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의 기쁨과 슬픔 - 너무 열심인 ‘나’를 위한 애쓰기의 기술
올리비에 푸리올 지음, 조윤진 옮김 / 다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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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대하며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했던 지식에 의존하여 끊임없이 사소한 결정을 쌓아가는 일이다. 행동한다는 건 절대 멈추지 않고더 잘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는 뜻이다. - P53

스탕달의 사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물론 모두가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알랭은 "글쓰기의 기술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글쓰기는 직업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한기술이다. 글을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다 보면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지금 고친다고 해서나중에 고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 반대로, 아무 글이나 갈겨놓고 고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 초고가 완성본의 질을 떨어뜨린다.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실수를 남겨두어라.

이다. 말하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결국 단 한 문장도 말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 삶은 준비할수 없다. 몸풀기 따위는 건너뛰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태도다. 안전망 하나 없이도 자신만만하게 뛰어들 수 있다면 자전거나 경마를 배우는 것처럼 인생을 배울 수 있다. 삶 자체가 품고 있는 추진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을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삶은 놀라움의 연속일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 놀라움은 좋은 쪽일까, 나쁜 쪽일까? 어떤 일도 생각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충분한 대비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망설이면 일이 더 어려워진다. 행동하기 전에 확신이 생기기를 바라지 말자.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미래에 가서 확인해보는수밖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면 된다고 순진하게 조언하는 사람들에게, 엡스타인은 철저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 들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답한다. 누군가는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심지어하겠다고 결정하지 않아도 해내곤 한다. 그들에게 선택지란 없다. 무조건 뛰어야 하는 것이다.

즉, 아웃라이어가 되려면 10년의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논하다 보면 책의 제목과 내용이 서로 어긋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예외적인 경우를 근거로 보편적인 명제를 끄집어 내기란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도출된 법칙은 제대로 증명하기 어렵다. 그런데 놀랍게도 글래드웰은 이 ‘1만 시간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비틀스 The Beatles와 빌게이츠 Bill Gates 의 사례를 든다. 만약 이들이 천재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글래드웰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천재‘란 게으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천재는 노력할 기회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활용한 덕분에 두각을 나타내지만, 게으른 사람들은 그들이 애초에 성공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 P75

전도 없이 자유자재로 시를 쓸 수 있었다. 랭보가 시를쓰고, 라틴어를 공부하고, 심도 있는 독서를 한 시간을전부 합치면 분명 1만 시간을 훌쩍 넘길 것이다. 모차르트는 어떨까? 아버지 때문에 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다루기 어렵다는 하프시코드에 입문했고, 열네 살에는 그레고리오 알레그리 Gregorio Allegri의 <미제레레 Miserere)라는길고 복잡한 찬송가를 딱 한 번 듣고 편곡해냈다. 놀라운가? 자, 시간을 계산해보자.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모차르트가 연주한 시간을 따지면 1만 시간은 가뿐히 넘길것이다. 랭보와 모차르트조차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보다 일찍 시작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 P77

훈련을 받게 된이었다. 따라서 타고난 재능과 습득한 능력, 재능에한 결과와 노력에 의한 결과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연구는 타고난 재능이라는 요인을 전부 배제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게다가 ‘후향 연구retrospective si기에 바이올리니스트에게서 얻은 추정치와 최대 500시 간까지 차이가 났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점은, 1만 시간은 그저 평균치일 뿐이라는 점이다.

1만시간의 법칙. 원하면 이루어지니,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곳이 어디든 닿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하지만 스포츠의 영역에서는 음악의 영역에서든 이러한 결론은 아이들 대상의 조기교육을 부추길 수 있고, 어떤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못하는 것은 개인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이라는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다. 우리를 해방하는 동시에 (무엇이든가능하니까), 책망하기도 하는 (성공하지 못한 건 다 내 탓이니까) 메시지다. 글래드웰이 말하는 "위대함을 만드는 마법의 숫자"가 자칫 우리를 옭아매는 데 쓰일 수도 있는 것이다 - P80

