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통일 세대 - 미래 세대를 위한 북 바로 알기
김이경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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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에 앞장서고 있고, 내 페친이기도 한 김이경 선생의 <우리는 통일 세대>를 읽었다. 내가 북에 대해 좀 더 북의 관점이나 반공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애초에 대학교 1학년을 시작하던 2014년은 박근혜 정권 1년차라 시대적 분위기가 극우세력들의 힘을 얻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점부터 갑자기 뉴라이트에서 마구잡이로 집필한 이승만 미화물이 줄줄이 출간했고, ‘국제시장’, ‘태양의 후예’,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등과 같은 반공정신을 고취시키는 영화나 드라마가 대대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나는 박근혜와 뉴라이트를 싫어하면서도 북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나마 북한을 보다 이성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군복무 말기인 2018년이었다. 그때 읽은 신은미 선생의 책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쓴 책 그리고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을 읽으면서 보다 북한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회담이 개최되던 2019년 초 당시 나는 북미정상회담이 잘 마무리 되면 종전협정과 남북 자주 왕래가 꿈만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쉽게도 협상의 결과는 결렬이었다.

 

비록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는 결렬이었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부터 시작된 남북화해무드는 이명박근혜 시절 대립과 적대주의로 포장되었던 한반도 정세에 평화라는 한 줌의 희망을 가지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북한을 새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였다. 이런 정세를 거치고 변화를 보면서 나 또한 북한이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싶었고, 실제로 자기검열이라는 차원에서 반북주의를 최대한 배척하고자 많이 노력해왔다. 2년 전 사회학 교수인 김귀옥 교수님의 수업도 북에 대한 그런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는 이 전무후무한 질병에 발목이 묶인 상태다. 해외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시대다. 북한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초기인 20201월 국경을 원천 봉쇄했다. 따라서 북한을 공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는 죄다 막힌 셈이다. 물론 1월부터 국경을 원천 봉쇄했기에, 북한은 현재도 2021년 새해에 평양에 모여 신년축하행사를 그것도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만약에 북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했다면 구호물자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북한은 현재 내부 시스템 안에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를 일반적인 한국인들에게 거리낌 없이 하면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거나 주장을 한 이를 친북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의심하고 본다. 즉 북한이라는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나빠야 하고 불행해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기원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그 이전부터 반공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민주화를 거치면서 예전만큼의 반공주의는 보편적으로 희석되긴 했지만, 북에대한 인식은 여전히 객관적이지 못하다. 쉽게 말해 우편향적이다. 이러한 영향에는 저자가 주장하듯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에서 퍼뜨린 거짓뉴스의 영향이 크다. 책에 나온 저자의 주장을 인용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회이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상적인 사회도, 절대 나쁜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북녘을 뿌연 잿빛의 나라, 가난함과 절망이 흐르는 땅으로 알고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인 북이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가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차이를 극단적인 이분법, 빨갱이라는 잣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나라에서 살아온 우리는 사회주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분단 체제에 편승해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온 수구적폐 세력은 온갖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북을 악마로 만들어왔다. 북 고위층 인사가 처형되었다는 남녘의 언론 보도 후 다시 그들의 건재가 확인되어도 오보를 낸 언론은 반성하기는커녕 정정한 적이 없다.”

 

출처: 우리는 통일 세대 p.7~8

 

