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5월 북아프리카 전역이 미국·영국·자유 프랑스·호주·뉴질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북아프리카 전역은 이탈리아의 졸전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전쟁을 통틀어 무려 35만 명 이상의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히틀러는 동맹국인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을 보냈지만, 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El Alamein)에서 패전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한때 롬멜의 독일 국방군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Cairo)까지 진격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의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후퇴를 반복하게 됐다. 결국 북아프리카 전역은 513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허스키 작전 지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한 영국과 미국은 이탈리아에 상륙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구상했다. 작전을 세우는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의 의견차이는 있었지만, 그해 여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Sicily)에 상륙하기로 결정한다. 그 당시 독일군은 아프리카 뿐만아니라 동부전선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1943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반격에 나섰다. 19437월 독일군은 최신식 전차인 티거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허스키 작전에 투입된 미군 제82 공수부대 대원들)


(시칠리아 해안에 상륙하고 있는 연합군)

 

194379일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영미 연합군은 총 10개 사단을 작전에 투입했다. 이 중 8개는 바다에서 그리고 나머지 2개는 하늘에서 데리고 왔다. 여기서 언급한 2개 사단은 미 제82공수사단과 영 제1공수사단이다. , 공수부대를 작전에 투입시킨 것이다. 이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예측한 연합군의 상륙 능력치를 넘어섰을 뿐만아니라, 시칠리아 섬에 배치된 추축국의 병력을 규모로 능가했다. 물론, 이탈리아군은 12개 사단이 있었지만, 이 중 절반인 6개 사단은 기동성이 없는 군대였고, 나머지 4개 사단도 연합군의 병력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인 병력이었다. 사실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졸전을 거듭한 군대였고, 그나마 유능한 군대도 이미 독일을 돕겠다며 동부전선에 투입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 군대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게 크게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1943년 7월 21일 시칠리아 전선 상황)

 

물론 연합군이라 해서 작전이 처음부터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군 제82공수사단과 영국군 제1공수사단의 공수부대들은 경험이 없는 항공기 조종사가 부대원을 바다에 떨어뜨리고 신경이 곤두선 대공포 사수가 자기편 항공기를 쏘아 떨어뜨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군 공수부대는 독일군 공수부대의 역공에 부딪혀 큰 희생을 치렀다. 비록 공수부대는 작전 중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었지만, 해안에 상륙한 부대들은 한결같이 상륙하는 데 다 성공했다.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흥미롭게도 히틀러는 만슈타인 장군에게 시칠리아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갑 군단 일부를 이탈시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쿠르스크 전선에 있던 독일군 기갑부대 일부가 이탈리아 쪽으로 배치되기도 했다.

(조지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시칠리아에 상륙한 이후 미군과 영국군은 진격을 지속했다.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은 시칠리아의 서쪽 절반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몽고메리의 군대는 에트나 산 동쪽을 지나 짧은 경로로 메시나를 가고자 했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몽고메리 예하사단은 재전개하여 서쪽을 지나가야 했다. 720일 영국군의 해롤드 알렉산더(Harold Alexander)는 패튼에게 팔레르모와 트리파니에 가할 공격을 늦추고 대신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해안도로를 따라 내달려 메시나로 가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공수부대와 앞서 언급한 기갑사단을 보내 시칠리아의 방어를 강화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전진이 느려졌다. 결국 패튼과 몽고메리는 82일이 되어사야 이어지는 진지선을 형성했다. 816일 이후에야 추축군을 강력한 방어진지에서 몰아냈고, 그제서야 겨우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817일 연합군이 메시나에 입성하자 독일군은 빠져나가고 없었다.

(팔레르모에 입성한 미군 기갑병력들)


(작전에 참여한 영국군 병사들)

 

허스키 작전은 1943817일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외에 자유 프랑스와 캐나다 그리고 호주의 군대가 이 작전에 참여했다. 허스키 작전 기간 동안 영국군은 총 2,938명이 전사하고 9,212명이 부상당했으며, 2,782명이 실종됐다. 미군은 2,811명이 전사하고 686명이 실종됐으며, 6,471명이 부상당했다. 반면에 이탈리아군은 4,678명이 전사, 32,500명이 부상당했고, 11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 독일의 경우 4,325명이 전사하고, 13,500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 명이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나온다. 흥미롭게도, 독일군은 811일부터 단계적으로 이탈리아 본토로 철수했다.