결국 특정한 영역에 1만 시간을 투자하는 행위로 모든 사람이 전문가적인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성공을 위해서는 타고난 ‘하드웨어‘와훈련을 거쳐 획득한 소프트웨어‘, 이 둘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 위대함을이룩해줄 마법의 숫자 같은 건 없다. 재능과 노력, 어느 한 쪽도 없어서는 안 된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밭에 씨를 뿌릴 수 없고, 재능 없이 노력만 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
이다. 두 경우 모두 낭비다. 재능이 있는데 훈련하지 않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지만, 재능도 없이 무작정훈련하는 것 역시 해롭다. 신체와 정신 모두 불필요하게소모될 뿐 아니라, 집요하게 매달리며 자기부정을 거듭하다 보면 판단력이 흐려져 집착에 빠질 수도 있다. - P85

이제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자.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며, 1만 시간이면 세계 최고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선택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거라고 믿는가?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다르게 다시 묻겠다. 1만 시간동안 훈련하면 400미터 높이의 줄 위를 걸을 수 있는용기가 생기리라 믿는가? 예시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면기준을 조금 낮춰서, 노트르담대성당 정도는 건널 용기가 생길까? - P89

중 만나는 은총의 순간에 대해 스포츠를 예로 들어 묘사한다.
일단 ‘이륙하면, 윤활유를 친 기계처럼 완벽하게~작동한다. 마치 100미터 거리를 10초에 주파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문장이 산처럼 쌓이는기적이 일어나고, 정신이 내 몸을 빠져나와 바깥에 존재한다. 나는 나 자신을 지켜보는 구경꾼이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글이 망설임 없이 술술 써진다. 정말 환상적인 기분이다. 분명한 축복의 순간이다. 단어를 거느리는 왕이 된 기분이기도 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오묘한, 마치 천국에 온 느낌이다. 내가 쓰고 있는 내용을 나 스스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세상을 전부 내 발아래 둔 것만 같다. - P103

은총을 맞이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억지로 하..
지 않기‘다. 노아의 경우는 조금 특별했다. 선수로서 그는 1983년 프랑스 오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은총의 순간을 경험했고, 그 후로 몇 년 동안 자신이 놓치고있던 것들을 잘 풀어보려 노력한 끝에 또다시 성공할 수있었다.

은총은 그것을 격렬하게 갈구하는 사람에게서는 멀어진다.

하지만 운명이란, 올바로 인식하기만 한다면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하는 힘이 된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냥 짜인 대로 움직이면 된다. 무엇이 결려 있는 상관하지 않고 최대한 온전하게 나 자신이 되면,그것으로 그만이다.
운명의 선고만을 기다리던 처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기회를 쟁취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운명이다. 운명이란 이끌림이며,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기보다는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게 긴장을 덜어낼 때 노아가 말한 최고의 게임을 펼칠 수 있다. 책임감, 일을 망칠 수 있다는두려움, ‘안전하게 가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면 승리를 향한 집착에 작별을, 패배를 향한 공포에 이별을 고할 수 있다. 결국 행위를 할 때 순수한 즐거움만을 느끼게 된다. 아무것도 없이, 오직 즐거움만 남는다. - P119

는 것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올바로 인식하기만 한다면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하는 힘이 된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걱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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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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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우리의 단골 카페, 자주 앉던 창가 자리에앉아 있습니다. 창 너머로 오빠가 일하고 있는 회사 건물이 보이네요. 1층부터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세어 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7층, 저 많은 창문중 하나에 오빠가 있겠네요. 열 시간 후에 여기서 오빠를만나기로 했지요. 하지만 더 이상 오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렇게 편지를 남깁니다. 불미안해요. 이미 몇 번이나 말했듯 청혼을 받아들일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빠와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요.

(현남 오빠에게) - P155

이 결정이 맞는지, 후회하지 않을지, 내가 오빠 없이 살 수있을지 두렵고 무섭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벌써 10년째, 그러니까 거의 제 인생 3분의 1을 오빠와 함께 지내 온 셈이니까요. 그런 오빠를 앞으로 영원히 못 본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이제 여기서멈추려고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고, 또 고마웠고, 정말고마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 P156

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요. 하지만 오빠 말대로라면 제가과 친구도 모르는 애가 되는 거잖아요. 저도 모르게 규연이가 오빠 동아리 후배라고 강하게 말했고 오빠는 오늘왜 그렇게 예민하냐며 "그렇다고 치자. 했어요.
왠지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저는 오빠 손을 잡아끌고길을 건너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규연이에게 직접 자신은 오빠의 동아리 후배이고 저와 다른 과라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런데도 제가 울었던 건 오빠가 우겼던 일이 화가 나서도, 그래 놓고 착각할 수도 있다고 별것 아닌 듯넘겨서도 아니에요. 사실 규연이를 만나러 가면서 정말내가 틀린 거면 어떡하지, 내가 헷갈리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저 자신을 계속 의심했기 때문이에요. - P159

