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당시 북한에서 발행한 몽양 여운형 우표)

 

무릇 인생길에는 곧을 정()자도 있고 갈지()자도 있다고들 말한다그러나 나는 여태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행운아였던가 싶다내 나이 고희에 이르러 새삼스레 지나온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특히 나의 인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 감회 깊이 추억하게 되었다민족 수난의 시기에 태어나 망국의 설움을 안고 파란만장의 풍운을 헤쳐온 나의 아버지 여운형(呂運亨)은 이 나라의 근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수많은 반일 애국 열사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후 여러 차례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와서 김일성(金日成주석을 만나보았다나와 동생 원구는 1946년부터 김 주석 댁에 살면서 공부하였고또 다른 동생 영구도 평양에 와서 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전쟁 때 죽었다난구 언니와 아저씨(이만규)는 1948년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때 평양에 왔고어머니와 동생 봉구는 전쟁 때 이북으로 왔다결국 우리 가족은 시기와 경로는 달라도 모두 이북에 모여 김주석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살았다그래서 나는 나와 우리 가족을 감히 김 주석과 한 식솔로 여기는 데 버릇이 들었다.

 

그런데 1994년에 갑자기 김 주석이 별세하였다내 머리에 흰서리 내리도록 주석님 앞에서 응석을 부리며 살아온 지난날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고 내가 오늘까지 곡절도 풍파도 모르고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라온 것이 누구의 덕이었는가를 날이 갈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된다그리고 떠나가신 지 반세기가 되었으나 오늘도 영생의 광망(光芒속에 살고 계신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오늘의 시점에서 재조명해 보게 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현재는 미래를 예언한다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한 생이 보다 값있고 아름답기를 바란다사람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놓고 아버지의 지나간 인생 행로를 파헤쳐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선뜻 펜을 들었다그러나 정작 쓰자고 보니 어려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워낙 졸문인데다 수집된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몽양 여운형 선생 가족분들)

 

아버지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한창 벌이던 젊은 시절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고 철이 들어서는 아버지와 함께한 기간이 너무 짧았다내가 알고 있는 자료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생활 외에 아버지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친지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전부다그것도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것이 유실되고 삭막해졌다아직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더듬고 되살리고 모아서 쓰다 보니 아쉬운 것도 많고 공백도 많다나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대하여 밝히고 싶다.

 

첫째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독립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초기부터 풍파 사나운 이국 땅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어떻게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구김새 없이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가.

 

둘째일제통치의 가장 엄혹하던 시기에 숱한 선각자들과 유명인사들이 독립운동을 외면하고 포기하며 일제에게 아부굴종할 때 아버지만은 독야청청하면서 마지막까지 민족적 지조를 견지하여 나갔는데과연 그러한 힘의 원천그 강의한 신념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셋째지난 시기에 나온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글들에서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되고 축소된 것들을 바로잡고 보충하고자 하였다.

 

자식인 내가 인생 황혼기에 아버지의 인생 행로를 더듬어 보게 되는 것은 자못 감회가 깊은 일이다나는 아버지가 길지 않은 인생 길에서 남들보다 곡절도 풍파도 괴로움도 많이 격었지만 뜻을 바로 세우고 끝까지 깨끗하게 열렬하게 산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비록 미숙하나마 이 글이 아버지 여운형의 지향과 포부의지와 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미흡한 점에 대하여 독자들의 사려 깊은 양해를 빌면서.

 

평양에서

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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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전투 : 3부작 '역사의 멈춰진 미래로부터' (3disc)
지니어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칠레 전투 감상평 : 노동자 민중 권력의 투쟁사를 보며

라틴 아메리카의 근현대사는 한국 근현대사 처럼 여러모로 다이나믹하다. 슬픈일도 많았고, 믿기 힘들일도 많았으며, 희망찬 일도 있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하다 그린베레가 이끄는 토벌대에 체포되어 목숨을 잃은 체게바라는 68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서구의 젊은이들은 마오쩌둥과 호치민 그리고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체게바라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확장이 멈추는 것 처럼 보였다. 1959년에 혁명이 성공한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정치공작과 경제제재에 시달렸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CIA의 개입은 더 극심해졌다. 그러던 1970년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는 세계적으로 놀랄 일이 일어났다. 바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영화 칠레 전투는 총 3부작으로 되어있다. 영화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당선되는 시기부터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집권기 3년 동안 노동자 민중이 어떠한 힘을 발휘했는지도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옌데 정권은 소위 민주적인 의회제도를 기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가고자 했다. 특히나 미국 독점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던 칠레 구리광산에 대한 국유화 및 교육과 의료 그리고 주거등의 무상복지 정책 실현이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회주의자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례는 그 당시 기준으로 없었다. 영화 초반에는 당시 칠레의 선거 분위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들은 김칫국부터 마시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최종적인 개표결과 좌파의 승리였다.