(허스키 작전 관련한 영문 서적)

 

허스키 작전으로 시칠리아를 점령한 연합군은 사실상 지중해를 거쳐 중동으로 들어가는 연합군의 병참선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국의 군사사학자 존 키건(John Keegan)이 때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이것이 실속없는 성취였다.”라고 평가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군 사단 병력 일부가 동부전선에서 이탈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히틀러가 빼낸 사단은 주로 서부전선에서 온 사단들이었고, 앞서 언급한 쿠르스크 및 동부전선에서 온 기갑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부전선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연합군은 한 가지 성취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한 것이다. 허스키 작전이 진행될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이마누엘레왕은 파시스트인 디노 그란디와 함께 무솔리니 탄핵 결의안을 통과시켜 무솔리니를 해임했다. 그런 다음 후임 총리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임명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사임한 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애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아펜니노 산맥 골짜기의 그란 삿소에 있는 산장에 연금됐다. 이것은 결국 히틀러가 무장 친위대 출신의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대원들을 보내 구출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 일부가 추축국에서 연합국 쪽으로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로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소위 빨치산 운동이 일어나 독일군과 독일의 꼭두각시인 이탈리아 사하 공화국의 파시스트 군대들에 맞서 투쟁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탈리아 내의 진영을 나누어 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허스키 작전으로 시작된 이탈리아 전역은 이후 2년을 더 끌었다. 그동안 서방 연합군은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1945년 독일 본토로 진입했으며 결국 동부전선에 있던 소련군과도 만났다. 히틀러가 사망하기 이틀 전 무솔리니 또한 애인과 함께 처형당했고, 이탈리아 전역도 55일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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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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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도서관에 들리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지난 토요일인 315일 집 근처 도서관에 들렸다. 사실 지난번에 읽다 만 책을 빌리려 했는데, 필자 눈에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 한권이 발견됐다. 그 책은 바로 뉴스타파에서 출간한 책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이었다. 이 책은 지난 2021년 뉴스타파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든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시리즈 중 첫 번째인 초토화 폭격을 책으로 집필한 것이다.

 

해당 도서는 2023727,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에 맞추어 출간됐다. 2022년에 탄생한 윤석열 정권은 202412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내란을 하기 전까지 북한에 대한 호전적인 적대감을 보여왔다. 내란수괴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이 북한을 자극하여 최소 국지전 수준의 전쟁 도발을 하려 했다는 내막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평양에 무인기가 침투한 것도 사실상 주체가 한국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비상계엄 선포 전후로 한국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에 북한군이 있다는 가짜뉴스들을 마구잡이로 살포했다. 우크라이나가 퍼뜨린 가짜뉴스들 중에는 너무나도 수준이 낮은 조작들이 판을 쳤고, 이런 거짓들을 필자는 속속이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이 북한군 가짜뉴스가 만들어진 내막에는 윤석열 정권이 우크라이나에 파병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윤석열 정권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전쟁을 부르짖었다. 윤석열은 한반도를 전례없는 전쟁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 과정에서 남북관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전쟁위기는 전적으로 윤석열 정권과 미국 바이든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때도 없는 한미 군사훈련과 더불어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감 등은 윤석열 정권의 본질이었다. 심지어 윤석열 정권에 복무하는 이들은 친일 성향도 가져서. 일제의 식민 지배가 한국을 산업화 시켰다.”라는 망언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기까지 했다.

 

, 윤석열 정권의 대미·대일 종속 외교와 친미·친일 사상의 근원에는 바로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윤석열 정권이 북한을 적대하고, 미국과 일본을 편중편애하는 것은 바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있기에 가능하다. 12.3 비상계엄도 바로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했다. 이는 윤석열 정권이 반국가 세력종북세력 척결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반공주의의 내재된 문제점을 보여줬다. 필자는 윤석열의 이런 지점들을 총괄하는 문제점이 바로 반북·반공주의라고 생각한다.

 

다소 서론이 길었다. 필자는 3년 동안 윤석열 정권을 지켜보면서 항상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윤석열은 과연 한국 역사를 공부해본 적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이다.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윤석열의 역사지식 수준이 과연 어느정도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그가 공개석상에서 보인 모습은 뉴라이트들의 수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윤석열은 뭐만하면 자유를 외치면서,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보였고 한국전쟁에서의 대한민국과 미국을 미화했다. 그의 발언에선 전쟁의 비극이나 참혹함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윤석열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모른다고 믿고 있다. 윤석열의 반공주의적 생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같은 냉전 시기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만큼이나 참혹하고 추악하며 잔혹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런 참극이 미국에 의해 벌어졌다.

