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킹만 사건 직후, 미국 전투기들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만 20만 명이 넘는 미군 병사가 남베트남으로 파병됐고, 1966년에는 20만 명이 추가로 파병됐다. 1968년 초에 이르러 남베트남에는 50만 명 이상의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 공군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로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이런 폭격으로 야기된 대규모 재난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몇 가지 사건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196565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사이공발 급보가 실렸다.

 

공산주의자들이 꽝응아이(Quang Ngai)에서 철수하던 지난 월요일, 미군 제트폭격기들은 그들이 퇴각하는 언덕에 맹포격을 가했다. 이 공습으로 많은 베트남인들이 사망했다. 혹자는 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은 그들이 베트콩 병사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폭격이 이루어진 뒤 네이팜탄, 즉 젤리형 가솔린으로 인한 화상을 입고 베트남의 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온 사람들 4명 가운데 3명은 마을 부녀자들이었다.”

 

96일에는 또 다른 급보가 사이공발로 도착했다.

 

“815, 사이공 남쪽[동북쪽의 오기] 비엔호아(Bien Hoa) 지방에서 미군 항공기가 불교 사원과 가톨릭교회를 오폭하는 사고가 있었다. 1965년에만 세 번째로 불교 사원이 폭격을 당한 것이다. 같은 지역에 있는 까오다이교 사원 한 곳도 올해에만 두 번의 폭격을 당했다. 또 다른 [동나이 강] 삼각주 지역에는 네이팜탄으로 화상을 입어 두 팔이 떨어져 나가고 눈꺼풀에도 심한 화상을 입어 눈을 감을 수조차 없게 된 여성이 있다. 잘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여자의 머리를 담요로 덮어 준다. 이 여성은 자신을 불구호 만든 공습으로 두 아이를 잃었다. 미국인들은 자기 나라의 공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남베트남에서는 매일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베트남의 많은 지역이 무차별 포격지대로 포고됐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민간인, 노인, 어린이)은 적으로 간주하며 마음대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베트콩을 숨기고 있다고 추정되는 촌락은 수색 섬멸작전의 대상이 됐다. 군대 갈 나이의 남자들은 살해하고, 가옥은 불태웠으며,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은 난민수용소로 보내버린 것이다. 저너선 셸(Jonathan Schell)벤숙 마을(The Village of Ben Suc)에서 수색 섬멸 작전을 묘사했다. 한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남자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 강변에 소풍을 나온 3명이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가옥이 파괴되고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뒤로 한 채 돼지처럼 떼를 지어 이동했다.

 

중앙정보국은 불사조 작전(Operation Phoenix)’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하 공산당원이라는 혐의가 있는 남베트남인을 적어도 2만 명이나 비밀리에 재판도 없이 처형했다. 19751월에 한 친정부 분석가는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이렇게 썼다. “불사조 작전으로 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 투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 하부구조의 많은 당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공개된 국제적십자사의 자료를 보면, 전쟁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65,000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구금되어 종종 구타와 고문을 당했던 남베트남 포로수용소에서 미국 측 고문단이 이를 감시하고 때로는 직접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십자 참관인들은 베트남의 두 주요 포로수용소-푸콕(Phu Quoc)과 퀴논(Qui Nhon)에 있으며 미국 고문단이 머물고 있었다-에서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야만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700만 톤의 폭탄이 베트남에 투하됐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투하된 폭탄 전체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베트남의 모든 국민에게 거의 200kg짜리 폭탄 하나씩을 안긴 셈이었다. 이 나라에는 거의 2,000만 개의 폭탄 구멍이 생긴 것으로 추산됐다. 게다가 나무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생물을 파괴하기 위해 비행기로 독성 액체를 살포했다. 매사추세츠 주 크기의 지역이 독극물로 뒤덮인 것이다. 베트남 여성들은 기형아를 낳았다고 신고했다. 쥐를 대상으로 동일한 독극물(2,4,5,T[제초제의 일종으로 지방족 산제 중 하나이며 보통 2,4,5-T로 표기한다])을 실험한 예일 대학 생물학자들은 기형 쥐가 태어났다고 보고하면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를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1968316, 미군의 한 중대가 꽝응아이 성의 미라이[My Lai 4 숫자 4는 미라이1, 미라이2 식으로 미군이 작전 편의상 붙인 것이다] 마을에 진입했다. 병사들은 노인과 아이를 안고 있는 부녀자들을 비롯한 주민들을 전부 한 곳으로 집합시켰다.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라고 명령한 병사들은 구덩이가 완성되자 주민들을 구덩이로 몰아넣고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훗날 열린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에 대한 재판에서 소총수 제임스 더시(James Dursi)가 증언한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캘리 중위와 눈물을 흘리는 폴 D. 메들로(Paul D. Meadlo)라는 소총수-아이들을 쏘기 전에 사탕을 먹인 바로 그 병사이다-가 포로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캘리 중위가 사격 명령을 내렸는데,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격 개시같은 말이었습니다.