아옌데 집권 3년 칠레는 참으로 많은 조직들이 활동했다. 당장 좌파만 보더라도 마오주의 성향 단체부터, 사회당, 공산당 그외의 좌파단체가 우후죽순 처럼 퍼져있었다. 우익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부터, 아예 나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파시스트들 그리고 아옌데와 우익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는 기독민주당 등이 있었다. 즉 이것은 다양한 세력들이 칠레에 있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아옌데 정부를 반대했던 우익들의 논리는 확실했다. 사회주의자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라가 혼란 스러워졌고, 사회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혼란과 사회의 마비를 초래하는 이유의 대다수는 바로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우익들에게 있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정권 초기부터 칠레에선 CIA의 지원을 받은 정치공작과 테러리즘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72년에 있던 어용운수노조의 대대적인 파업도 그것의 연장선상이었다.

우익들과 어용노조는 이런 혼란을 야기시킴으로써 아옌데 정부를 압박했지만, 민중과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왜일까?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사회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왜 아옌데를 선택한 것일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아옌데 정부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착취받고 억압받아온 민중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칠레의 일반인민들은 아옌데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이들 대다수는 ˝아옌데가 집권한 이후 경제가 어려워도 우리를 위한 정책을 했고, 그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이 아옌데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이 민중권력은 결국 무너졌다. 그 이유는 바로 닉슨 정부가 계획한 쿠데타 때문이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 세력은 9월 11일에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의 지원을 받는 군대로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아옌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닉슨 정부가 쿠데타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해가며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견딜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이유가 어찌됐든 그들이 칠레에서 저지른 짓은 명백한 테러리즘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인 3부는 제목처럼 칠레 ‘민중의 힘‘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민중가요인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처럼 단결한 민중의 힘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위대했다. 이들의 단결한 힘은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전까지 제국주의와 우익들의 온갖 공작과 음해 그리고 테러리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했다. 영화 보는 내내 이러한 모습들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특히 민중에게 단결을 호소하는 아옌데의 연설은 감동 그 자체다.

영화에서 아옌데 정권을 지키려는 민중들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능동적이다. 아옌데 또한 민중들에게 능동적 참여를 호소하여 제국주의와 우익들의 거짓과 왜곡에 맞서 투쟁한다. 사회주의가 왜 옳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았을 때 민중이 가지는 힘과 위력이 어떤 것인지,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단결했을 때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영화상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최근들어 칠레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2019년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힘을 얻었고, 올해 10월에는 신자유주의의 잔재와도 같은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했다. 또한 아옌데의 유산이 다시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 칠레 전투는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생생히 기록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단결한 민중의 힘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무너진 경험이 있었더라도 말이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를 봤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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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만주에 있던 소련군은 대규모의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몇 개월 전부터 전쟁준비를 마친 소련군은 곳곳에서 명실상부 일본군 주력부대나 다름없던 관동군을 손쉽게 궤멸시켰고, 만주와 중국 일부, 몽골, 남사할린, 쿠릴열도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했다. 이러한 진격은 작전을 개시한지 불과 10일도 안 되는 사이에 전개됐다. 당시 만주에서 군사작전을 지휘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1895930일 러시아 볼가 강 유역에 있는 이바노프 주 노바야골리티하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당 성가대의 지휘자로, 나중에 러시아정교회 신부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수입이 좋지 않았던 바실렙스키의 가족은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농장에서 일해야 했고, 바실렙스키도 마찬가지였다. 1909년 여름 신학교를 졸업한 바실렙스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또다른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학생운동과 자본가의 착취에 반대하는 파업 시위 같은 각종 활동에 참가했고, 이런 경험은 바실렙스키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152월 모스크바로 가서 훗날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로 이름이 바뀌는 알렉세예비치 군사 학교에 들어간다. 거기서 4개월 동안 속성 훈련을 받았고, 졸업 후 곧바도 예비군에 배치되어 준위 계급장들 달았다. 1916년 그는 전선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고, 러시아 제국 군대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19171110월 혁명과 부대 안에 있던 볼셰비키 세력의 영향을 받은 바실렙스키는 계급장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194월 적백내전이 격화되자 징집되어 붉은 군대의 군관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소련 붉은 군대와 그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붉은 군대에 들어가게 된 바실렙스키는 이른바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전투를 치렀고, 부대내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단장, 참모 등을 거쳐 소장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실렙스키는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3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핀란드 전쟁 즉 겨울전쟁에서 총참모부의 작전부 부부장 신분으로 겨울전쟁 작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겨울전쟁 이후 바실렙스키는 히틀러와 독일이 가장 위험한 적이 될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은 1941년에 실현되었다.