 

잠시 얘기를 베트남 전쟁으로 돌려보자. 베트남 전쟁 당시 찍은 사진들 중에는 전쟁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 사진들 중에는 AP통신의 기자 닉 우트(Nick Ut)가 찍은 사진인 네이팜 소녀(Napalm Girl)’가 미국 및 서구사회에 잘 알려진 사진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을 무차별적으로 베트남에 투하했다.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민간인들이 매우 많았다. 사실 베트남 전쟁이 미국 내에 반전여론을 불러일으킨 것에는 미국 정부의 거짓선전(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거짓말.)도 있었지만, 네이팜 폭격과 같은 미군의 전쟁범죄 행위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는 제대로 된 통계가 없다. 다만 전쟁을 일으킨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에 따르면,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에 근거해서 보자면, 미국이 학살한 베트남인이 300만 명 이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의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 학살은 이미 벌어진 역사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에서 이런 학살극이 벌어졌다. 수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대한민국을 북한의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해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보면 이야기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보다 더 참혹한 수준으로 한반도를 폭격했다. 한반도 이남과 이북에는 베트남에 비해 산업시설이 더 많았고, 따라서 미군의 폭격으로 더 많은 산업 시설들이 파괴됐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인명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에 대해, 한반도는 달의 표면으로 변했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사실이다. 말 그대로 미국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폭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앞서 언급한 네이팜탄이 한반도 전역에 투하됐다. 미국 CIA 보고서에 따르면 미 공군은 한국전쟁 당시 총 32,357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11갤런(416리터)짜리 대형 네이팜탄 기준으로 한국전쟁 31개월 동안 매일 69발가량을 투하한 셈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네이팜탄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실전에 사용되어 총 14,000톤이 투하됐다. 그러나 2배가 넘는 양의 네이팜탄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투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말 그대로 한반도나 일본 비행장에서 B-29 폭격기가 발진하여 폭격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폭격기 호위용으로 전투기들이 투입됐다. 그 외에는 미군 항공모함에서 폭탄을 탑재한 전투기들이 발진하여 목표물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갈기는 방식이었다. 앞서 언급한 네이팜탄 32,357톤은 사실 미 해군과 해병 항공기가 투하한 투하량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추산해보자면, 32,357톤보다 더 많은 네이팜탄이 한반도에 투하되었다고 보면 된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정부의 선전과 동원으로 700만 명 이상의 관객 돌파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했던 시기 월미도 주민들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함포사격 및 폭격 장면에서 월미도를 마치 인민군 기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은 군사적 표적이 없는 민가를 무차별 폭격했다. 그 결과 최소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고, 유족들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미군의 악명높은 민간인 학살 사건인 노근리 학살 또한 학살의 시작은 피난민에 대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격이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땅은 불과 70~75년 전 미군 폭격으로 불바다가 됐다. 서울만 하더라도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까지 최소 4,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희생됐고, 그 중 2,700명은 용산에서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은 사실 미군 폭격의 결과물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모르면서 한국인들은 일상생활을 살아가고 있고,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나면서 더더욱 우리 기억 속에서 비극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전쟁 당시 미군의 북한 폭격은 말 그대로 지도에서 그 나라를 지워버리는 수준이었다. 미군이 상공에서 촬영한 북한의 도시들은 마치 달에 있는 크레이터들을 보는 느낌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의 수도 평양에는 멀쩡한 건물이 2~3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한은 미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과거 대한민국 군대 및 교내에서 존재하던 가학적 체벌인 원산폭격도 사실 전쟁 당시 미군이 자행한 원산폭격을 빗대어 만들어진 체벌이었다. 미군은 원산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여 말 그대로 초토화했다. 원산의 도시 파괴율은 80%75%인 평양보다 더 높았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죽었는지는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 북한 인구의 20%가 미군 폭격으로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을 지휘한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사령관은 전쟁 3년 동안 우리는 그 나라 인구의 20%를 살해했다.”라고 증언했고,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명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라고 증언했다.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현재 북한이 가진 반미주의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이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에 맞아가며 죽는 모습을 본 북한 사람들이 이후 미국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과 복수심을 느낀 것은 앞서 언급한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할 것이다. 자신들 눈앞에 폭격으로 인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북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남북한 모두 초토화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문제는 그 당시 미 공군의 전략전술을 보면,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군은 실험삼아 마을을 네이팜탄으로 초토화했고, 흰옷을 입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공산주의자라며 기총소사의 타깃으로 보았다. 말 그대로 한국인들은 미국에게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고 봐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의 종군기자인 매러이 티보르는 북한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군사적 표적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종종 기관총 세례를 받았는데, 그 조종사들은 표적에 발포하기를 즐겼다.”라고 말을 했다. 이는 그 당시 미군 전투기가 한반도에 사는 민간인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이면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당 서적은 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다루고 있다. 주로 사진자료들을 많이 첨부했다. 사실상 사진으로 보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스타파는 해당 다큐멘터리 및 책을 쓰기 위해, 미국에 있는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자료를 수집했다. 책에 나온 사진들 중에는 필자가 예전에 보았던 사진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진들도 상당히 많았다. 책 마지막 장면에 1953727일자 항공기 사진에는 휴전협정 당일도 미군은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1953727, 5공군 335전투요격비행대대 소속 파(PARR) 대위가 조종하는 세이버 제트전투기가 작전 중 촬영한 영상이다. 아래는 같이 출격한 B-26의 폭격 장면이다.(296.)”라고 나온다. 이렇게 보자면 북한은 개전초기부터 정전협정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까지 총 31개월간 미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미국이 북한을 얼마나 미친 듯이 폭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에는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추악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내란수괴인 윤석열은 이런 사실을 절대 얘기하지 않고 있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 절대다수가 이런 역사를 하나도 모른다. 비극의 서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필자는 뉴스타파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또 이걸 책으로 출판한 것에 대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이면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 보인 헌신과 노력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은 미국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전쟁, 자유를 수호한 전쟁으로 미화되어 왔다. , 뉴스타파는 그런 신화를 걷어차고, 폭력적이고 비극적이며 참혹한 한국전쟁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뉴스타파의 진실을 탐구하는 정신을 높게 평가한다. 사실 한국전쟁 폭격을 다룬 서적들을 여러 책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사진자료를 활발히 활용했고,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최신의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사료가치가 높다. 또한, 사진자료가 책의 전반을 포함하고 있기에 너무나도 술술 읽힌다.