지은이가 가장 먼저 맥주 한 캔을 다 마신 다음이었나요? 한참 아까 경기를 되새기던 중이었나요? 오빠가지은이에게 "너는 보통 여자애들하고 다른 것 같다."라고말했고, 지은이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고 물었습니다. 오빠는 "칭찬이야." 했어요. 지은이는 "보통 여자애들이 어떤데요? 보통 여자애들하고 다르다는 게 왜 칭찬이에요? 그럼 보통 여자애들은 보통 별로라는 뜻이에요?"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습니다. 술자리는 급히 마무리되었고 그래도 오빠는 택시를 지은이네 먼저 들르도록 해서 내려 주고 저를 기숙사에 데려다주었죠. 지은이가 내리고 난 택시 안에서 오빠는 지은이가 좀 당돌한것 같다고 했다가 버릇없는 것 같다고 했다가 싸가지가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듣기 좀 그랬어요. 그래도 제 친군데 싸가지가 없다니. - P167

오빠는 저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어요. 동문회에 입고 갈 단정한 정장을 사 주었고 당일 메이크업을받을 숍도 예약해 놓았어요. 제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인정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마냥 기쁘지는 않더라고요.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잇새에 아주 작은 고깃덩이가 끼어서 아무래도 따지지 않는 답답함, 찜찜함, 불편함, 뭐 그런 감정.
지은이에게 말했더니 대뜸 "자기 동문회인데 왜 너한데 새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키지? 네가 현남 오빠 액세서리야?" 하더군요. 아, 이거였구나. 내가 느낀 불편함이이유를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 P168

그리고 그날 우리는 김밥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갈비탕을 먹었어요. 제 몸이 너무 약해진 것 같다며 오빠는고깃국을 사 주겠다고 했어요. 저는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일단 마음이 불편했고 갈비탕이 싫었어요. 오빠는 설렁탕에 소주 마시는 소박하고 소탈한 여자가 좋다고 자주 말하죠. 그런데 오빠, 설렁탕 비싸요. 그리고 저는 물에 끓인 고기는 별로더라고요. 고기는 구운 게 좋지. 오빠는 자꾸 설렁탕이니 갈비탕이니 그런 거 먹자고 하고,
제가 잘 안 먹으면 입이 짧다고 잔소리하고 악순환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입이 짧은 게 아니라 오빠가 몸보신시켜 준다고 사 주는 음식들이 입에 안 맞았을 뿐입니다.
몇 번 얘기했는데 오빠가 그냥 흘려듣더라고요. 다시 말하지만 고기는 정말이지 구운 게 좋습니다. - P182

오빠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말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질문은 "아이를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가 아니라 "아이를 몇 명이나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였고, "네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가 아니라 "네가 아이를 몇 년쯤 직접 키울 수 있을까?" 였으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대답을 피하곤 했고 오빠는 왜 그렇게 계획 없이 사느냐고 저를 한심해했습니다. 하지만 오빠, 오빠가 아이를 직접 낳을 것도 키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계획을 혼자 세우죠? 한심한 건 제가 아니라 오빠예요. - P185

자전거 여행 이외에는 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없네요. 평소에는 그냥 그런 데이트들이었죠. 밥 먹고,
영화보고, 맥주 마시고, 섹스하고, 나랑 섹스하려고 만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오빠가 뭐 섹스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 P187

요.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고 너랑 결혼하기 싫은 겁니다. 본격적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꺼림칙하던모든 게 분명해졌어. 그동안 오빠가 나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애정을 빙자해 나를 가두고 제한하고 무시해 왔다는 것을, 그래서 나를 무능하고 소심한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 P190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안다.

