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문제에 대한 무지

(좋은 글이라 퍼왔습니다.)

홍콩은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난징조약의 결과로 영국에 조차되었다. 아편전쟁이란 영국이란 마약상이 인도에서 생산해낸 약을 팔다가 국민의 건강을 우려한 중국이 이를 막으면서 수가 틀리자 전쟁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아편전쟁 자체가 잘못된 전쟁이었기 때문에, 이후 맺어진 난징조약은 중국이 언제라도 무시해도 사실 비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난징조약에서 영국은 분명히 홍콩 반환을 약속했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넘겨 받은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인도 같은 경우는 포르투갈에 비슷하게 빌려준 고아를 무력으로 탈환했는데, 중국은 조약을 지키고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니 중국은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인내력을 보였다고 봐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에 경도된 이런 혐중세력은 중국이 마치 자유로운 홍콩을 강제 점령한 것처럼 알고 있다.

이렇게 이들 혐중세력은 마치 홍콩이 독립국이었다가 (혹은 처음부터 영국령이었다가) 1997년 중국의 제국주의적 압박때문에 중국에 넘어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다수다. 또한 영국령 홍콩은 그런 혐중세력이 생각하는대로 민주주의 체제도 아니었으며 영국 지배하에서 여러번 홍콩에서 폭동이 날 정도로 살기 좋지 않았다. 홍콩이 그나마 민주개혁을 하게 된 것은 영국인이 떠나갈 때쯤 자신들을 대신해 홍콩의 주권을 가진 중국에게 ˝엿먹으라˝는 심정으로 자기들은 실시하지도 않았던 민주제도를 홍콩에 대거 도입하고 바로 떠난 것이다. 즉 그들은 후반부에 홍콩을 중국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던 영국이 중국을 엿먹이기 위해 서구식 민주제도를 대거 도입하고 떠난 것을 가지고, 마치 영국이 통치했을 때는 민주주의가 보장되었던 나라인 것 처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 즉 미국의 네오콘식 사고방식 우월하다는 반공주의적 환상이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홍콩이 경제 발달을 하게 된 계기는 영국지배가 아니라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홍콩을 통해 중국투자가 활성화되면서부터 이다. 그때부터 홍콩에 중국으로 가려는 자금이 들어오면서 홍콩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홍콩이 부유하게 된 것은 영국지배 탓이 아니라 중국의 개혁개방 탓이며, 2000년대 들어 상대적으로 빛을 잃은 것도 중국의 경제 발전 탓이다. 중국 자체의 개혁개방도가 심화됨에 따라서 굳이 해외자금은 굳이 홍콩으로 들어올 필요 없고, 중국 본토로 직접 가면 되기 때문이다.

홍콩경찰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시위대 진압, 중국의 비민주적인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인권적인 차원에서 비판을 받아야하겠지만, 한국에서 이런 비판을 하는 자들은 박근혜 정부시절 경찰의 폭력으로 백남기 노인이 사망한 사건에서 물타기를 하거나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강하게 존치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홍콩문제에서는 국가보안법을 격렬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홍콩 보안법 보다 더 오랜시간(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오고, 죄없는 사람을 좌파, 빨갱이, 용공 민주화 이후에는 종북 딱지를 붙혀 사상적 탄압을 해온 국가보안법에 대해선 ‘자유‘, ‘민주‘, ‘안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며 합리화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홍콩 보안법에는 반대하면서 국가보안법에는 찬성하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홍콩 시위가 극우반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점에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 특히나 서방과의 커낵션이 너무나도 뚜렸한 조슈아 웡을 마치 홍콩 시위의 전부인냥 내세우고 있다. 또한 2019년 12월 우크라이나 아조프 부대 출신들로 추정되는 네오나치들이 홍콩에 가서 시위를 지원했지만, 이것이 홍콩 시위를 대표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최소한 이들이 반중을 내세우며 홍콩 시위를 지지한 것에 대한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물론 홍콩 시위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잘못됐다고 보는 것은 삼가야 겠지만 최소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는 것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홍콩 시위 과정에서 중국공안이 시위대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선 분노를 감추지 않지만, 2020년 미국에서 일어난 조지플로이드 사건에 대해선 오히려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비하하고 폄하하고 있다. 이들은 마치 억울하게 죽은 조지 플로이드가 미국 경찰에게 죽은 것은 ˝깜둥이가 잘못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는 중이다.