저자가 주장처럼 우리가 언론을 통해 받아들이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서구편향적 혹은 반공적으로 가공되는 정보가 많다. 또한 우리는 북한이라는 대상을 인식할 때, 독재나 굶주림과 같이 미국 부르주아지들이 타국가를 침략할 때 사용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구실들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북한이라고 해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사악한 경제제재의 합리화 논리로 사용된다는 점을 적어도 인지해야 한다 생각한다. 특히나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책의 제목 우리는 통일 세대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미래의 통일 세대와 현재 통일을 준비하는 세대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한 북한을 알려주고자 책을 쓴 것 같다. 책은 북한 청소년들의 교육과정이나 성장기, 북한 인민들의 일반적인 삶, 북한의 종교활동, 북한의 의료 정책, 북한의 경제 활동 등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북한의 근현대사와 더불어 북한의 문화예술 그리고 부록으로 수도 평양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처음 알기도 했다. 얘를 들면 북한의 김일성 대학 교수들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매주 한 번씩 금요노동을 자발적으로 나간다는 내용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이 점에선 쿠바 혁명 이후 체게바라가 쿠바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자발적으로 노동을 했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다. 심지어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2005년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공학부에 항생제 제작 공장 시설 건설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저자와 한국의 기술자들이 런닝 바람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던 분들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책을 읽은 나 또한 이 부분에서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그리고 무상주택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틀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에는 토착 자본가가 없다. 물론 북한에도 빈부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빈부의 차이가 있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돈을 자본의 형태로 투자하여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즉 자본가가 없다는 것은 땅, 건물, 공장과 같은 사회의 공공재들이 개인 소유가 아니며, ‘자산소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별 초과이익은 기업소 노동자들에게 배분된다. 또한 북한의 회사나 사회 시스템은 상명하복식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불편함을 겪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기도 하다.

 

북한은 쿠바와 더불어 무상의료 시스템을 사회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 비하면 기술이나 설비부분에서 부족함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무상의료다. 일례로 의도치않게 탈북하여 한국에 온 김련희씨의 경우 한국 생활 초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그냥 나왔다가 길거리까지 간호사가 달려와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무상의료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7년부터 사회보험법을 제정하여 일단 노동자와 사무원, 임산부와 3세 미만 아동까지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1월 무상의료의 범위를 개인상공업자와 개인농을 제외한 전 인민으로 확대했으며, 전후복구를 완수한 1958년에는 개인병원이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북한은 무상의료제도를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지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의료는 진단, 검사, 치료, 수술, 입원 등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 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부담을 국가가 부담한다는 뜻이다. 책 저자에 따르면 북한은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에 무상의료 체제를 다른 나라의 일반의료 수준으로 올려놓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주제를 얘기하자면 북한의 군대 관련한 얘기다. 대한민국에 사는 남성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최소한 면제를 받지 않으면 말이다. 우리는 군복무 2년만 해도 사회의 불만이 많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북한은 군복무를 10년씩이나 해도 내부의 불만이 생각보다 없다. 이런 궁금증은 개인적으로 항상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궁금증이 풀렸다. 책에 따르면 북한이 완벽한 징병제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일단 북한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일단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 후 모집 대상으로 검토되고 직장에 취업한 지 3년이 넘으면 모집 대상에서 제외된다. 신체검사 불합격자, 적대계층 자녀, 과학기술산업 관련자, 예술교육 종사자, 특수 영재학교 학생, 부모가 고령인 독자 등은 처음부터 제외된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당 간부의 자녀일수록 군 복무가 필수사항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부모가 군 복무를 반대하면 입대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이런 점에서 우리하고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북한인민들이 군대를 인식하는 것도 우리하고는 다르다. 북한에서는 군대가 주민들에게 선망 받는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 근본적인 이유는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1932년 만주에서 시작된 항일 유격대에 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인민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역사적으로 항일투쟁을 했고, 소련, 중국과 더불어 조국해방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이 강하다. 이런 점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이나 베트남의 베트민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북한에 대해 정말 다방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쉽고 재밌게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의 그런 점이 좋았다. 하지만 일부 내용들은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 부분들은 솔직히 학계의 교차검증과 더불어 팩트체크가 필요하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보다 앞서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얘기나, 평양의 단군릉 혹은 북측 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동강 문명 등은 솔직히 역사학을 공부한 나로썬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렇다 해서 책 자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굳이 책의 내용에 대해 내가 얼마만큼 공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80%는 공감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아까 전에 지적한 그런 부분은 나머지 20%에 해당한다.