 

한국전쟁의 또 다른 진실과 이면을 알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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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조건 -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
자라 바겐크네히트 지음, 장수한 옮김 / 제르미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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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에 알게 된 한 독일 정치인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자라 바겐크네히트(Sahra Wagenknecht). 바겐크네히트는 1969년 과거 동독 지역인 예나에서 이란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 군사훈련에 적응 못하여 동독 정부로부터 크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일부 불이익을 받았던 자라는 1989년 봄 막 다른 길목에 내몰린 사회주의를 재구성하고 기회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동독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녀가 공산당에 가입했을 시기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무너졌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했다. 그 당시 바겐크네히트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외 독일 통일을 반동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통일 이후 그녀는 예나 대학과 홈볼트 대학에서 철학과 독일 근대문학을 공부했으며, 19969월 네덜란드의 흐로닝언 대학 철학과에 등록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5년부터 국민경제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시작하여 20128월 그녀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독일의 로자룩셈부르크 재단의 연구 교수이자 켐니츠 대학의 미시경제학 교수인 프리츠 헬메닥에게 제출해 좋은 평가와 함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이와 더불어 독일 통일 이후에도 좌파로서 정치활동을 이어갔고, 2015년 이후부터는 좌파당의 원내대표로 활동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좌파당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가지고 갈등하다 2024년 바겐크네히트 동맹을 만들어 현재까지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에 구 동독 지역에서 적잖은 지지율(10~15%)을 얻는 것처럼 보였으나, 2025년 안타깝게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총선결과 4.97%를 득표하고 0.03% 차이로 봉쇄조항에 미달하여 모든 의석을 잃고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2016년에 쓴 책이 있다. 책의 제목은 ‘Reichtum ohne Gier: Wie wir uns vor dem Kapitalismus retten’이다. 바로 풍요의 조건이다. 이 책은 2018년 제르미날 출판사에서 번역했고,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작년에야 알게 됐다. 사실 이 책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서다. 현재 우리가 생활과 일상에서 숨쉬듯이 체감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석했다. 해당 비판이 흥미로운 것은 현재 21세기 자본주의 경제를 앞으로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경제 봉건주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분석에서 바겐크네히트는 일정 부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통해 현재의 시장체제가 소수의 독점 자본가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성과나 책임 그리고 경쟁에 토대를 둔다고 하지만, 21세기 상황은 그것이 실행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바겐크네히트는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면서 이런 얘기도 한다. “소수가 멋진 요트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반면, 다수는 겨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증대하는 압박을 견디면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로 정성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보편 선거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해야 상위 10%, 때로는 겨우 최상위 부자 1%만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정치가 거듭해서 다시 실현되는 것을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5.) 그녀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했다. , 현재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들이 극소수의 자본가들을 위해 체제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이러한 부분에 전혀 문제의식을 못느끼거나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걸 바겐크네히트는 경제학적으로 알기 쉽게 풀어낸다. 계속해서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자.

