렬할수록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화오엽이 그랬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도 좋은 사례이다. ‘극강의 무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는 잘못된 질문이다. 나의 욕망,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먼저 뚜렷해야 한다. 어떤 기술의 부산물이거나 원래의 목적달성에 실패한 기술이라도 새로운 욕망과 결합하면 전자레인지나 포스트잇 같은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그래서 기술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주려면 우리의가장 강렬한 욕구가 무엇인지부터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의 현대를 식민지와 내전으로 시작해 아직 그 상처를안고 사는 우리에겐 과거를 극복하는 일이 현재의 욕구와 어떤 형태로든 결부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1895년의 비극은 그 여정의 피할 수 없는 경과점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과거와 미래가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다면 그 자체도 꽤

좋은 스토리라인은 좋은 과학이론과 비슷하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 자체로 일관성과 완결성, 필연성을 갖추고 있고 다루는 주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며 엄청난 상상력을 눈앞에 보여준다. 대중강연을 할 때마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과학교육을 시켜야 좋겠냐는 질문을 종종받는다. 내 답은 늘 <해리 포터>이다. 어릴 때부터 미적분을 선행학습하는 것보다 <해리 포터>를 읽으며 상상력을 키우는 편이 훨씬 낫다. 이제 허접한 작품이나마 이렇게 내 이름이 붙은소설을 하나 쓰고 보니 내 이름이 붙은 과학이론은 언제쯤 나오려나 하는 안타까움과 허무함이 동틀 녘 샛별처럼 불쑥 솟구친다. 근사한 과학이론 하나 만드는 게 나에겐 여전히 가장큰 꿈이다.

저는 120여 년 전 을미년 시월의 그 끔찍한 만행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반인륜범죄에는공소시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르드 프로젝트를 통해일본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물리일이 가능해졌학에 매진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다시 질문이 쏟아졌다.
"과거를 투시한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과거를 사진처럼 찍는다는 얘기인가요?"
"그렇다면 을미사변 현장도 사진처럼 찍을 수 있습니까?"
홍경수는 말없이 재킷 속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쳤다. 그가 펼친 A4 크기의 종이에는 여인의 얼굴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장면을 실시간 중계로 지켜보던 성환은 깜짝 놀랐다. 현장에 있던 영란과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피해자 이윤철의 가슴에 박힌 그림과 똑같았다.
"기초과학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얘기를 많이들 하시는데, 양자역학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만나면 이렇게 놀라운일도 가능합니다. 여러분."
홍경수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저희가 가장 우려하는 것도이나 인공지능연구소 같은 주요 국가안보시설까지 장악하면
"오얏꽃 다섯 이파리?"
"그렇습니다. 조선 왕조가 오얏나무 이(李) 자를 썼지요.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문장도 이화문(李花紋)이었고요. 그리고이화오엽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말입니까?"
"이번 이윤철 살인사건 또한 홍경수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이화오엽이 움직인 겁니다. 이 조직원 중에 국정원의 김상국국장이 있습니다. 바로 ‘우르드 프로젝트‘의 책임자입니다."
"국정원까지…… 대단하군요."
"국정원의 일부는 간단히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론과 같은 범죄 증거들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겠죠. 이들이 이화오엽을 유지하는 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조직이 국가기관그것입니다."

"홍경수, 문혜진 부부에 대해서는 저희도 오래전부터 모니터링하고 있었습니다. 홍경수는 을미사변 당시 궁궐을 지키던시위대(侍衛隊) 1연대 1대대 소대장 홍지원 참위의 후손으로,
이 있으신지요?"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을미사변 고종의 밀지를 받은 게 맞습니다."
"밀지 얘기가 사실이군요."
"밀지를 받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닙니다. 고종은 가장 믿을만한 군인 다섯 명에게 비밀리에 밀서를 내려 역적 처결을 명했습니다. 이 다섯 군인은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화오엽(李花五藥)‘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습니다. 이화오엽은 경술국

"자살을 해야 할 상황이라든가…… 하지만 저는 솔직히 찬규가 정말로 자살했는지……… 여전히 의문이 있습니다. 혹시윤 팀장님은 이번 사건에 대해 아시는 게 없나요?" 이었다면 핸들을 꺾어두는 것으로 충분한데 말입니다."
"그게…… 저희 관할이 아니라서 잘은 모릅니다만, 예전에있었던 ‘국정원 마티즈 사건‘이라고 들어보셨죠?"
"예전에 국정원에서 민간인 해킹 의혹 났을 때 담당 직원이차에서 자살한 사건 아닌가요?"
영란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태형이 말을 이었다.
"네, 그게 지난 2015년 7월이었습니다. 대략 이맘때네요. 당시 그 직원이 번개탄을 조수석과 뒷자리에 하나씩 피워놓고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났었죠. 그 사건을 두고 여러 의혹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비슷한 정황이 보입니다."
"그게 뭔가요?"
"우선 경사진 길에 차량이 뒤로 밀리지 않게 바퀴에 돌을 괴어놓은 점이 똑같아요. 자살하는 사람의 행위치고는 이해가안 되죠."
"지금 죽으러 가는 사람이 차가 뒤로 밀릴까 봐 걱정한다는게 이상하다는 거군요."
"그렇죠. 차가 밀려가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줄까 봐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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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번역자의 살찐 턱과 허름한감색 점퍼, 핏기 없이 노릇노릇하던 낯빛을 기억했다. 물잔을 만지작거리던 길고 거무스름한 손톱들을 기억했다. 그러나 정확한 이목구비만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이러 온 겁니인간입니다.
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그 쪼그만 것 손 잡아서 끌고 오면 되지, 몇날 며칠 거기 있도록너는 뭘 하고 있었냐고! 마지막 날엔 왜 어머니만 갔냐고!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았다니, 거기 있으면 죽을 걸 알았담서, 다 알고 있었담서 네가 어떻게!

그란게 느이 작은형이 으어어어, 말도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를 지름스로 지 형한테 달라들더니 방바닥에 넘어뜨렸다이. 짐승맨이로 울부짖음서 말을 한게, 무슨 이야긴지 뜨문뜨문하게밖에 안 들렸다이.

형이 뭘 안다고…… 서울에 있었음스로……… 형이 뭘 안다고…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둘이 그 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나부엌으로 돌아왔다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게, 아무 소리안 들리는 것맨이로 전을 부치고 산적을 꿰고 탕을 끓였다이.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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