 

메들로가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 왜 안쏘냐?’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말했지요. ‘쏠 수가 없어, 난 안 할 거야.’

 

그러자 캘리 중위와 메들로가 구덩이를 향해 총부리를 돌리고 사격을 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차곡차곡 쓰러졌고, 어머니들은 애들을 감싸 안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미라이4(My Lai 4)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 내의 미라이 사건 조사와 관련해 196911월에 그 황폐한 지역에 도착한 육군 조사단은 세 곳의 집단무덤과 시체로 가득한 구덩이 한 곳을 발견했다. 450에서 500명 정도가 살해되어 그곳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육군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라이 학살에 관해 들은 론 라이더나워(Ron Ridenhour)라는 병사가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라는 육군 사진사가 찍은 학살 장면 사진도 퍼졌다. 당시 급보통신(Dispatch New Servic)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반전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던 시모어 허시는 이를 기사화했다. 19685월 프랑스의 두 간행물에 미라이 학살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하나는 투쟁중인 남베트남(Sud Vietnam en Lutte)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리 평화회담에 참석한 북베트남 대표단이 출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라이 학살로 몇몇 장교가 재판에 회부됐지만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유죄를 판결받았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다. 캘리 중위는 결국 3년을 복역한 뒤-닉슨은 정규 교도소가 아니라 가택연금에 처할 것을 주문했다-사면됐다.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그를 옹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수많은 잔학행위가 벌어지는 전쟁에서 유독 캘리만 부당하게 본보기로 찍혔다는 느낌 때문에 그를 옹호했던 것 같다. 미라이 학살을 은폐한 총책임자였던 오런 헨더슨(Oran Henderson) 대령은 1971년 초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단 규모의 부대라면 어떤 부대든 미라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어딘가에 감추고 있든 법입니다.” 사실 미라이 학살은 세부적인 사항에서만 독특한 사건이었다. 허시는 한 병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어느 지방 신문에 실었다.

 

어머니 아버지께

 

오늘 저희는 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저는 제 자신이나 친구들, 아니 제 조국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대로 족족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곳은 서로 연결된 조그만 농촌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그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이곳의 오두막들은 야자나무 앞으로 지붕을 잇습니다. 집집마다 마른 진흙으로 만든 구덩이가 있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죠. 일종의 방공호 같은 거에요.

 

그런데 저희 부대 지휘관들은 이 구덩이가 공격용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구덩이가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는 즉시 완전히 태워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는 거에요.

 

오늘 아침 이 오두막집들 한가운데 헬리콥터 10대가 착륙하면서 잠자리(chooper)’ 한 대당 여섯 명씩 뛰어내렸고, 우리는 땅에 내리자마자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족족 총으로 갈겨 버렸지요.

 