 

“21세기가 시작된 지금도 최고 부자 1%가 중요한 경제적 자원을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마음대로 사용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토지와 부동산 외에 산업시설, 기술 노하우, 디지털 혹은 다른 연결망, 서버, 소프트웨어, 특허 그리고 여타 다른 많은 것들 또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자원들에 대한 소유권은 변함없이 세습 및 혈연원칙에 따라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으며 그 수익은 오늘날에도 많은 경우 거의 세금도 물지 않은 채 소유자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그것이 노동소득으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생활양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인구의 99% 중 압도적 다수는 이들 새로운 금융 귀족들을 위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9~30.)

 

21세기 들어 자본주의는 높은 생산력과 부를 창출해냈고, 물질의 향상과 기술력의 향상을 불러왔다. 그러나 앞서 바겐크네히트가 지적하듯이, 과거 귀족들이나 부르주아들이 부를 세습하는 사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계급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희생하며 하루 밥벌어 먹고살고 있다. 물론 이것이 19세기의 물질적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다르지만, 여전히 불평등한 생산관계 속에서 모순이 재생산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그녀의 분석은 책을 읽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바로 1인당 GDP에 관한 얘기였다. 세계은행의 계산에 따르면, 아프리카 주민의 1인당 GDP가 식민지 체제의 해체 당시에 견주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아프리카 가나의 건국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가 레닌의 제국주의론적인 분석에 근거하여 신식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적잖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전후 냉전기 독립을 했음에도 여전히 저발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가난에 직면한 이유를 자본주의 지배체제에서 은크루마는 찾았다. 그녀에 따르면, 아프리카 뿐만아니라 서부 발칸 국가들의 경우에도 사회주의 해체 이전인 1989년에 비해 현재(2016년 기준) 산업생산 수준이 10%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 지난 25년간 자본주의는 성장을 이루지 못했고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73.) 물론, 반대 사례로서 중국이나 한국 등은 분명히 번영을 이룬 것도 빠지지 않고 설명하지만, 여기서 바겐크네히트는 이들 나라를 부자로 만든 것이 과연 자본주의인가?라고 의문을 던진다.

 

그 외에도 바겐크네히트는 교육기관의 문제, 식품 생산의 문제, 환경 문제, 최저생계의 문제, 자본의 카르텔, 독점 기업 등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을 분석했다. 심지어 21세기에 들어온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알고리즘, 유튜브, 구글, 그 외의 sns 등도 분석했다. 사실 우리가 무심코 구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면, 그에 맞는 데이터들이 뜨는데, 구글의 검색 엔진을 사용할수록 더 많은 데이터들이 축적되며 구글은 이 데이터들을 처리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 광고 지출의 10%에 이르는 금액이 검색 엔진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는 구글이라는 한 회사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바겐크네히트는 국내총생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국내총생산이 번영의 기준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할 것까지는 없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연 3만 달러인 나라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1인당 국내총생산이 3,000달러에 머물러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잘산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빈곤퇴치가 국내총생산의 성장과 결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보건대, 부자 나라에서 국내총생산과 가난은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 더 많은 물품과 서비스가 생산되고 이어서 팔린다면 우리 경제는 성장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으려면, 실업이 줄든 인구가 성장하여 하여튼 더 많은 사람이 일하게 되거나 같은 수의 사람이 더 오래 일하거나 혹은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하면 된다. 바로 이 사실에서 이미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업이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정규직 노동자가 더 긴 시간 노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같은 물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반드시 개선하지도 않는다. 물품에 대한 수요는 결국 언젠가는 충족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기업가는 물론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이 '그들의' 성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풍요는 그것을 통해 반드시 높아지지는 않는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08~209.)

 

, 국내총생산이 증가해도 이것이 반드시 소위 자본주의적 풍요를 절대다수에서 보장하거나 향상시킨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은 분명 경제적으로 성장했다. 국내총생산과 국민소득도 향상됐다. 그러나 그 성장 이면에는 현재 청계천에서 살던 판자촌 주민들이 있었고, 비교적 성장을 하게 된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이들은 개미굴이라 불리는 곳에서 사실상 노숙 생활을 했다. , 빠른 성장이 국민들의 균형적 복지와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그 당시와 2000년대를 비교하면, 사람들의 보편적인 물질적 수준은 매우 향상됐다. 그리고 성장을 하더라도 한국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말 그대로 굶지는 않더라도 하루 밥벌어 먹고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에 반해 상위 1%는 그때도 풍족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순을 생각해보자면,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분석은 많이 공감이 된다.