종합하면 혐중세력은 홍콩문제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포털이나 커뮤니티에 달린 몇몇 선동글을 읽고 중국 혐오에 열을 올리고 있고 최소한 중국측 입장이 어떤것인지는 1%조차 생각하지 않는 편파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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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인상 - 현대한국학연구소 자료총서 8
백남운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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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소련에 맞서 반공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확장했고,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미국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확장해나갔다. 미국에 힘입어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은 냉전시기 소련의 위협을 더 많이 강조했고, 그런 역사적 내지는 정치적 관점은 지금도 그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개입한 사례보다 소련이 영향력을 확대한 사례를 세계사 시간에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서방에서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그러한 전제들은 과연 정확한 판단인 것일까? 

 

여기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과 서방 중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서방 중심이 판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고 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소련을 방문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다. 사실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이라는 책 이전에도 소련 방문기를 다룬 책으로는 월북한 문학작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도 있지만, 지도부를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공식적으로 만난 부분을 다뤘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처럼 분명히 개인 저술이기는 하지만, 북한 정부 수립 이전에 집필된 이들 방문기와는 그 성격과 간행 취지가 다르다. 쏘련인상은 북한 정부 수립 직후 국가적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북한 내각의 최초의 공식 소련 방문 일정과 성과를 정부 각료의 입장에서 정리하였기에 기본적으로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방문 보고서다. 그리고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가 처음 방문하여 썼던 쏘련기행하고도 시대적인 차이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태준 작가가 소련을 처음 방문할 당시는 냉전이 점차 시작하려던 시기였고,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이 되기 이전이었던 반면에, 백남운의 쏘련인상은 냉전초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노골화 되고, 한반도 분단 정부가 남북한에 수립된 상태였다.

 

여기서 국제적인 동향을 얘기하자면, 백남운이 김일성, 박헌영 그리고 홍명희와 더불어 북한 정치 지도부로써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은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개입과 폭력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던 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임자인 해리 트루먼은 19473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시점으로 그리스 내전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노골화 했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과 같은 자주통일을 위한 시도를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고, 이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더 나아가 제주4.3항쟁에서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이유를 들어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 여수와 순천에서도 잔혹한 학살극이 미국의 지원세력들에 의해 일어났다. 또한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서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군사물자를 장제스 세력에게 지원하여 반공의 보루를 강화했다.

 

이처럼 백남운이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 초의 미국은 제국주의적 개입과 간섭을 통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수법은 정말로 간악하고 사악했다. 그들은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인권, 민주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개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개입을 합리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탄압과 학살도 자연스럽게 합리화됐다. 쏘련인상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악한지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저자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자 내지는 역사학자답게 이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순을 매우 잘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이 왜 거짓과 위선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책에 있는 내용들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국가의 소위 원조정책은 미제의 마샬안이 대표적인 것이다. 마샬식 원조의 특징은 상대국가의 식민지화와 미제의 반공파쇼제 확립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달러를 구세주로 광신하는 채귀인 셈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05

 

쏘베트정부의 평화정책은 미영 반동도당들의 격렬한 저항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국가들은 전쟁준비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쟁 전시기에 비하여 군사비 지출을 현저하게 증가시켰습니다. 미제예산에 있어서 1948~1949년도 군사비 지출은 1939~1939년도에 비하여 거의 15배로 증가되었습니다. 1949~1950년도에는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의 교서에 지적된 바와 같이 군사비 지출은 예산총액의 38%에 달하며,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다른 항목의 지출을 총계하면 1949~1950년도의 미국군사비는 국가예산의 반액 이상에 달하는 것입니다. 1949년도의 영국군사비는 1939년도에 비하여 3배로 증가되였습니다. 이상의 숫자들은 북미합중국과 영국의 현재의 지도자들의 침략적 정책을 여실히 증시하는 것입니다.”