 

부록에서 평양 설명하며 다룬 릉라도의 곱등어관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하자면, 책에는 곱등어란 돌고래의 일종이라고 나온다. 사실 돌고래를 얘기했을 때 떠올리는 대부분의 돌고래는 큰돌고래(혹은 병코 돌고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국내에 많이 서식하는 돌고래는 남방큰돌고래인데, 책에 첨부된 사진을 봐서는 남방큰돌고래보단 큰돌고래 그러니까 병코 돌고래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추측으론 아마 북에서 얘기하는 곱등어는 병코 돌고래를 뜻하는 것 같다.(어디까지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게 나을 것이다.) 한가지 사실을 더 붙이자면 물개쇼에 등장한 물개는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바다사자(강치)가 분명하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북에 있는 느낌도 살짝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남북교류가 형성되면 나 또한 공식적으로 북을 방문해보고 싶다. 그것이 평양이 됐던 개성공단이 됐든 금강산이 됐든 말이다. 아무튼 책 내용이 대체로 좋다. 저자가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상당히 공감된다. 나 또한 평양에 놀러 가보고 싶다. 물론 합법적인 선에서 말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양의 동물원과 곱등어관도 방문하고 싶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항일 유적지도 답사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에 대한 얘기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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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왕조 시대 베트남 영토)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다대략 2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을 해왔는데이러한 역사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투민족이라는 표현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련 있을지도전투민족일수록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으니베트남의 고중세사를 보면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의 군대 그러니까 몽고의 침략을 막아낸 적이 있다. 1288년 제3차 원정을 단행한 몽고군대가 박당강에서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가 이끄는 군대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는데이것이 몽고군의 마지막 침략이었다이로써 베트남은 세계 제패를 이룩했던 몽고의 침략을 무찌른(그것도 3번씩이나나라가 되었다.

(응오꾸옌 그림)

 

그러나 몽고군을 무찌르기 정확히 350년 전 베트남은 똑같은 장소에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가 있었다당시 응오꾸옌(Ngô Quyền, 한자로는 오권)은 그 곳에서 독립을 쟁취했다그 독립을 이루게 한 전투가 바로 938년에 있던 박당강 전투다그 이전의 베트남 역사는 사실상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그로부터 1,000년 전 쯩 자매가 코끼리를 타며 한나라에 맞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중국의 지배는 강력했다응오꾸옌이 중국에 맞서 대항하던 시기는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였다.

(하노이 썬떠이 시사에 있는 응오꾸옌 상)

 

900년대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 중국 남부 지역에 나타난 남한은 베트남을 침략했었다남한의 침략을 받던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권 안에 머무르려는 세력과 중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루려는 세력으로 나뉘었다이 중 33살의 응오꾸옌은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당시 그는 남한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이후 그는 봉기를 일으켜 남한에 대항하고자 했다이러자 중국의 지배권에 머무르려 했던 끼에우꽁디엔은 매국적인 행동과 더불어 남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이리하여 당나라의 후신인 남한은 바다와 육지 두 갈래로 나누어 침략에 나섰다.

(박당강 전투 당시 군대를 지휘하는 응오꾸옌)

 

남한이 침략하자 응오꾸엔은 대담한 작전으로 침략군을 각개격파에 나섰다응오꾸옌이 이끄는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북진해 다이라에 주둔하고 있던 끼에우꽁디엔의 군대를 기습하여 궤멸시켰다그런 다음 그는 군대를 박당강 기슭에 매복시키고 남한군이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기를 기다렸다물론 침략군에 맞서 준비도 철저히 했다그는 먼저 강바닥에 끝을 쇠로 덮은 나무기둥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남한의 수군이 나타나자 응오꾸옌은 전투를 벌였다그러다가 패해 달아났는데이것은 위장전술이었고 남한군을 강 상류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박당강 전투 상상화)

 

남한군이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조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자 거짓 도망하던 베트남 수군이 반격했다이와 동시에 강가 풀숲에 염초와 건초더미를 준비하고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공으로 남한군을 공격했다강바닥 기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남한의 함선 수백 척이 불에 탔고남한의 병사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이로써 당나라의 후신 남한의 베트남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대월사기전서에는 응오꾸옌이 박당강에서 거둔 승리를 칭송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응오왕께서 군사를 모아 유홍조의 수십만 군사를 물리치고 개국하시어 북방인들로 더 이상 남진을 못하게 하셨다화를 내심은 민을 안위함이요뛰어난 지략은 적을 단번에 물리치기 위함이시라왕이라 칭한 채 비록 칭제를 안 하시고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 대월의 정통을 확연히 재연하지 않으셨는가.”