 

19416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바실렙스키는 작전부장과 참모부총장에 임명된다. 그해 10월 초 그는 모스코프스키 지역으로 가서 후퇴한 부대를 모아 방어 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작전 참모팀의 책임자였던 그는 뛰어난 성과를 올려 중장으로 승진하기에 이른다. 19425월 소련 참모총장이 된 바실렙스키는 전쟁 중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힘썼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도 참가하여 194322일 독일군 수십만 명을 포위하기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바실렙스키는 각 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돈바스 전투, 쿠르스크 전투, 크림 전투 그리고 벨라루스 전투 등을 지휘햇다.

 

벨라루스 전투는 소련이 겪은 전투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으며, 준비 과정에서 이른바 바그라티온이라는 명칭을 가진 바그라티온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을 통해 소련군은 군사 본부가 더욱 효과적으로 각 부대를 제어할 수 있게 하고, 새로 편성된 부대의 사령관을 맡을 인재오 추천했다. 이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벨라루스 전체가 독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19454월 바실렙스키는 극동 작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그해 7월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에 있던 작전에서 바실렙스키는 15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을 지휘하여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궤멸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일본은 1945815일 소련의 만주 진격에 따라 전의를 잃고 항복을 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바실렙스키는 참모총장, 국방부 제1부부장, 국방부 총감 등의 직위를 거쳤고 소련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남은 여생을 보내던 바실렙스키는 197725일 사망하여, 소련군에서 세웠던 공로에 따라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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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던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친필을 남겼다. 그 친필은 바로 성전만리. 조국을 떠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박정희의 친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우방국 미국을 도와 자유민주주의 남베트남을 수호하는 전쟁이었다. 이것은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그리고 린든 존슨 등이 인식하던 이른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와 다르지 않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국가적으로 체계화시킨 저급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반공주의(Anti-Communism). 애초에 군사혁명 공약 가장 먼저 서술한 것이 반공을 국시의 제1로 한다였을 정도로 매카시즘급의 반공주의를 강조한 박정희 정권은 당연하게도 베트남 전쟁을 반공성전과 같은 시각으로만 접근한 것이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파병할 당시 이러한 반공주의적 시각에 반대한 참된 지식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사상의 은사라고 불리는 리영희다. 1974년 그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해방전쟁인지를 객관적 근거에 입각하여 입증해냈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이 왜 민족해방전쟁인 것일까?

 

그 이유는 베트남의 19세기 그리고 20세기의 근현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에 응우옌 왕조를 거치던 베트남은 1858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다. 1858년 베트남의 항구도시 다낭에 상륙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지역 전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들은 베트남을 북부는 통킹 중부는 안남 남부는 코친차이나로 삼등분하여 통치했고,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워 통치했다. 프랑스 치하의 베트남에선 판보이쩌우와 같은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 놓여있던 1890년 베트남 응에안 성 낌리엔 마을에선 미래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강대국들은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열고,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를 주창했고, 이에 감명 받은 20대 청년 호치민은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청원했다. 그러나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와 서구 제국주의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따라 호치민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에 감명을 받는다. 따라서 1923년 모스크바로 가서 훈련받은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와 교육 및 혁명운동 건설에 이바지했고, 이에 따라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홍콩에서 창당한다.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한참이던 1940년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이에 따라 당시 독일의 동맹이던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접수했다.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이 베트남을 점령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사악함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1941년 중월국경지대에 잠입하여 30년 만에 귀국한 뒤 이른바 혁명조직인 베트민(Viet Minh)을 창설한다. 베트민은 계급 출신성분을 망라한 혁명조직으로 항불항일의 기치를 들고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OSS팀이 베트남에 잠입하여 이들과 협력하여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19458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끝났고, 미국 또한 더 이상 베트민을 훈련시킬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호치민은 베트민에게 봉기를 호소하여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19459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 독립을 선언한다. 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처럼 신탁통치를 합의본 연합국은 북위 16도선에 따라 북쪽은 중국 국민당군 남쪽은 영국군이 접수하게 했다. 베트남 문제에 관심 없던 영국은 옛 지배자인 프랑스를 다시 끌어들였고, 중국 국민당 또한 내전의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한다. 베트남을 다시 지배하고 싶었던 프랑스는 호치민의 베트민과 합의를 보려고 했지만, 예전에 일본이 내세웠던 괴뢰 황제 바오다이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대하려 했다. 이런 과정에서 194611월 프랑스의 군함대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포격했고, 민간인 6,000명을 그날 사살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자, 베트민을 이끌던 호치민은 전인민의 항쟁과 투쟁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베트남 민중과 혁명군대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하게 된다. 전쟁 초기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는 것 같기도 했지만, 1949년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소련의 스탈린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전세는 베트민군에게 유리해졌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프랑스에게 전쟁물자와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지원은 대대적으로 증가하여 1954년에 이르러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미국이 대신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점차 베트민에게 유리해졌다.