 

그녀의 책 풍요의 조건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대중적인 언어로 담고 있는 책이다. 상당히 읽어볼만하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을 정도다. 또한, 경제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몰입해서 읽었을 정도니 바겐크네히트가 대중적으로 책을 집필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바겐크네히트의 책이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새롭고 흥미진진한 분석을 그녀가 내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해결 방법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변혁과는 거리가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진보당만 하더라도 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녀의 주장에는 이와 같은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진보좌파라면 지금 당장의 자본주의 해체를 주장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기간 산업의 국유화 정도는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얘기가 없다. 이게 좀 많이 아쉬웠다. 자본주의적 봉건체제의 극복이나 대외문제 의식 그리고 경제문제 의식은 좋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주장이 너무 없는 것은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인에게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상당히 친 동독 정부 성향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독일이 친동독적 주장을 상당히 막고 있기에 바겐크네히트 또한 정치인으로서 문제될 것을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러우전쟁 관련해서도 언급하겠다. 바겐크네히트는 서문에서 러시아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과두 자본주의로 전환한 후 세계 무대에서 잠시 사라졌으나 이제 다시 영향력을 높이려는 투쟁에 나섰다.”고 언급한다. 그녀는 그 당시 진행되고 있던 2013년 유로마이단과 2014년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돈바스 내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돋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측면이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정권에 대한 무기 지원을 항상 반대해왔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전 이후 독일은 그녀의 주장과는 달리 망상과 루소포비아에 빠져 전쟁을 선동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그래서 내가 바겐크네히트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있다.

 

아무튼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을 완독했다. 현대 21세기 자본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 한번 쯤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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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25-03-25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라 바겐크네히트 이름은 들어 보았는데 저런 도서의 저자이자 다른 몰랐던 이력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달인가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이라고 이 분이 이끌던 정당에서 한때 지지를 획득하다가 선거에서는 1/5555(0.018%)차로 원내진입을 실패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었는데....
 
오늘은 5월 18일 보림 창작 그림책
서진선 글.그림 / 보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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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을 읽으며

올해 1월 한베평화재단에서 가는 평화기행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기행에서 나는 같은 운동조직에서 활동하는 동지와도 함께 갔다. 5박 6일간 갔고,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기행에서 상당히 친해진 선생님이 계셨다. 이 책의 주인공 서진선 선생이다. 사실 기행 첫째날부터 버스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 분도 뒷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고 너무나 다정해서 더 가까워졌던 것 같다. 여행 막바지에 한베평화재단 활동가인 짜노와 서진선 선생과의 대화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서 선생은 1980년 5.18 당시 고3으로 광주에 있었고, 비극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분이었던 거다. 그리고 작가로서 아이용 그림책을 썼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다. 얘기를 듣고나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도서관에 들렸다가 이 책을 어린이도서관에서 펼쳤다. 책은 아이의 시각으로 5.18을 설명한다. 책에는 5.18 당시 저자가 겪은 경험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아이가 기다리는 누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 비록 아이에게 계엄군의 물리적 폭력이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광주시민의 아픔이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5.18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은 하나하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저 계엄군에 맞서 저항했다. 중고등학생도 계엄군에 맞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저항했다. 시민군을 위해 거리의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헌혈을 했다. 이는 영화 ‘택시운전사‘에도 잘 묘사됐다. 심지어 성노동자도 시민들과 시민군을 살리기 위해 헌혈을 하며 참여했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에서 2개월간 일어났던 일이 1980년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리영희 선생이 표현한 것과 같이 말이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은 M-16 소총을 조준한 다음 군인을 환영하러 나온 초등학생에게 까지 발포했다. 군인이 자국 민간인을 평시에 이렇게 학살했다.

나는 광주를 절대 잊을 수 없다. 5월이 되면 항상 광주에 내려가려 한다. 광주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을때, 유혈없이 계엄이 해체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광주의 추억 덕분이다.

광주라는 역사적 경험이 우리를 살렸다. 우리모두 광주에게 빚이 있다. 그래서 5.18 역사왜곡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지난 2024년 5월 광주에 내려갔다가, 광주에서 5.18을 북한군의 개입이라 선동하는 극우를 봤다.