 

출처 : 쏘련인상 p.149

 

세계대전의 전범자들을 완전히 처단하기도 전에 그 처단을 약속한 미제가 오늘은 전쟁방화를 일삼고 있다. 세계평화 옹호의 세력이 나날이 장성되여 가는 오늘에 있어서 반쏘전쟁뿔럭인 북대서양동맹(NATO)을 체결한 미제는 소위 세계제패의 야망을 방공선결성에 빙자하여 엄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파쇼 두목이였던 히틀러 강도배의 수법을 되푸리라는 신파쇼 두목인 미제의 전략태세인 것이다. 미제의 제2 ‘방공선즉 동양침략선은 그 거점인 하와이로부터 인도양과 호주 비율빈(필리핀) 등을 거쳐 유구(오키나와) 열도의 중거점과 연결하고 거기서 다시 조선 동해안을 거쳐 화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지대를 행동의 제일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출처: 쏘련인상 p.210

 

따라서 저자 백남운이 지적하듯이 미국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세우는 개념은 일종에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기만적 행위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소위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방어를 위해 개입했다.”는 식의 논리는 제국주의 세력들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에 반해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계는 미국과는 달리 소련이 제국주의적으로 어떠한 국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나 서방에선 마치 소련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의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실제로 소련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휘두른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정도였으며,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이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동유럽을 중심으로만 사회주의 라인을 형성했을 뿐이다. 즉 트루먼 독트린처럼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구실로 타국의 침략하고 정복하는 행위를 소련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되는 학습과 교육을 받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에 반소 반북주의가 퍼져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소련이 한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지도부가 소련의 스탈린과 회담했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쏘련인상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보고 느낀 백남운의 감정을 담고 있다. 그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그 회담이 조소(북한과 소련)관계에 있어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했다고 얘기하며, 동등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에게 모든 것을 다 넘기고 무조건적으로 친미만 외치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하고는 분명히 다르며 매우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저자 백남운은 회담에서 자신의 받은 인상을 요약했는데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담은 오후 8시로부터 920분까지 계속되엇던 것이다. 나는 이 회담 중에서 받은 인상을 요약하려 한다. 첫째로 조쏘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구체적 계획성이 일층 강화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결코 외교적으로 빠게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적인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감이 더욱 두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쏘련정부의 최고지도자의 성의있는 태도에 경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딸린 대원수의 차관에 관하여 직접 말한 민주적 원조의 원칙이 타민족의 자주 독립권을 존중하고 보장하여 주는 쏘련정부의 대외정책이 기본이 되는 것을 절실히 나는 체감한 바 있었다.

 

둘째로 위대한 쓰딸린의 말하는 모습은 토막 토막 그치는데 그것이 붉은 실로 짼 구실처럼 원칙으로 일관된 것이다. 인류의 신사회를 창조하는 최고의 기사인 만큼 세계 노동인민의 태양으로서 숭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니와 사물에 정통하는 태양이 그 두뇌 속에 서리고 있는 듯이 세계 정치사정을 꿰뚫으고 있는 천재적 정치가인 인상을 받게 되였다. 회담하는 중에 두 번이나 쓰딸린이 입을 빙그레 하고 눈우슴을 보냈다. 조선사정에도 정통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미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행동이 가소롭다는 표정인 듯하였다. 쓰딸린의 일언일소는 실로 세계 민주정치의 역사적 발전방향의 지표인 인상을 직각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문화 협조에 대한 기본적 원칙으로서 해명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 회담의 결과로 대표단의 방쏘 목적이 달성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는 우리 조국의 통일발전을 위하여 불가능이 없다는 자신을 더욱 굳게한 바 있었다.

 

세째로 회담하는 분위기가 마치 친숙한 동지들이 공사를 상의할 때 정색하는 정도로 그렇게 막이 없는 분위기이였다. 그것은 쏘련정부가 조선문제에 대한 일호의 야심이 없는 까닭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 대표단이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된다는 까닭이였다. 그러므로 조쏘 양국간의 영구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독립을 보장하는 유일의 정치노선이라는 원칙이 이 회담으로써 다시금 재확인될 뿐 아니라 전진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쏘련인상 p.86~87

 

그 외에도 쏘련인상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처럼 레닌박물관을 포함한 소련의 여러 박물관들을 포함한 관광지들을 본 것과 학교 및 공장시설을 방문한 것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백남운이 보게 된 소련은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된 그리고 인민이 생각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복지혜택을 받으며 사는 사회였다. 쏘련인상에서 가장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소련의 농업관련 분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고 있는 소련의 농업분야는 발전적이지 못하고 풍족하지 못하다는 편견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 백남운이 접하게 된 소련의 농업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괜찮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전후재건을 마친 소련의 농업생산은 예전에 공업화를 추진하던 시기와 전쟁 이전의 시기보다도 훨씬 더 풍족한 상황이었다. 즉 전후재건이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소련의 농업이 발전했다는 것을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꼴호즈 조직의 창조자인 쓰딸린의 창안에 의하여 1927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의 방침이 결정되였던 것이며 1929년부터는 꼴호즈 조직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전전인 1940년도의 쏘련농업은 벌써 7천여 개소의 농기지정소와 53만대의 뜨락또르와 182천대의 꼼바인 228천대의 화물자동차가 작업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기계화의 수준이 미국을 훨씬 능가하였던 것이다.