(박물관에 전시된 박당강 전투 모델)

 

박닥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베트남은 쯩 자매가 대중항쟁을 벌인지 1,000년 만에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이에 따라 응오꾸옌은 박당강 전투 승리 이후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939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이렇게 해서 베트남은 최초의 독립왕조인 응오왕조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박당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에 있어 상징적인 전투다무엇보다 1,000년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와 자주적인 왕조를 세웠기 때문이다비록 응오왕조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무너졌지만독립투쟁을 통해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웠다는 점에서 베트남 역사에 상징적인 의미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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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제1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맥아더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만주의 핵공격을 주장했다가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다.)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은 한국전쟁에 있어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작전이었다이 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전세는 인민군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으로 역전되었고, “미군의 군사개입이 강해지기 전 전쟁을 끝내버리겠다는 북한 측의 목적을 말 그대로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이러한 군사작전이었기에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인천상륙작전은 역사교육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인기는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아직도 인천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동상이 버젓이 서있는가 하면박근혜 정권 말기에는 고증이 엉터리인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2016)’이 개봉하여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을 받으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물론 태극기 부대 아저씨들의 단체관람 같은 주작질과 반공홍보질이 있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자 전국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은 민중들의 손으로 부서지거나 철거됐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에는 헌화가 대대적으로 바쳐졌다. 4.19 혁명 이후 한국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맥아더와 그가 전개한 인천상륙작전은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비록 반공주의적 교육의 효과이긴 했지만 말이다따라서 이번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낙동강 전선, 당시 인민군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한국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다. 38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한 북한의 인민군은 불과 2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낙동강 전선까지의 인민군의 진격은 말 그대로 연전연승이었다심지어 7월 초에 투입된 미군 제24 사단의 1개대대도 남하하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참패를 당하고 패주했었다분명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즉각적이었음에도 미군은 인민군에게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할 때까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1950년 8월부터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이른바 워커라인(Walker Line)을 형성했는데8군 사령관(조지 패튼 장군의 충실한 수하이기도 했던)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낙동강 전선이었다. 1950년 8월부터 형성된 낙동강 전선은 말 그대로 전선 전역이 피바다였지만전세는 점차 인민군에게 불리해져 갔다특히나 9월에 있던 총 공세에서 인민군의 전력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더욱이 식량 보급은 정량의 절반 또는 1/3 이하로 줄어들었다거기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낙동강 전선에 있던 미8군 또한 반격 여건이 조성되었다또한 한국군과 유엔군측은 임시수도 부산을 통해서 병력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형 상으로 보기엔 인민군이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인민군의 거의 모든 전력은 낙동강 전선에 있었다그리고 이미 인민군은 남한 땅의 90%를 접수한 상태였다지형 상의 형식과는 달리 인민군의 사정은 힘들었다무엇보다 미군이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16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각종 대량살상을 기반으로 한 폭탄을 자신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이다거기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 중의 하나인 포항의 경우 미 해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인민군의 진격이 어려웠다.

(인천상륙작전 상륙 전개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엄청난 화력을 부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피비릿내 나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사이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사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것은 전쟁 발발시점 4일인 6월 29일이었다고 한다그가 판단하기에 북한군의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상대편 배후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한국의 서해는 갯벌도 있고 수심도 얕아서 해상작전을 하기에는 부적합 했다.

(상륙작전 당시 동원된 미군 전투기, 아마도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로 추정된다.)

 

일단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컸고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를 비록한 섬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상륙을 위한 LST정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수심이 50m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썰물 때는 불가능했다따라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려면 3~4시간 정도의 밀물 때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7월 초 맥아더는 미 극동사령부 작전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을 합동전략작전기획단장으로 임명했고유엔군 사령부는 7월 23일에 상륙작전계획을 암호명 크로마이트로 명명했고, 7월 말부터 인천항 일대의 해양 상태와 경계태세를 조사하는 등 상륙작전 준비를 서둘러 시작했다이렇게 8월과 9월을 거치며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할 준비를 마무리 하기에 이르렀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측 지도부가 아예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그들 또한 인천항에 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하지만 기뢰를 부설하는 데는 실패했다아무튼 그들 또한 미군의 반격을 예상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한국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지휘를 받은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이 작전에 총 270척의 함대와 8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벙력을 포함하고 있었고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총 병력은 13,000명에 달했다당시 상륙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필리핀 레이테만 상륙작전에서 해군지휘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유엔군에게 항복한 인민군)