 

한국전쟁이 끝나던 1953년 베트민과 프랑스측은 제네바에서 회담을 준비하면서도 서로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는데, 그게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앙리 나바르의 지휘를 받은 16,000명의 프랑스 최정예 부대는 디엔비엔푸 요새를 철벽같이 방어했지만, 베트남의 명장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장군은 앙리 나바르가 상상하지도 못한 전략전술로 디엔비엔푸를 포위하여 56일만에 함락시켰다. 이게 195457일이었다. 프랑스 최정예 부대 11,000명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고, 프랑스는 결국 제네바 협정을 통해 물러나게 됐다.

 

프랑스가 물러나자 이번엔 또 다른 강대국이 적극적으로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다. 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개입해오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된 베트남 상황에 개입했다. 당시 미국은 프랑스가 내세우던 괴뢰황제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남베트남에 새로운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 남베트남에 괴뢰국을 세운 미국은 당연하게도 2년 이내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이에 따라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자신 만에 왕국을 건설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딘지엠 정권은 반민중적이고 부정부패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에 반대한 민중은 1960년 남베트남에서 새로운 조직을 창설하는데 그게 바로 베트콩(Viet Cong)이다.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은 1960년에 새로 당선된 존F.케네디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했다. 1961900명이었던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1963년에 이르러 16,000명을 돌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응오딘지엠은 여전히 유지되지 못했다. 19636월 남베트남의 고승 틱광둑이 소신공양을 하고, 민중은 디엠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고, 베트콩 또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투쟁했다. 결국 응오딘지엠은 CIA의 계획에 따라 암살당한다.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선 군벌들의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언급한 바와 같이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치밀한 자작극이었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이후 1965년 미국은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 하여 북폭을 개시한다. 그리고 그해 3월 다낭항에 미지상군 3,500명을 상륙시킨다.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1967년 말에 50만 명을 돌파했고, 전사자도 2만 명을 돌파했다. 또한 B-52와 같은 최신식 폭격기들은 남북 베트남 전역을 초토화 시키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죽게 된다.

 

1965년 전면 개입한 이래 미국은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은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구정 공세(Tet Offensive)를 감행하면서 폭로된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은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의 암살과 68혁명의 흐름에 따라 대대적인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베트남화(Vietnamization)라 하여 단계적인 철수를 실행한다. 이 과정에서 1970년 캄보디아와 1971년 라오스를 침공했지만, 남베트남 철수과정을 단계적인 절차를 밟았다.

 