(오로라의 밤)

옐로나이프에 다녀오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 전 참고 삼아 보았던 다큐멘터리에는 오로라여행 후 퇴사하고 천체 사진작가가 되거나 전혀 다른 분야의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이 나왔다. 한 발짝만 걸어 나와도 길은 넓고 많은데 일상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한 발짝의 계기가 그들에게는 오로라였다. 나도 그럴 줄알았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왔으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입시 업무를 마무리하고진학지도 연수를 받고 필라테스를 하면서 남은 방학을보냈다. 방학은 언제나 너무 짧고 새 학기를 생각하니 두려운지 설레는지 수시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로라의 밤) - P253

이렇게 눈을 감으면, 눈 앞에서 막 춤을 춰. 나를 감싸서 우주로 데리고 날아가. 우주는 이렇게 넓고 끝도 없구나, 나는 그냥 먼지구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생각이들어."

"할머니 설마 인생무상 이런 거 깨달으신 건 아니죠?"

"악착같이 살아야지, 깨달았다. 나라도 이 먼지 같은 나를 아끼고 아껴서 훌훌 날아가지 않게 잘 붙잡고 살거야."

(오로라의 밤) - P255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어쨌든 지혜는 첫 번째고비를 넘겼다. 내가 지혜의 소원을 잊지 않고 빌어 준덕분이라고 우기는 중이다.
오로라를 보고 온 것은 어머니와 나인데 지혜의 인생이 달라졌다. 달라질 뻔했던 것이 달라지지 않는 방향으로 달라졌고 그것은 어쩌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성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과 그 일 들이 나와 지혜에게 가져다 줄 변화를 생각한다
나와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 P259

"엄마도 똑같네."
"아니! 엄마 똑같지 않아! 너 엄마가 뭘 보고 어떻게 자랐는지 몰라? 엄마 너만 할 때부터 성교육 캠프 다니던 사람이야. 대학 때 책 모임 만든 얘기 들었지?"
주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겠지, 무려 20년 전에. 그리고 지금 엄마는 남자애들은 생각이 없다, 이해해 줘야 한다, 몰래 사진 찍고낄낄거리는 게 장난이다. 그러는 사람이 됐어. 여자애들이 성적 떨어뜨리려고 남자애를 꼬신다, 그런 한심한 소리나 하는 사람이 됐다고, 그러니까 엄마, 업데이트 좀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구나. 20년 동안 나한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자아이는 자라서) - P293

"하지 마. 너 겨우 스물네 살이야. 앞으로 네가 할 수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포기하겠다고?"

"왜 포기해? 결혼한다고 내가 왜 포기해? 난 다 하고살 거야."

그게 마음대로 될 것 같아?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고 그러면서 여자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을 것같아?"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직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엄마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엄마는 거의 30년 전, 보수적이기 이를 데 없는 지방 소도시에 가정 폭력 상담소를 연 사람이다.

(여자아이는 자라서) - P273

아이를 낳고 키워 봐야 어른이 된다고들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세상을 알고 사람을 겪어 본 평범한 어른들은 의외로 대의를 위해 자신의손해나 고통을 감수하기도 한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판단할 줄 알고 일정 정도의 정의감, 측은지심, 희생정신도 있다. 그런데 자녀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피해 학생을 쫓아다니며 합의를 종용하는 성폭행 가해 학생의 부모, 내 아이 학교 옆에 특수 학교를 짓지 말라는 학부모들, 논문의 공저자로 미성년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대학교수, 자녀의 취업을 청탁하는 고위 공직자……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빠지지 말아야지, 내 아이에게만 매몰되지 말아야지, 나빠지지 않고도 아이를 무사히 키울 수있다고 계속 나를 다잡는다.

(여자아이는 자라서)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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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어느 관청에서… 그런데 어느 관청인지 굳이 밝히지않는 게 좋겠다. 온갖 관청, 연대(聯隊), 사무실 등, 말하자면 이런 곳에 근무하는 관료들보다 더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없다.
요즘 개인들은 모두 자신이 당한 일을 사회 전체가 모욕당한 것처럼 생각하니 말이다. 최근에 어느 군(郡)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튼 어느 군 경찰서장이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에는 국가의 법령이 폐기되고 있으며, 자신의 신성한 이름이 아무쓸모 없이 회자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그 증거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낭만적인 소설이 첨부되었는데, 거기에는 열 쪽마다 군 경찰서장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러므로 그 모든 불쾌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야기할 관청을 그냥 어느 관청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얘긴즉, 어느 관청에서한 관리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 관리는 그리 비범하다고는 할 수없는 위인으로, 키는 작고, 얼굴은 약간 곰보에다 불그스레하며,
보아하니 지독한 근시인 데다, 이마는 조금 벗어졌고, 양 볼에는주름이 있으며, 안색은 치질 환자처럼 보였다. 뭐, 어쩌겠는가!