 

이렇게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그 다음날인 16일 유엔군이 인천을 탈환하며 성공으로 끝났다인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인민군 2천 명은 거의 전멸했고이것은 인민군에게 위기로 다가왔다방어가 워낙 미약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거의 사상자 없이 인천 시가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상륙작전과 인천 탈환까지 전사한 유엔군은 222명 정도였다인천에 상륙한 부대들은 수도 서울을 향해 전투를 전개해 나갔고얼마 안지나 낙동강 전선에 있던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유엔군에게 총반격 명령을 내렸다총반격에 나선 유엔군은 대구와 김천대전수원 라인을 통해 북상했다인천에 상륙한지 13일 뒤인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접수하면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마주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받게 된 인민군 중 몇 만 명은 전라도 지리산 지역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벌였다그게 바로 우리가 많이 들어본 빨치산이었다물론 이 빨치산에는 1948년 여순항쟁 당시부터 싸워온 이현상 부대도 있었다이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을 상대로 교란작전을 전개하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결국 이들은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체게바라와 그의 혁명군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2016년 박근혜 정부 말기에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수 704만 명을 동원했다. 물론 이것은 어버이 연합과 같은 그쪽 분들의 개때관람의 영향력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또한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 국가적으로 기억되고 홍보되던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그러나 그 이면엔 또 다른 진실도 있었다그것은 바로 월미도 포격같은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5일전인 9월 10일 미국 항공기들은 월미도를 폭격했다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군항공기들은 95개 네이팜 폭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비판하는 월미도 폭격 희생자 유족들)

 

이 집중폭격으로 월미도 동쪽지역의 건물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그로 인해 최소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또한 여기서 희생된 이들은 미라이 학살이나 노근리 학살처럼 여성과 아이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물론 이런 무고한 희생은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일어났다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월미도 폭격 또한 그 일부였다따라서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을 당시유족들은 영화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이기도 했었다이것은 아마도 역사의 일부분만을 기억해온 결과의 산물일 것이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정길현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현실문화, 2017

 

세계 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정토웅가람기획, 2010

 

한국전쟁박태균책과함께, 2005

 

월미도에서 사라진 마을... 미군은 왜 다 죽였나오마이뉴스, 2020년 3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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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불복종자
아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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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서평: 저항적 지식인의 표본

나는 하워드 진을 좋아한다. 역사학자로써 그가 보여준 ‘아래로부터 역사 쓰기‘는 당시 미국역사 학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많은사람들이 배우는 미국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필그림 파더즈들의 정착 영국에 맞선 독립전쟁, 미국건국 그리고 그 이후 서부로의 팽창 등이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교육된다.

이것은 대중적인 미국 교과서의 내용만은 아니다. 국내에 출판된 미국사 전공자가 쓴 책들도 그렇다. 내가 읽어본 이보형 교수의 ‘미국사 개설‘이나 뉴라이트 계열의 이주영 교수의 ‘미국사‘등도 앞에서 얘기한 프레임으로 미국사를 접근한다. 여기 더 나아가 미국의 제국주의와 팽창의 역사도 합리화 되고 ‘좌파는 개갞끼다‘와 같은 반공주의 도그마로 얼버무린다.

그러나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랐다. 그는 1980년대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집필함으로써, 미국에서 존경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실은 대학살자이자 사리사욕을 채운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해냈다. 그외에도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등과 같이 미국 지폐에 들어가 있는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내세운 ˝평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를 원주민과 흑인 그리고 여성의 시각에서도 조명해냈다. 또한 이들이 부의 불평등을 조장한 장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쉽게 말해 하워드 진은 미국의 보수사관을 철저히 거부했고, 위로부터 억압받고 착취받고 차별받던 이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했다.

1991년 냉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 초강대국이었다. 1970,80년대 부터 세력을 키운 네오콘들은 1990년대 당시 자랑스러운 미국의 역사를 가르치고자 했다. 아들 부시 대통령 당시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와 그의 부인 린 체니는 실제로 그러한 기관을 양성했고, 그 과정에서 일종에 반미주의적 인사 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하워드 진도 포함됐다. 물론 진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워드 진이 가장 훌륭한 점을 뽑자면, 바로 실천하는 운동가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워드 진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제2차 세계대전에 B-17 폭격수로 참전했던 진은 반전주의자로써 전쟁에 반대했다. 또한 1950년대 스펠먼 대학 교수 시절에는 흑인차별에 분개하여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학교 도서관 출판운동, 식당칸 공동사용 투쟁등 항상 압장섰다.