나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이 그 사람 입밖으로 나왔다.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5.18 광주는 44년 후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듣고 겪은 이야기를 그림 형태로 풀어낸 그림책이다. 그림과 사진이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임팩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도 이 책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잘 읽혀 5.18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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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은 미국과 일본이 교전을 벌인 전투 장소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자,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부터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주의 노선을 유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와 미국령 알래스카주의 알류샨 열도까지 점령했다. 1941년 12월 당시 일본은 영국령 길버트 군도의 타라와 환초와 타라와 근처에 있는 마킨 환초를 점령했다. 오늘은 타라와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이곳이 한국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타라와의 위치: 말 그대로 아시아쪽 태평양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섬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영토를 보면 매우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서쪽으로는 영국령 인도를 위협했고,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위협했으며, 북서쪽으로는 미국령 알래스카를 위협했다. 또한, 일본 해군은 1941년부터 1942년 초까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대표적으로 1942년 2월 27일 인도네시아 자바해에서 일본은 영국·미국·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를 상대로 경순양함 2대와 구축함 3대를 격침시키고, 중순양함 1대(당시 투입한 연합군 전력은 중순양함 2대 경순양함 3대 구축함 9대다.)에 심각한 손실을 야기했다. 또한, 연합군 병사 2,300명이 전사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36명이 전사하고 구축함 한 대가 심각하게 손실 당했다.

(타라와 해변의 모습)


(상공에서 촬영한 타라와의 모습)


그러나 이처럼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전황이 바뀐 것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미 해군에게 대패하면서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11척의 전함과 8척의 항공모함(이 중 4척이 주력 항공모함) 22척의 순양함, 65척의 구축함, 21척의 잠수함을 동원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고, 중순양함 1대를 잃었으며, 35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렇게 되면서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점차 패배하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2달 뒤 치르게 된 과다카날 전역은 일본이 미국과의 지상전에서도 패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과다카날 전역에서 미군은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은 2만 명 가까이 전사했으며, 결국 일본군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철수했다.


미군이 과다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1943년 2월 쯤이었다. 사실 이 시점은 전세가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유리해지는 시점이었다. 1943년 당시 전황을 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소련에게 패배했고, 더 나아가 소련은 8월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규모 전차전을 치른 뒤 승리했다. 또한,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투가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그해 7월에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과 본토에 상륙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동맹인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축출당하고 연합군이 접수한 이탈리아 남부에는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정부가 세워졌다.

(타라와 전투 관련 그 당시 미국의 보도)


따라서 1943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전황이 뒤바뀐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이 마킨 환초와 타라와를 점령한 것은 1941년 12월이었다. 비록 1942년 8월 중순에 미군이 마킨 환초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급습한 적은 있지만, 이 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1943년 전황이 급변하면서 미 해군 지도부는 일본 본토 및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이나 인도차이나 혹은 대만이나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즉, 그 과정에서라도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 바로 길버트 제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3년 11월 20일 미군은 타라와 섬과 마킨 섬 두곳을 그날 동시에 상륙 및 공격했다. 그 당시 미군은 2척의 항공모함, 1척의 경항공모함, 5척의 호위항공모함, 3척의 전함, 8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 17척의 수송선에 미 해병 2사단을 동원했다. 이런 화력을 동원했음에도 미군은 첫날 상륙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당시 타라와에는 일본군 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군이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 공격에 고전했다. 이날 상륙한 미군 중 5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 사진: 미군은 사흘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타라와를 점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과 수륙양용 장갑차)


(타라와 해변에 널부러진 미군 시신들)


미군 군함의 함포가 일본군 진지를 공격했지만, 일본군 거점을 부수지 못했기에, 결국 거점을 점령하는 것은 미 해병대 병사들이었다. 상륙한 다음날의 전투는 탱크와 수륙양용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가 일본군의 거점을 점령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영국의 군사사학자인 존 키건은 책에서 “타라와는 일본군이 지키는 가장 작은 섬을 차지하려는 싸움조차도 얼마나 무시무시할 수 있는지를 미 해병대에 가르쳐준 전투였다.”고 서술했다.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토치카와 벙커 그리고 참호의 방어를 돌파하여 점령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숫자로 보면 미군이 일본군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군은 5,000명인데 반해, 총 상륙한 미군은 18,000명이었기 때문이다. 타라와 전투의 치열함은 종군기자 로버트 셰로드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해병대원 한 명이 방조제를 뛰어넘어 코코넛 통나무로 만들어진 특화점 안에 TNT(폭약) 몇 덩이를 던져 넣기 시작했다. 해병대원 두 명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방조제를 기어올랐다. TNT 또 한 발이 특화점 안에서 터져 연기와 먼지가 뭉게뭉게 솟았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사람이 옆 출입구에서 뛰어나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화염방사기에서 뿜어 나온 강렬한 불길이 그를 휘감았다. 화염이 그에게 닿자마자, 그 일본놈이 필름 조각마냥 확 불타올랐다. 그는 즉사했지만, 까만 숯이 되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다음에도 그가 찬 탄대 안에 든 총탄이 꼬박 60초 동안 폭발했다.”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1)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2)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3)