 

1940년도에 쏘련 꼴호즈에서는 쏘련 토지경작의 4분지 3과 모든 파종면적의 절반 이상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고 곡물면적의 절반을 꼼바인으로 추수하였다. 1940년도에 미국에서는 대지주의 자본주의적 농업체제로서 토지경작의 절반과 파종면적의 3분지 1만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농업기계의 능률에 있어서 미국 뜨락또르의 1마력이 5.8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한다면 쏘련 뜨락또르의 1마력은 32.6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노동의 기계화는 농업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제고시킨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1~112

 

쏘베트정부는 대독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승리한 이후 새로운 전후 5개년계획에 있어서 꼴호즈와 쏘호즈의 생산조직을 재건할 뿐 아니라 전전의 수준을 초과하기 위한 모든 방책을 쓰고 있던 것이다. 이 전후 5개년계획을 수행하는 동안에 농업부문에 있어서 1940년도에 대비하여 1950년도의 말기에는 토지경작의 기계화가 70%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며 기계화된 춘기 및 추기 파종은 59%로부터 70%로 곡물에 대한 꼼바인의 추수는 43%로부터 50%로 휴간지의 재경과 전지의 추경은 71%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어 있다. 1949년도의 농업부문에서는 15만대의 뜨락또르와 29천대의 꼼바인과 160만대 이상의 견인기계 기타 농업기계를 받았다. 농기 농구의 거대한 기술적 발전은 그 품질의 개진과 새로운 구조형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도의 농촌경제는 전전인 1940년도보다도 4배 이상의 뜨락또르 기타 농기를 받았던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2

 

이처럼 백남운과 북한 정치인들이 비춰진 소련의 모습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사회주의적인 가치가 실현된 사회였다.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으며, 파시즘적임 침략을 무찌르고 급속도로 전후재건에 성공한 소련이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정치인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로 비추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이것이 초기 북한 정치인들이 추구했던 사회였고, 실질적인 목표로 삼았던 과제였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현재 북한은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아직도 실행하고 있다. 북한도 이런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저자 백남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백남운은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개척자로서, 1930년대 초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과 역사상을 창도하여 한국 근현대 학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조선사회경제사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조선에 뿌리심어 놓은 책이었다. 그 또한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신민당에서 활동했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과 협력했으며 1947년 그가 창당한 근로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여운형 암살과 좌우합작운동 실패 이후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그 또한 월북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김구가 주도한 남북협상에도 참가했고, 북한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초기 북한의 교육을 담당했다. 1961년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그리고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를 관장했다. 197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역임했고, 1979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처럼 백남운은 북한 정권에서 여러 직책을 맡은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해 서방의 왜곡되고 편견에 가득찬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다. 마르스크주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은 그러한 편견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고, 북한 정권 초기 인사들의 소련 방문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알기 위해선 문학가 이태준의 쏘련기행과 더불어 같이 읽어야할 책이다. 그 책과 같이 읽으면 반소주의와 반북주의의 편협한 제국주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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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베트남 전쟁(Vietnam War)에서 패배하게 된 이유는 많을 것이다대표적으로 들자면 남베트남의 독재정권에 맞서 봉기한 베트콩들과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군의 영웅적인 투쟁미군의 무차별 폭격에도 굴복하지 않는 베트남 인민들의 불굴의 정신이들을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끄는 호치민을 포함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지도부들의 탁월한 지휘능력그리고 추악한 미국의 전쟁범죄에 반대하던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반전운동 등이 미국을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어났던 반전운동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그 규모가 확장되었고, 1973년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할 때까지 계속됐다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벌어진 반전운동을 더 격화시킨 사건이 있었다반전운동을 격화시킨 이 사건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의 이미지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으며본국으로 돌아온 미군들은 반전운동에 참가한 시민들로부터 베이비 킬러(Baby Killer)라고 욕먹게 됐다그 사건이 바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미라이 지역에 도착한 미군 헬기)