(외투) - P47

언제, 어느 때 그가 관청에 임용되었고, 누가 그를 임명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몇 명의 국장과 과장이 교체되었든간에, 그는 늘 같은 자리와 같은 처지 그리고 같은 직급에서 변함없이 정서하는 관리로 일했으며, 훗날 사람들은 그가 분명 대머리에 문관 제복을 입고서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상태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었다. 관청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런 경의도 표하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그가 지나갈 때 자리에서 일어서지도않았으며, 심지어는 현관으로 파리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온 양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과장들은 냉정한 폭군처럼 그를 대했다. 부(副)계장은 고상한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에 흔히 그렇듯이, "정서해 주십시오." 혹은 "흥미롭고 좋은 건입니다." 아니면듣기 좋은 말 한마디 없이 곧장 그의 코앞에 서류를 들이밀곤 했다. 그러면 그는 누가 서류를 갖다 놓았는지, 그에게 그럴 권한이 있는지 살피지도 않고 그저 서류를 쳐다보고는 곧바로 정서 - P49

자신의 직무에 그토록 충실한 자를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열심히 일했다. 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정서를 하면서 다채롭고 즐거운 자신만의 세계에 접하여 만면에 화색을 띠곤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몇몇 자모를 쓰는 순간이면, 거의 몰아지경에 빠져버렸다. 웃음을 짓기도 하고, 눈을 찡긋거리기도 했으며, 마치 펜으로 써 내려가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는 듯이 입술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그의 열성에 걸맞게 포상을 내린다면, 아마도 그는경악을 금치 못하겠지만, 5등 문관직 정도는 얻을 법도 했다. 그러나 동료 독설가들이 말하듯이, 장기근속 끝에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제복 단추와 치질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주목을 - P51

봉급 400루블이면 자신의 운명에 만족할 줄 아는 자의 평화로운 삶은 그렇게 흘러갔으며, 단지 9등급만이 아니라, 3등급, 4등급, 7등급의 모든 공직자들, 심지어 그어떤 공직도 맡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 행로에 산재된 각종재난들만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늙어 죽을 때까지 흘러갔을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에는 연봉 400루블 혹은 그와 비슷한 액수를 받는 자들의 강력한 적수가 있다. 비록 건강에 좋다고들 하지만,
이 적수는 다름 아닌 북방의 혹한이다. 관청에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메워지는 아침 8시면 그것은 도무지 감출 길이없는 가엾은 관리들의 코를 사정없이 강력하고 매섭게 후려치기 시작한다 - P53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해진 공간을 되도록 빨리 뛰어오려고 애썼음에도 얼마 전부터 등짝과 어깨가 심하게 타는 느낌이들기 시작했다. 결국 외투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생각에 다다랐다. 집에서 외투를 면밀하게 살펴본 후 외투 등허리와 어깨 부분 몇 군데가 무명처럼 닳아 있음을 발견했다. 나사(羅紗) 천은 속이 비칠 정도로 해졌고 안감은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외투 역시 관리들의 웃음거리가될 만했다. 사람들은 외투라는 고상한 명칭을 박탈하고, 그것을덮개라고 부르곤 했다. 실제로 그것은 기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다른 부위를 덧대느라 옷깃은 해마다 점차 줄어들었다. 덧댄 곳은 분명 재봉사의 바느질이 아니었고, 마치 자루처럼 늘어진 것이 보기 흉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게 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에게 외투를 가져가기로 했다. - P54

솔직히말해 처음에는 그런 절제된 생활에 익숙해지기 조금 어려웠지만나중에는 길이 들었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심지어 저녁을 굶는게 습관이 되었다. 대신 미래의 외투라는 영원한 이데아를 늘 생각하면서 정신적인 양식을 섭취하였다.
이때부터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처럼,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곁에 있으며, 어여쁜 여자친구가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주기로 한 것처럼, 그의 존재 자체가 어쩐지 더 충만해졌다. 그 여자친구란 다름 아닌, 두툼한 솜을 넣고 닳을 염려 없는 튼튼한안감을 댄 바로 그 외투였다. 그는 생기 넘쳤고, 삶의 목표를 세운 사람처럼 성품이 강고해졌다. 표정과 행동에서는 의혹과 우유부단함, 망설이고 주저하던 모든 성향이 저절로 사라졌다. 때로는 눈에서 불꽃이 튀었으며, 심지어 ‘진짜로 옷깃에 담비 가죽을 달까?‘ 라는 대담무쌍하고 용맹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념들은 그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 정도였다. 한번은 정서하다가 실수를 하여 거의 ‘악!‘ 하고 소리를지르고는 성호를 그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그는 어디서 얼마에 - P63