1972년 마지막 협박으로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지만, 1973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완벽히 철수하기에 이른다. 1973년에 미국이 철수하자 남베트남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 1965년에 정권을 잡은 응우옌반티에우(Nguyen Van Thieu) 정권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197412월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통일을 위한 계획을 준비했고, 1975년 초에 이를 실행했다. 19753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공세를 가하자 남베트남군의 거점은 신속하게 무너졌다. 부온마투옷, 다낭, 후에 등의 도시가 단숨에 함락됐고, 4월 말엔 쑤언록의 방어선마저 함락됐다. 19754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진입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대통령궁을 부수고, 남베트남의 임시지도자인 즈엉반민(Duong Van Minh)에게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이로써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지금까지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얘기해봤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하여 전개된 베트남 민중의 투쟁이었다. 즉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가 치르던 침략전쟁의 연장선상이었다.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의 경우 지도부 대다수가 식민지 시절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협력했던 인사들이었다. 심지어 150만 명의 규모를 자랑하던 남베트남 군대의 지휘관이나 장교들 중에는 딱 한사람 그것도 육군 중령 한 사람만 식민지 시절 베트민에서 활동한 사람이 존재했다. 그 외에 나머지 군장성들은 죄다 프랑스에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박정희가 주장한 반공선전 자유민주주의 따위의 용어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역사왜곡적인지 알 수 있다. 즉 미국과 한국 그 외의 자유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참전한 동맹국들은 민족반역자 세력을 도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를 이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이런 본질이 너무나도 명확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아직도 자유니 민주주의니 돈을 벌었다니 하며 치켜세우는 대한민국 반공주의자들의 시각과 주장들이 참으로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1960년대 당시 리영희 선생께서 주장하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은 지금기준으로도 1%도 틀리지 않은 명백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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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에서 연작으로 방영하고 있는 리영희 선생의 인생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리영희!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각성시켰던 인물로, 사상의 은사라 불렸던 저항적 언론인이었다. 40년의 인생을 오로지 펜을 들고 저항했던 그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에 있는 인물들에게도 젊은 시절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현재 노무현 재단에 있는 유시민부터, 현재 대통령인 문재인, 화가 임옥상씨, 현재 성남시장인 은수미씨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 있는 군포시 중앙도서관 1층에는 살아생전에 리영희 선생께서 도서관에 기증하신 책들을 모아놓은 장소가 있다. 리영희 선생이 기증한 책 대다수는 선생의 흔적과 손자국이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준다. 즉 이 책들은 리영희 선생이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큰 역할을 했던 책들인 것이다. 나 또한 리영희 선생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 총 사령관을 지낸 밴플리트의 통역을 담당했을 정도로 뛰어난 영어 실력을 소유했던 그는 권력형 지도자이자 독재자였던 이승만과는 달리 권력과 권위에 아부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는 길을 걸었다. 설사 자신이 삶이 윤택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러한 부분이야 말로 리영희 선생이 정말로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그는 수십년간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오로지 진실을 탐구하고, 또 밝혀냈다. 그는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독재 정권 그리고 전두환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반공주의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세계관을 거부했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치에 항상비판적이었던 그는 1960년 혁명 당시 단순히 취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와 함께 이승만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을 때, 그러한 소식을 외신을 통해 가장 먼저 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미국의 존F.케네디 대통령과 회담을 했을 때, 수많은 족벌 어용 언론들은 마치 한미관계가 동등한 위치에서 혹은 형제애적인 관계에서 잘 해결된 것처럼 보도했지만, 그는 미국 측 인사들의 인터뷰를 통해 자료를 모아 당시 어용언론이 보도하지 않던 진실을 보도했다. 그리고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이 강요하던 북괴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북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아주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1960년대 기자로써 했던 가장 훌륭한 업적은 바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진실탐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1965년부터 전투부대를 파병하던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공산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우방국 미국을 도우러 간 반공성전”으로 보도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던 어용언론들도 그렇게 보도했으며,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당시 베트남 전쟁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주장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지를 단순히 반대하는 걸 넘어서 구체적인 자료와 근거를 통해 체계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1960년대 당시 진행되고 있던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침략전쟁이라는 사실과 북베트남 호치민과 공산당을 따르는 베트남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박정희 시대가 강요하던 지적 사상적 암흑기에 오직 언론인 리영희만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보도했었다.


리영희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20대 중반인 내가 어떻게 해서 리영희 선생을 알게 되었고, 존경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내가 리영희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었다. 우연히 민족문제연구소 관련한 자료를 찾던 나는 ‘리영희’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리영희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김삼웅 선생이 쓴 ‘리영희 평전’을 공익근무를 하던 당시에 읽게 되었고, 진실을 탐구했던 언론인 리영희의 생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다. 1970,80년대 당시 운동권과 민주화운동세력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전환시대의 논리’는 나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삼웅 선생의 ‘리영희 평전’과 ‘전환시대의 논리’는 내가 리영희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뉴스타파에서 리영희 선생의 일생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리즈로 방영하는 중이다. 참으로 반갑고 가슴이 벅찬다. 앞으로의 다큐멘터리가 매우 기대된다. 이 글을 읽은 이들도 뉴스타파에서 방영하는 리영희 선생 다큐를 많이 시청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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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0-12-19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리영희 선생을 오래전
조정래의 <한강>을 읽다가 주인공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는 걸 보고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통킹만 사건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보여준 책이었어요^^

NamGiKim 2020-12-19 16:25   좋아요 1 | URL
제 블로그에 올린 통킹만 사건 관련 글도 전환시대의 논리 참고했습니다. 매우 좋은 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