그리고 나서 오두막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지릅니다. 자기들을 갈라놓지 말라고, 남편과 아버지, 아들과 할아버지를 데려가지 말라고 너나할 것 없이 울고 사장하고 싹싹 빕니다. 여자들은 울부짓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고는 우리가 자기들의 집과 개인 소지품, 식량 등을 불태우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바라보지요. 맞아요. 우리는 쌀을 전부 태우고 가축도 모조리 쏴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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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한민국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반공주의적 군부 지도층이 정치인이 된 세상이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정권은 공산주의의 자만 나와도 사회주의의 자만 나와도 검열과 감시를 일상적으로 일삼았다. 이런 군사독재 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가들이 겪어야 했던 지적 사상적 암흑기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정도다.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전면화된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은 당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는 전쟁이었다. 중국이나 소련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 등과 같은 서방 진영 또한 이 전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전쟁에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참전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박정희의 한국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박정희 군사 정권을 겪던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60년 한국의 국민들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을 몰아냈지만, 가난에 허덕였다. 그로부터 1년 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른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하여 경제성장을 주도했고, 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황금 빛 엘도라도와 같은 시장을 찾았다. 그 시장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자, 국민들에게 반공투쟁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정희는 이른바 월남파병을 단행하며 조국을 떠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거룩한 전쟁으로 국민들에게 교육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의 경험이 있던 한국사회는 이승만 시절부터 강력한 반공국가였다. 이승만을 이은 박정희 정권은 그 반공주의를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시켰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은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과 시각을 국민들의 반공정서를 이용해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박정희 정권의 행보에 반기를 든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저항적 지식인의 표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李泳禧)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60년대 리영희는 현재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었다. 영어 실력이 매우 뛰어났던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전쟁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어용언론들이 반공성전으로 미화시키는 것에 반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본질을 사실대로 보도하고자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그는 어용언론사에서 베트남 전쟁 취재 및 한국군 파병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를 써 줄 것을 강요당하고 회유를 받았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1974년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작성했다. 그가 집필한 전환시대의 논리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의 독립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1세기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독립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인지를 구체적인 사실관계와 근거를 들어 논증해냈다. 이 책에서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이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일제의 침략, 프랑스의 재침략 그리고 미국의 침략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인지 밝혀냈다. 1964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 참전 구실로 내세웠던 통킹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의 조작극이었다는 사실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아래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 사실은 베트남 식민지 세력의 잔재라는 사실도 아주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했다. 따라서 리영희는 박정희 정권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 연합국의 침략전쟁이며, 이들이 부도덕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입증해냈다. 리영희는 호치민이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왔고, 당시 호치민이 치르고 있던 베트남 전쟁 또한 미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지적 암흑기이던 시대 이런 사실을 주장하면 처벌받고 빨갱이로 몰릴 수 있던 시대에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얘기한 인물이 바로 리영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에 나온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전환을 선물해주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리영희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입증한 사실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가르쳐온 반공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입증해낸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사실로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리영희가 입증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훌륭한 일이고 대단한 업적이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반공의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지를 증명해냈다. 물론 이걸 두려워한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그를 긴급조치 9호 위반 즉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두었지만 말이다. 그가 제시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은 수많은 이들에게 철학전 전환 즉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시각은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반공주의자들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준 위대한 흐름이었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전환시대의 논리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미국이 월남 내란을 월맹과 공산주의자의 원조·지령·사주에 의해서 시작된 침략이라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하기까지의 베트남 정세는 대체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의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돼야 할 전쟁이다.”

 

출처 : 전환시대의 논리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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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LG트윈타워에서 예고도 없이 대량 해고 당한 청소 노동자들과 연대투쟁했습니다. 대기업 LG가 오랜 기간 동안 고용했던 청소 노동자들을 이유도 없이 해고한 것에 대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이들의 복직을 위해 연대했습니다. 한동안 코로나 시국이고, 집회도 제한되는 상황에서 우리 청년학생들이 모여서 연대투쟁을 했습니다. 코로나 방역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삶과 생계 또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복직시키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야 합니다.

 

오랜만에 연대투쟁했습니다. 여러 뜻 있는 동지들과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지금도 여의도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직하는 날 까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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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 니카라과(Nicaragua)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0년대부터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는 미 해병대가 장기주둔했고, 미국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미국이 니카라과를 통치한 것은 당연히 이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니카라과에서의 미국 폭압적이고 착취에 기반을 둔 통치가 지속되자 당연히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토 산디노(Augusto Sandino)였다.