경찰서장은 외투 강탈 사건에참으로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본질에 주의를 기울이지않고, 왜 그리 늦게 귀가했는지, 어딘가 좋지 못한 곳을 들른 것은 아닌지 등등을 캐묻기 시작했다. 이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당황했고 외투 문제에 대해 서장이 적절한 절차를 밟겠다는건지 아닌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날그는 온종일 관청에 나가지 않았고 이는 그의 삶에서 처음 있는일이었다. 다음 날 그는 매우 창백해진 모습으로 더욱더 서글퍼보이는 낡은 외투를 입고 관청에 나타났다 - P73

그가 하는 말은 매우 낮고 엄격하게 들렸는데, 보통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행동을 하는가? 지금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알고 있는 건가? 지금 누가 앞에 서 있는지 알고 있나?" 라는 말이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원래 마음이 좋은 사람으로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친절했으나, 장관이라는 지위가 그를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다. 혼란스러워하며 갈팡질팡하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동등한 지위의 인물과 만날 때면 도리를 아는 매우 착실한 사람으로, 심지어 모든 면에서 전혀 어리석지 않게 행동했으나, 한계급이라도 낮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매우 졸렬해져서,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다가 불쌍한 처지가 되곤 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시간을 좀 더 재밌게 보낼 수 있었는데 하고 느낄 정도였다. 가끔씩 그의 눈을 보면 재미있는 대화나 무리에 끼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 주는 건아닌지, 이것이 격에 맞는 행동인지,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런 연유로 간혹 가다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항상 입을 다물고만 있어서, 급기야 참으로 무료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우리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바로 이 ‘중요한 인사‘ 앞에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나 중요한 인사에게 가장적절치 못한 시간에 나타나고 말았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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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 단편집 마카롱 에디션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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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기기묘묘한 사건이 발생했다. 보즈네센스키 대로에 살고 있는 이발사 이반 야코블레비치(그의성(姓)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볼에 비누거품을 칠한 신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피도 뽑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그의 이발소 간판에 다른 문구는 일절 없었다.)는 꽤 일찍 일어났고 뜨끈뜨끈한 빵냄새를 맡았다. 침대에서 몸을 조금 일으킨 그는, 커피를 매우좋아하는 상당히 존경할 만한 부인인 자신의 아내가 난로에서갓 구운 빵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코 단편중 - P9

"아, 예, 나리, 면도를 하러 가다가 물살이 센지 어쩐지 쳐다보았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을 하는군! 그런 식으로 넘어갈 것 같은가. 이실직고하게!"
"아무 조건 없이 일주일에 두 번, 아니 세 번씩 면도를 해드리겠습니다." 이반 야코블레비치가 대답했다.
"어허, 친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미 이발사 세 명이 면도를 해주면서 매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 제기서 뭔 짓을 했는지 순순히 말하지그래?"
이반 야코블레비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 일은 완전히 안개 속에 묻혀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 P13

8등관 코발료프는 잠에서 깨어날 때면 늘상 그렇듯이 본인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푸르르… 소리를 내며 아침 일찍 일어났다. 코발료프는 기지개를 켜고 책상에 세워놓을 수 있는 작은 거울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어제 저녁에 콧잔등에 솟아난 뾰루지가 어떻게 됐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있어야 할 코는 온데간데없고 얼굴은 그저 편평하기만한 게 아닌가! 놀란 코발료프는 물을 가져오게 해서 수건으로 눈을 닦아보았지만, 코는 정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자고 있는게 아닌지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보았는데 꿈은 아닌 것 같았다.
8등관 코발료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흔들어보았지만코는 없었다! 그는 바로 옷을 가져오게 하여 입고는 경찰부장에게 직행했다. - P14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그러나 금세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 물러섰다. 자신의 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제복을 입은 신사에게 대놓고 5등문관으로 행세하는 비열한 사기꾼일 따름인 너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내 코에 불과하다고 말할 요량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미 코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를 방문하기 위하여 급히 떠난 게 틀림없었다.
코가 사라지다니, 코발료프는 절망에 빠졌다. - P19