진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부터 미국이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5년 당시 총 3만 명이 참가했던 반전운동에도 진이 있었다. 또한 그는 1967년 ‘베트남 철수의 논리(Vietnam The Logic of Withdrawal)‘를 집필했다. 그의 반전운동은 1990년대 미국의 유고 내전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도 드러났다.

진은 빈부격차와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는 체제에 저항적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마르크스가 얘기한 계급사회임을 인지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는 저서 미국 민중사에서 미국의 그런 모순적 구조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역사적으로 논증해냈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역사가 아닌 노동자의 역사도 보고자 했다.

이 책은 하워드 진의 인생을 다룬 소책자다. 분량도 얼마 되지 않아 몇시간이면 충분히 다 완독할 수 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책들은 국내에 많이 번역된 편이다. 그러나 하워드 진의 인생사를 타인이 정리한 책은 없었다. 소책자임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워드 진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났다. 한국의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던 연도에 그 또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한국에 리영희가 있다면 미국에는 하워드 진이 있다고! 세상을 실천으로 변혁하고자 하는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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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네비이 씰이 전개했던 넵튠 스피어 작전 전개도)

 

2011년 4월 30일 오후 11(아프가니스탄 현지 시각),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는 스텔스 블랙 호크 헬기 두 대가 활주로를 이륙했다두 대의 헬기는 미군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 대원 24명을 태우고 있었다헬기는 이륙한 지 10분 만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영내로 진입했다. 3대의 치누크 수송헬기도 활주로에서 이륙해 블랙호크 헬기의 뒤를 따랐다이들이 목표물인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 가옥으로 접근했던 시점은 밤 12시가지나 5월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목표물에 도착한 네이비 씰 대원들은 침착하게 자신들이 계획한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비록 작전 중 가옥으로 접근한 헬기 한 대가 꼬리를 담에 부딪치는 바람에 마당 안으로 불시착했지만작전자체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네이비 씰 대원들은 침착하게 마당에서 현관 철제문을 파괴하고 안으로 진입했고두 번째 헬기에 있던 요원들도 정문을 부수고 안으로 진입했다진입한 특수부대는 목표물을 살해했다그 목표물은 바로 9.11 테러를 주도했던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이었다.

(프레디터 드론, 드론 중에 가장 유명한 드론으로 미국이 21세기 중동분쟁에서 많이 사용한 최신식 무기다. 물론 이 최신식 무기는 무고한 양민학살을 불러오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라덴을 추적해왔다그리고 10년 뒤 그를 사살할 수 있었다네이비 씰이 작전을 전개할 당시 수도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에선 대통령 오바마를 포함한 각료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당시 이 현장을 중계한 것이 바로 무인정찰기 RQ-170이었다무인정찰기 RQ-170은 미국이 개발한 무기인 드론 중 하나였다이 드론들은 중동분쟁에서 최신식 무기로써 많은 임무를 수행했었다그러나 이 드론들은 중동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소이기도 했다왜 그런 것일까?

 

앞에서 서술한 네이비 씰의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의 공식 명칭은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이었다넵튠 스피어 작전이 성공한 이후 대통령 오바마는 방송에 나와 정의는 승리했다라고 하며 미국국민들과 함께 승리를 만끽했다그러나 작전이 진행되었던 파키스탄에선 이 사건 전체가 극도로 치욕스럽게 다가왔다왜냐하면 이런 작전 자체가 파키스탄 정부의 어떠한 허가나 사전얘기 없이 진행된 것이었기 때문이다물론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파키스탄 정부와 국민이 이런 작전을 벌인 미국에게 반감을 느꼈던 것에는 작전 당시 사용했던 RQ-170과 같은 드론의 공격이 파키스탄에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락 오바마, 버락 오바마는 미국사람들에게 진보적인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의 외교 정책은 미국의 이익을 네오콘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이었다. 특히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바마는 병력을 증강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은 바로 알카에다와의 접촉을 의심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초반에는 탈레반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면서 승리하는 것으로 보여줬지만결국 수렁으로 빠졌다무엇보다 미국 편이었던 부패한 군벌들을 대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를 따르게 하는 건 불가능한 상태였다거기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은 탈레반들의 게릴라전에 적합하였고테러전도 동반되었다이러는 과정에서 탈레반의 병력은 2007년 기준으로 최소 1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또한 2만 6,000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물론 이 상황에서도 진전이 없었기에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미군을 더 증강하고자 했다.