타라와 전투 상륙 이틀째 되던 날 미 해병대원은 1,000명이 죽고 2,000명이 부상당했다. 이 무렵 일본군 일부가 바리키리 섬에서 타라와의 베티오 섬으로 지원차 접근하고 있었지만, 미리 정보를 입수한 미 해병대가 항공 지원과 전차, 곡사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들이 상륙하려는 순간 공격하여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타라와 전투가 후반부로 접어들 무렵 일본군은 미군에 맞서 이른바 반자이 돌격(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총검을 찬 소총을 들고 자살돌격을 하는 행위)을 감행했다. 당연히 총기 화력에서 일본군보다 압도적인 미군은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을 무력화했다. 결국 타라와 전투는 11월 23일에 종결됐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총 1,700명이 전사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추가적으로 호위 항공모함 1척이 침몰했다. 그에 반해 타라와에 주둔했던 5,000명 가까이 되던 일본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타라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일본군 생존율이 가장 낮은 전투였다. 1970년에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 통사를 집필한 존 톨랜드의 저서에 따르면, “5,000명의 일본 방어병력은 거의 다 전사했고,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은 17명 밖에 안됐다.”고 한다. 이걸 일본군 생존자 비율로 계산하면, 0.34%다. 말 그대로 병력 전부가 전멸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노동 병력 및 비전투원 병력의 생존률을 합쳐도 0.6%를 넘지 않는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처참한 비율이냐면, 이후 치르게 될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생존률은 1.2%였고, 타라와 이전에 치른 과다카날 전투가 2.8%였으며, 태평양 전쟁의 미군-일본군의 마지막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가 12%를 기록했다. 말 그대로 타라와 전투는 일본군 전원이 옥쇄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 참혹한 전투였다.

(비디오 머그에서 보도한 타라와 전투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영상)


(2019년 타라와 관련 한겨레 기사)


타라와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지만,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잊지 말아야할 역사가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일본군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조선인들도 전쟁 속에서 죽었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포로 145명을 붙잡았다. 즉, 앞서 언급한 17명의 일본군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 128명이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었다. 존 톨랜드에 따르면, 이것보다 1명이 더 많은 129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최소 1,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기록에 따라선 타라와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가 1,400명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1,200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전투 과정에서 사망한 것이다.

(2023년 12월 국내에 열린 타라와 전투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제)


2019년 10월부터 타라와 지역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의 유골을 찾아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19년 한국의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공식 확인한 한국인 희생자는 586명이라고 한다. 2018년 12월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타라와 전투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가족 391명에게 유전자 정보 채취를 요청했고 이 가운데 184명이 동의해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2019년 3월 법의학·법유전자·법화학 전문가를 유해가 보관된 타라와와 하와이에 보내 아시아계 희생자 유해 시료(뼛조각) 150여개를 가져왔으며, 유해를 국내로 가져올 계획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연기되었다가, 2023년 12월에 이르러 그 당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을 봉환했다. 한국과 타라와의 거리는 6,100km로 알려졌다. 이 거리만 보더라도 얼마나 멀리서 그들이 끌려왔는지 짐작이 된다.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 CD 케이스 정면과 후면)


이 글을 쓴 필자는 타라와 전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10대 때였다. 그 당시 필자는 FPS 게임(총쏘는 게임)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아는 사람에게 CD게임 하나를 선물받았다. 그 게임의 이름은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Medal of Honor Pacific Assualt)였다. 그 게임의 시작과 끝이 바로 1943년 타라와 전투였다. 타라와 전투가 수미상관적 구조를 이룬 게임이었기에 게임을 하면서 이 전투에 대해 알게 됐다. 반일 불매운동의 여파가 한참이던 때, 존 톨랜드가 쓴 책인 ‘일본 제국 패망사’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책을 코로나 초기에 3달에 걸쳐 완독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타라와 전투 당시 포로로 붙잡힌 사람들 중에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게 됐다. 컴퓨터 게임으로 알게 된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연관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일본 강제 징용으로 죽은 조선인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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