는 겁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코는 새끼발가락 같은 게 아니란말입니다. 새끼발가락쯤이야 하나 없다 해도 신발을 신으면 아무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나는 목요일마다 5등 문관 부인 체흐타료바 댁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참모장교 부인 팔라게야 그리고리예브나 포드토치나를 보러 가지요. 게다가 아주 괜찮은 그녀의 딸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해야 할지…. 이제는 그들을 방문할 수 없다, 그런 말입니다."
관리는 입술을 꽉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 P24

"맙소사! 어떻게 이럴 수가! 왜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는 거지? 팔이나 다리가 없다 해도 코가 없는 것보다 나을 거고, 귀가..
없어도 보기는 흉하겠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할 거야. 그런데 사람이 코가 없어서야 말이 되냐고, 새가 새가 아니고, 사람이 사람이 아닌 거지. 차라리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게 낫지! 전쟁통에잘렸거나 결투로 떨어져 나갔다면 할 말이라도 있을 텐데, 이건뭐 땡전 한 푼 받은 것도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코가 없어졌으니… 이럴 순 없는 거야, 이럴 수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코가 사라진다는 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건 아마도 꿈이거나, 비몽사몽간이라 그렇게 보이는 걸 거야. 내가 면도하고 얼굴을 닦을 물을 바보 같은 이반이 보드카로 가져다 놓아서 술을 물인 줄 알고마서버렸을 거야." 자신이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기 스스로를 꼬집었다. - P31

도이상이 우리의 광대한 국가의 북쪽 수도에서 발생한 사건의전모이다! 이제 와서 모든 일을 곰곰 생각해 보면 정말 믿을 수없는 것 투성이다. 코의 불가사의한 분리와 코가 5등관이 되어곳곳에 출현한 매우 이상한 현상은 차치하더라도, 어떻게 코발료프가 신문에 코 광고를 낼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나는 지금 광고료가 비싼 것 같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말도 안 된다. 게다가 나는 돈이나 밝히는 부류는 아니다. 하지만 무례하고 난처한 데다 불쾌한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도대체 어떻게 코가 구운 빵에서 나타났고, 어떻게 이반 야코블레비치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희한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어떻게 작가들이 이런 내용을 주제로 삼았는가 하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상황은 전혀 규명하기 힘든,
그러니까… 아니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첫째로, 조국에 전혀 이익이 되지 않으며, 둘째로… 두 번째도 전혀 이득이 없는 바이다. 하여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 둘, 이것저것 고려하여 생각해 본다면, 심지어…. 하기야,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간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에도 무언가 있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 이와 비슷한 사건은일어난다. 드물지만 일어나는 법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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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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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와 에드몽

내가 읽어야 하는 작가들 중에는 카프카도 있다. 『변신』을 읽는동안 나는 그레고르의 끔찍한 운명에 놀라 망연자실해진다. 왜 그런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레고르의 악몽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사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똑같은 운명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숨이 막힐 만큼 두려워진다. 나도 그레고르처럼 비천한 존재로 변할지 모른다. 내가 처박힌 방이 창고가 되었다가 쓰레기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레고르를 떠올리면 욕지기가 인다. 그레고르가 꼭 나 같다. 아무도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자신조차 그렇다. 그레고르처럼 나도 말할 곳이 없고 친구도 없다.
나는 숨막히는 공간에 갇힌 바퀴벌레다.