(드론 공격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을 비판하는 현지 주민들이 쓴 벽화)

 

이와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이웃나라인 파키스탄까지도 번졌다특히나 국경지대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그리고 탈레반은 파키스탄에서도 암암리에 활동했다이를 군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2004년부터 또 다른 전략전술을 사용했다그것이 바로 드론을 이용한 공습이었다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미국의 CIA는 주로 정찰에만 사용되었다그러나 2004년이 되면서 드론 공습을 개시하기 시작했고, 2007년과 2008년에는 그 숫자가 예전보다 증가했다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던 조지 부시 대통령은 결국 임기를 마쳤고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그 자리를 이었다.

 

2009년에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병력을 증강했다. 2010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숫자가 10만 명을 돌파했다이와 더불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의 드론 공습의 숫자를 급증했다미군 특수부대와 CIA가 운용하는 대테러 추적팀은 파키스탄 정부가 꾸물거리는 사이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드론 공습의 숫자를 급증시켰다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재임 첫 3년간 드론 공격으로 1,350~2,250명이 드론 공습으로 사망했다드론 공습의 비율로 따져 보았을 때오바마는 취임 첫 9개월 동안 부시 대통령이 퇴임 직전 3년 동안 재가한 것만틈의 드론 공격을 재가했다이에 따른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 숫자도 급증했다.

(드론 공격 풍자 만화)

 

2006~2008년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의 게릴라 소탕전담당 보좌관으로 일한 데이비드 킬컬렌과 2002~2004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육군 장교로 복무한 앤드루 액섬은 2009년 5월 파키스탄인들의 분노를 실감나게 소개했었다두 사람이 인용한 파키스탄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민간인은 700명이 살해된 반면 테러조직 지도급 인물은 14명밖에 죽이지 못했다이는 게릴라 1명당 민간인 50명이 사망한 것으로 명중률 2%”밖에 안됐다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공동으로 집필한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뉴욕 타임스 스퀘어 차량폭탄 테러범으로 널리 알려진 샤하자드는 체포 직후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미국을 공격한다면 당신들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당신들은 지금 주권국가 파키스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어떻게 무고한 여성과 어린이를 죽일 수도 있는 일을 꾸몄느냐고 묻자 그는 미국의 드론 공격은 어린이를 가리지 않는다그 누구도 가리자 않는다여성과 어린이를 죽이고누구든 죽인다고 답했다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드론 공격의 희생자들은 인간이지만 드론 조작 요원들에게는 때려잡은 벌레였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96~397

 

파키스탄인들이 2011년 넵튠 스피어 작전 이후에 미국과 오바마에게 분노를 감추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부시부터 오마바까지 행한 드론 공격은 2017년에 이어받은 트럼프 행정부 또한 끝나지 않은 중동전쟁에서 사용했다아무튼 이런 무자비한 드론 공격은 중동에서 반미정서를 자극하는 자극제였다무엇보다 이에 따른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에 중동사람들이 분노했다베트남 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해방전선(베트콩)을 지지했듯이중동의 민중 또한 반미를 내세우는 저항 세력을 지지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다.(물론 자유와 독립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싸우던 베트콩과 이슬람 극단주의에 심취한 집단은 질적으로 다르지만.)

 

정리하자면 중동전쟁이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이란이라크시리아 등에서 지속되는 이유에는 결정적으로 미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주체가 이 지역에서 전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여기서 설명한 드론 공격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으로 중동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고당연히 이점에 있어서 미국은 크나큰 정책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이슬람 전사의 탄생정의길한겨레출판, 2015

 

전쟁 국가의 탄생레이첼 매도박중서갈라파고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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