 

산디노는 1920년대 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7년에는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미군 철수를 목표로 투쟁했다. 당연히 미국은 산디노가 이끄는 게릴라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했으며, 무차별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디노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자, 산디노의 게릴라 조직은 군대에 자원한 농민들 덕분에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1931년에는 이들의 군대가 6,000명에 이르렀다. 결국 미국은 1933년 니카라과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모사라는 앞잡이를 이용하여 니카라과를 통치하고자 했고, 1934년 이들은 산디노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6년 소모사가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잡은 소모사는 3대에 걸쳐 권력을 세습했고 대략 43년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독재정권 하에서 좌파들은 1961년에 산디노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른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조직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반정부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이들의 투쟁은 1970년대에 더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거기다 1970년대 들어서 교회, 군부, 지주 등 체제 내의 분열과 마나구아 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 인명 손실 등으로 인하여 3대를 세습하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체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혁명적 무장투쟁을 해오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8년간 지속되오던 이들의 투쟁이 성공한 것이다.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소모사 정권시기 미국이나 외국 기업들에게 착취받던 기업들과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다. 또한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했으며, 은행이나 광산 그리고 니카라과의 천연자원 등도 모두 국유화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불과 1년 만에 니카라과의 문맹률을 12%까지 감소시켰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단행된 토지개혁은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산디니스다 정권은 소모사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 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소모사 독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이처럼 1979년에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미제국주의와 소모사 독재 정권에 억압받고 착취 받던 민중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산디니스타는 곧바로 장벽에 부딪쳤다.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과 방해공작이었다.

 

1979년 니카라과에 좌파정권이 세워지자 미국은 이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온갖 자금과 노력을 퍼부었다. 1980년에 탄생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이른바 반소·반공의 기치를 내세우며, 중남미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확산 되는걸 막겠다며, 고문과 암살·방화·학살 등을 포함한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당연히 미국은 니카라과에서 이른바 반혁명 반동세력인 콘트라(Contra) 반군을 지원했다. 1980년대 이란-콘트라 스캔들에서의 콘트라가 바로 이들이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선발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콘트라 반군의 숫자는 15,000명까지 증강되었으며, 이들은 좌파 정부를 대상으로 테러리즘을 일삼았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은 최소 3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도덕적으로 동급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콘트라 반군은 고문, 사지 절단,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들은 테러 전술을 동원해 학교와 병원, 협동조합, 교량, 발전소를 파괴했다. 콘트라 반군은 콘트라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인은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으며, 용광로에 넣어 끓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여 밤낮으로 강간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로널드 레이건이 찬양하던 자유투사 콘트라 반군의 실체였다.

 

콘트라 반군을 통한 테러행위와 미국의 경제제재에 시달리자 니카라과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국민소득은 196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거기다 소련의 원조도 줄어들면서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에 제동이 걸렸다. 결국 사회복지 예산이 축소되고 혁명공약 일부가 폐기되면서 국민들의 지지도도 떨어졌다. 결국 1990년 국제연합과 미주기구 등에서 파견한 선거감시단의 입화하에 실시된 선거에서 패배하여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는 12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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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1절입니다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을 기립니다.)

 

1940년 6월 서유럽으로 진군을 시작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함락시켰다독일의 수상 히틀러는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구경했고프랑스 북부는 나치 독일이 남부는 친나치 협력자이자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의 영웅인 필리프 페텡이 통치하도록 했다같은 해 6월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프랑스령 식민지가 무주공산이 되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했다본국이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해있던 인도차이나령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당연히 일본에게 굴복했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 1940년에 만나게 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함께 투쟁해왔다. 이들은 이후 프랑스와 미국 두 서구 제국주의 열강을 무찌른 투사로 발전했는데, 그 시작은 항일투쟁이었다.)

 

1940년 8월에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동남아시아에서의 정치·경제적 우위를 인정해주었고, 9월 22일에는 일본군 주둔과 관련한 협약이 맺어져 대략 2만 5,0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3개의 비행장이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갔다이로써 인도차이나에는 새로운 지배자인 일본이 등장한 것이다일본이 인도차이나에 입성하자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 혹은 일부 민족주의 세력들은 침략자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혼합 종교인 까오다이교(Cao Đài) 세력이나 호아하오교(Hoa Hao) 세력들은 친일 종교 세력으로 성장했다이후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또한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었다.