결국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만 그레고르의 종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전까지 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꿈꾸었다. 그의용기에 찬탄했고, 키클롭스를 상대한 그의 꾀에 황홀해했다. 혹은쥘 베른의 책들에 나오는 필리어스 포그, 네모 선장, 사이러스 스미 - P135

베이지색 장정에 흑백 삽화가 들어 있는 두 권짜리 『몬테크리스트백작을 꺼내든다.
나는 곧장 책 속에 빠져든다. 에드몽 당테스는 나다. 나는 그와한몸이고, 그의 모든 감정을, 이유도 모른 채 닥친 끔찍한 처벌 앞에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리둥절함을, 왜 이래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 던져진 공포를 똑같이느낀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가 느낀 반항심과분노와 절망까지도 그대로 느낀다. 에드몽 당테스가 벽에 머리를 찧을 때, 세상과 단절된 외로움 때문에 죽도록 고통스러워할 때, 에드몽 당테스는 나다. 그 책 속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뒤흔든다. 그가파리아 신부를 만날 땐 나도 함께 해방을 경험한다. 파리아 신부는에드몽뿐 아니라 나까지 절망의 늪에서 건져주고 복수의 욕망에서 풀어준다 - P136

나는 그레고르다. 하지만 따라가야 할 모델을, 본보기를, 이상을 찾았다. 당테스가 나에게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 밤에 차가운 수돗물을 아주 가늘게 흘러나오도록 틀어놓고 몰래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그레고르를 떠나 당테스가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 카틀랭 공장의 노동자들이 단호한 걸음으로 일터로 향하고 어린애들이 거리에서 웃고 떠들며 학교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당테스에게 다가간다. 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다. 언제나 해결책이 있다. 기필코 그것을 찾아내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고함을 치며 화낼 때면 나의 자신감은 단숨에무너지고 그레고르의 세상만이 남는다. 어머니의 눈길이 나를 향할때면 나는 그레고르로 변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레고르다. 등껍질을바닥에 대고 배를 드러낸 채 일어서지 못하고 네발을 우스꽝스럽게허우적대는 그레고르다.
에드몽 당테스처럼 지금 나의 가장 큰 약점은 지식 부족이다.
진정한 지식을 얻지 못하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 P137

백치를 읽을 때는 금맥을 발견한 기분이다. 나는 도스토옙스기에 빠진다. 그의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 매혹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진짜처럼 실감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제멋대로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완벽한 존재들과 달리 삶으로 진동한다.
증오하고 사랑하고 미칠 듯이 흥분한다. 비틀거리며 정신적 혼돈 속에서 허우적댄다.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되 답을 찾으려 매달리지는 않고, 욕망과 광기와 과오 속으로 달려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삶이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해준 것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것을, 온통 폭력과 오욕과 복수와 배신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 - P157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찾아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다. 몇 줄밖에 읽을 틈이 없다. 내 방으로 들고 갈 수는 없다. 그랬다가 들키면 금지 된 창고방에 들어간 것까지 들통나게 된다. 일단 옆에 쌓여 있는 낡은 식탁보 아래 책을 감추어둔다. 그러곤 이후에 들러서 한 번에서너 페이지씩 읽는다. 주인공은 너무도 놀라운, 격정적인, 사악한, 신랄한, 이기적인, 고통받는, 비겁한 인물이다. 그를 뒤흔드는 모순적인 생각들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를 사로잡는다. 그는 사교성 없는 낙오자이고, 스스로 모욕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수를 위해 젊은매춘부 리자 앞에서 훌륭한 사람인 척한다. 심지어 죄 사함을 받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주소까지 건넨다.

그는 찾아온 리자를 짓밟는다. 하지만 리자는 그의 혐오스러운가면 아래 커다란 고통이 숨어 있음을 알아채고 기꺼이 몸을 바친다. 아주 잠시 그는 리자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의 진심을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금세 다시 악령들에 사로잡혀 기필코 돈을 주겠다면서 리자에게 모욕을 안긴다. 리자는 그를 용서하지만 그대로 떠나간다.

나는 충격에 빠져 읽고 또 읽는다. 늘 숨어서, 늘 몇 페이지씩 읽는다. 나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을 그토록 강하게 흔든 그주인공은 바로 내 아버지의 모습이다. 둘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세상을, 관습을 밀어낸다. 똑같이 광기 상태를, 거창한 말들을, 좋아한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굳은 외관 아래 아직까지 벌어져있는 상처가 있지 않을까? 아버지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 행하고 어머니와 나에게도 강요하는 것, 그 모두가, 아버지가 우리를 가두어놓은 이 세상 전부가 사실은 탁월한 통찰력이 아니라 은밀한 고통에서 나온 게 아닐까? - P158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을 때마다 결말에 담긴 냉혹한 교훈이 나를 죄어온다. 그 교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언젠가 자신의 광기를 깨닫는 날이 온다 해도,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야. 도망쳐!"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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