 

원숭이의 해인 1968년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성과 부의 중심지농촌 마을에서 감행했던 구정공세로 인해 미국은 잠시나마 혼란에 빠졌었다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선 미대사관 1층이 잠시나마 베트콩에게 점령당했었고옛 황궁 도시인 후에(Hue)는 1달 동안 양측 군대가 교전을 벌이는 전쟁터로 변모했었다구정 공세 초기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습공격으로 밀렸지만우수한 화력으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반격에 나선 미군들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들을 섬멸했으며베트콩들의 저항은 조금씩 미미해지는 것 같았다.

(M-16 소총을 들고 미라이 지역을 정찰하는 찰리 중대 병사들)

 

다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손미(Son My)지역도 상황은 비슷했다그러던 2월 25일 인근 동네를 순찰하던 미군 찰리 중대원(Charlie Company)들이 지뢰를 밟아 6명이 죽고 12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2일 뒤 프랭크 베이커(Frank A. Barker) 중령은 찰리 중대의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Ernest Medina) 대위를 불러 정보에 의하면 250여 명의 베트콩 게릴라가 미라이에 진을 치고 작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얘기했고이후 찰리 중대는 이 동네에 들어가 모든 것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게 됐다이렇게 해서 미라이 학살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1968년 3월 16일 새벽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착륙지점에 병사들을 내려놓았다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은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으로 진입했고광적인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다켈리 중위가 이끄는 소대원 30명이 미라이-4 지역에 진입했을 때 어떠한 반격도 없었지만이미 켈리 중위는 사격 명령과 함께 수류탄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점에 투척했으며마을을 불태우고 밖으로 뛰어나오는 민간인들을 M-16 소총과 M-60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했다여기서 즉시 사살하지 못했던 민간인들은 손을 머리 위에 올리게 하고 큰 도랑으로 내려가도록 했으며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대원들이 이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또한 그날 같이 출동했던 다른 2개 소대는 미라이-4 마을의 외곽을 포위하고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을 사격으로 차단했다학살을 벌였던 미군들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도 모자라 부녀자들을 집단으로 강간한 뒤 사살하기도 했으며이 학살극으로 희생된 이들 대다수가 여자노인아이들이었다.

(미군의 총에 맞고 죽은 어린아이,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들은 애, 어른, 여자, 노인 할 거 없이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쏴죽였다.)


(학살당한 마을사람들,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들은 마을사람들을 이렇게 집단으로 학살했다.)

 

물론 모든 미군이 이런 학살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당시 헬리콥터를 통해 작전지역을 정찰중이었던 휴 톰슨(Hugh Thompson) 준위는 학살을 목격하자 곧바로 미라이-4 촌락으로 내려가 캘리 소대원들을 총으로 위협해서 주민 16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한 흑인병사는 자신의 발에 총을 쏴서 학살을 회피하기도 했었다하지만 이런 양심적인 행동을 했던 병사들 보다 현장에서 학살에 참가한 병사들이 더 많았다미라이 학살은 총 4시간에 걸쳐서 일어났다이 학살의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자와 노인어린이 그리고 갓난아기였다이 학살에서 총 504명의 민간인이 30명의 미군에게 학살당했다학살당한 504명 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미군은 총 274채의 모든 가옥에 불을 지르고 수천 마리의 가축을 죽였다쉽게 말해 살아 숨 쉬고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없애버렸다고 할 수 있으며이러한 학살의 증거를 막기 위해 이 지역을 비행기로 폭격하기 까지 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있는 미군,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은 마을을 불태웠다.)


(공포에 떨고있는 마을주민들)

 

이처럼 미군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버리려고 온 힘을 다했다당시 미군의 기록한 보고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은 베트콩 사살이었다즉 미군은 미라이 지역에서 수백 명을 학살해 놓고바디 카운트(Body Count) 계산법을 적용해 학살의 존재를 숨겼다그러나 이 추악하고도 잔혹한 학살극은 미군이 원하는 바하고는 달리 은폐되지 못했다미라이 학살을 목격했던 육군 사진사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는 이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고당시 급보통신(Dispatch New Service)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반전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던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는 이를 기사화했다또한 미라이 학살에 관해들은 론 라이더나워(Ron Ridenhour)라는 사병 기자가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휴 톰슨 준위, 인근지역에서 헬리콥터로 정찰을 하던 휴 톰슨은 학살의 현장을 목격하자 그 현장으로 달려가 마을주민 16명을 구출해냈다.)