 

물론 이것은 태평양 전쟁 당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1942년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을 때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수카르노(Sukarno)는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했었다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도 일본군이 침공하자독립운동가 아웅산(Aung San)이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했다따라서 동남아시아 내의 독립운동 세력의 친일화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다당연하게도 이런 환상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그 나라에서 무자비한 통치와 잔혹함을 보이면서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2018년에 발굴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 이 문서를 통해서 호치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이 시기 일본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성과 기만성을 알고 반일투쟁을 준비했던 인물이 있다그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이다. 1890년에 태어나 1911년 식민지 베트남을 떠났던 호치민은 30년 동안 해외를 돌아다녔던 인물이다아시아와 아프리카중동유럽미국과남미 등을 떠돌아 다녔던 호치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던 해 응우옌 아이 꾸옥(Nguyen Ai Quoc)이라는 가명으로 안남 민족의 요구 8개 조항을 즉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1920년대 소련에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으며, 1930년에는 홍콩에서 이른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한 인물이었다. 1940년 일본이 침공해오자 오직 호치민만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인물이었다그렇다면 왜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것인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

 

이것은 호치민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환영하는 이들에게 했던 외침이다. 2018년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으로 한반도가 평화무드에 접어들었을 때프랑스에서 새로운 문건이 발견되었다그것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이 프랑스 파리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를 했었던 것이 당시 프랑스 경찰 당국 문서에서 대거 발굴된 것이다. 1920년을 전후로 해서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인사인 김규식황기환조소앙윤해 등의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감화되었고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여기에는 서구 열강에게 독립을 청원했다 거절당한 양측의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호치민과 교류했던 우사 김규식의 경우 1918년 여운형이 창당한 신한청년당의 일원으로 1919년에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했었다이런 경험이 호치민과의 공감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2017년 미국의 저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켄 번즈(Ken Burns)가 제작한 베트남 전쟁 10부작(PBS Vietnam War Series)을 보면 호치민이 시작부터 반일 투쟁을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0년 전 세계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대부분을 점령했고일본 제국은 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위협하면서 베트남을 점령했습니다또한 그들 동맹인 프랑스 협력자들이 식민지를 계속 통치하도록 했습니다일부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이 오는 것을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망명 중이던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를 프랑스 제국주의와 똑같은 침략자로 여겼습니다그들은 오로지 조국 베트남의 자원 수탈에만 관심이 있고베트남 곡물로 자신의 밥그릇을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었죠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애국자농부노동자상인군인들이여단결하여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그 협력자들을 물리칠 때가 왔습니다.”라고 말입니다.”


(1944년 12월 대프랑스 항전과 대일전을 위해 결성된 베트남 해방군, 맨 왠쪽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이다.)

 

PBS 베트남 전쟁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호지민은 분명 일본 제국이 침공해올 때부터 반일주의자였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뜻 깊은 교류를 프랑스 파리에서 했었다대략 30년 동안 인간 호치민을 연구했던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는 지금까지 나온 가장 두꺼운 호치민 전기를 집필했다.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은 2003년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에도 호치민이 식민지 조선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안남애국자 연합은 표면적으로는 급진적 목표를 내걸지 않았다실제로 조직의 창립자들은 베트남인 공동체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위해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조직의 명칭에 전통적인 베트남’ 대신 안남이라는 말을 쓴 것도 정부에 이 조직이 식민지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그러나 타인(호치민 예전 이름)은 처음부터 이 연합을 이용하여 베트남인 공동체를 인도차이나 식민지 체제에 대항하는 효율적인 세력으로 전환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그는 이미 조선인이나 튀니지인 등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들 나름으로 비슷한 조직을 세운 다른 민족 단체와 접촉하고 있었다.”

 

출처호치민 평전 p.108

 

응우옌 아이 쿠옥은 이 글에 이어 인도차이나와 조선이라는 글을 르 포퓔레르(Le Populaire)에 실었고이어 10월에 같은 잡지에 우트레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 두 글 역시 프랑스의 몇몇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면서도제시하는 해결책은 기본적으로 온건했다.”

 

출처호치민 평전 p.120


(1945년 탄라오에서 찍은 호치민의 사진, 당시 미국 OSS요원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다.)

 

이 구절에서 호치민이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리고 이것은 2018년에 발견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 내용과 상당히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다일본이 침략한 시점부터 반일투사였던 호치민은 1941년에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대에 잠입하여 팍 보(Pac Bo) 동굴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창설했다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베트민의 군대는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이끌었고호치민이 조직한 베트민은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 시점까지 반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이런 점에서 호치민의 반일애국투쟁은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정영목(), 푸른숲, 2003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뉴스홈 김용래 기자, 2018년 9월 30일자 기사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켄 번즈 제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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