 

미라이 학살이 미국내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학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69년이었다.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는 미라이 학살에 대해 특종 보도를 하였고이로 인해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이미지는 더욱 안 좋아졌다이렇게 되자 미국 정부는 미라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섰고이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재판에 회부됐다재판에서 총 26명의 군인이 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됐다그러나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캘리 중위뿐이었다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또한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캘리 중위도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으며,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낸 이후 사면됐다더 놀랍고 기가 막힌 사실은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윌리엄 캘리 중위, 미라이 학살 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던 장교인 그는 이후 학살이 공론화되면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그도 나중에 닉슨정부에 의해 사면됐다.)

 

또한 미라이 학살이 미국 내에서 이슈가 되면서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 까지 했으며이러한 활동을 통해 학살의 진상은 확실히 규명됐다미라이 학살에 참가하여 최소 25명을 죽였던 소총수 버나도 심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몇 시간 만에 500명을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그것은 꼭 가스실 같다히틀러가 했던 것 말이다여자노인아이 할 것 없이 50명씩 세워놓고그냥 쓸어 버리면 된다그렇게 했다. 25, 50, 100명씩 말이다그냥 죽였다그들을 모아놓고나와 동료 몇 명이 M-16 소총을 자동으로 한 다음 다 쏴 죽여 버렸다.”

 

당시 캘리 중위의 명령을 받고 미라이 학살에 가담했던 육군 병사 폴 메들로는 방송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방송 진행자어떤 사람들이었죠양민여자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양민여자아이들요.

 

방송 진행자아기도요?

 

폴 메들로아기도요.

 

폴 메들로캘리 소위가 와서 그랬어요저들을 어째야 하는지 알지그래서 전 '라고 했죠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소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전 자동화기를 쐈는데그냥 마구 갈겼습니다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양민여자아이들을요?

 

폴 메들로양민여자아이들요.

 

방송 진행자아기도요?

 

폴 메들로아기도요.

 

폴 메들로내가 왜 그랬냐고요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정말로요전우를 잃었거든요정말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그게 마음에 걸렸어요그게 마음에 걸려서요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어린이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모르겠습니다.

 

미라이 학살이 아니더라도 사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극에 가까웠다미군은 베트콩을 잡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고남베트남과 호치민루트에 고엽제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했으며소위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를 설정해놓고수색과 섬멸 작전을 이어갔다미라이 학살이 베트남 전쟁에서 공론화 된 이유는 그 학살 자체가 우발적인 것이 아닌 계획적인 학살이었다는 점에 있었다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사진자료가 남아있었고증언을 한 병사들이 있었기에 학살이 진상규명될 수 있었다.

(시모어 허시가 보도한 미라이 학살 기사, 1969년 11월 시모어 허시는 미라이 학살을 보도하면서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미라이 학살이 미국에서 공론화 되던 시점인 1969년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군이 저지른 학살은 미라이 학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비정규전을 치르던 미군은 전략 전술적으로 학살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지 열려있었고또 그러한 위험성이 높은 작전들을 수행했다따라서 미라이 학살은 진상규명이 된 학살일 뿐미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유일한 전쟁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라이 학살이 정말 추악하고 잔인한 학살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학살의 희생자 대다수가 여자노인어린이 그리고 갓난아기와 같은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에 있다이것은 비정규전에서 이성을 잃은 미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짓은 미라이 학살과 같은 잔혹한 전쟁범죄였다따라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을유문화사, 2002

 

미국의 베트남 전쟁조너선 닐책갈피, 2004

 

미국민중사 2하워드 진이후, 2008

 

미안해요베트남이규봉푸른역사, 2011

 

베트남 전쟁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박태균한겨례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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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전집 6 : 쏘련기행 중국기행 외 이태준 전집 시리즈 (소명출판) 6
이태준 지음, 상허학회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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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의 침략을 받았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전후재건의 속도를 보여줬다. 소련이 전 세계에 보여준 변화상은 놀라운 수준이었고,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냉전시기 소위 반공 제국주의 진영에 섰던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준 소련의 놀라운 변화상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소련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는 당연히 1948년 정부수립부터 강력한 반공국가를 유지해왔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8년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분명히 좌익이라는 존재와 가치를 파리나 벌레만도 못한 대상으로 취급하던 극단적 매카시즘 국가였지만, 정부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민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한에서 친일 경찰에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좌익인사들이 월북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또 많은 이들이 월북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월북을 선택했던 이들 중에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상징적 지표인 이태준이 있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던 이태준은 좌우대립이 남한 내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던 19468월 월북했다. 월북을 하게 된 이태준은 북한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에서 만든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써 소련을 여행하고 오는 일이었다. 이 여행 과정에서 이태준은 자기가 직접 보고 체험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쏘련기행(The Trip of The Union of Socialist Republics)’이었다.

 

이태준 작가가 쓴 쏘련기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468월부터 10월까지 방소문화사절단의 일행으로 경험했던 소련 기행문이고, 두 번째는 10월 혁명 32주년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쪽 일원으로 방문했을 당시의 소련 기행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6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게 된 이태준은 월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곳바로 소련여행을 떠나게 됐다. 소련에 가기 위해 평양에 있는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게 된 이태준은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소련 제1극동전선군의 제25군 사령관이자, 소련군정 최고 사령관인 치스차코프로부터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19463월 영국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지도자였던 윈스턴 처칠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이른바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직은 미국의 반소 반공정책인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 발표되진 않은 시점이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갈등은 심화됐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 또한 마찬가지였고, 특히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친미정권을 세우고자 했으며, 여기서 친일파들의 힘을 빌렸다.

 

35년간 조선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 소련을 매우 적대시했다.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많은 사회주의 단체들과 학생운동들이 일어났고,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이들은 민족주의 계열보다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농민·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주장하며, 대중과 민중속에 파고들어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근간을 흔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소련을 당연히 악마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세력도 그 당시 이 흐름을 따랐다.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결탁하였던 친일파들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부역하며 반소선전과 반공선전을 일삼았다. 즉 해방 후 미군정을 등에 업고 반소선전을 했던 친일파들의 거짓말과 선전은 35년간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했던 반소선전과 일맥상통했다. 필자가 보기에 소련군정 최고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이태준 작가에게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고 말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해방 후 친미 제국주의자들이 하는 반소선전의 거짓말이 어떤 것인지를 소련에 가서 직접 알아보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 소련의 상황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처참했다. 무엇보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이 일으켰던 독소전쟁으로 모든 것이 초토화 된 상황이었고, 4년간의 반파시스트 항쟁에서 2700만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죽었다.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며 저지른 만행은 씻을 수 없는 인류 최악의 전쟁 범죄였다. 그러나 단결한 소련 인민들은 침략자 히틀러에 맞서 군대와 인민이 단결했고, 소련의 육··공군은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영웅적으로 무찔렀다. 책의 저자 이태준은 10월 혁명 32주년에 맞춰 두 번째로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소련군 퍼레이드를 보게 되었는데, 이들을 본 이태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마다 선두에 말굽소리 달리며 사령관의 열병을 맞이하는 우라!” 소리가 성벽을 진동하며 일어났다. 뒤이어 역사박물관 쪽으로부터 자동차에 실린 낙하산부대와 대지를 뒤흔드는 탱크부대가 들어섰다. 탱크들은 앞에 내뻗은 포열마다 적의 비행기와 탱크를 쳐부순 수효대로 비행기와 탱크의 흰빛으로 그렸는데 하나같이 10여대씩 그린 영웅 탱크들이었다. 서구에서 10여 국가들을 침략하였고 이 위대한 10월에서 탄생했으며 레닌과 스탈린에게 영도되는 쏘련을 감히 유린해 들어오던 히틀러 야만들을 꺼꾸러뜨린 영용한 군대와 병기들이 바로 이 군대와 이 병기들이며 동양에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을 비롯하여 여러 약소민족들에게 악독한 흡혈귀 노릇을 하던 일제를 쳐부순 것도 저 성스러운 군대와 병기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22

 

이태준 작가의 말대로 소련의 탱크와 비행기 대포는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을 멸망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련은 이 전쟁에서 수많은 산업기반이 전시 초기에 파괴되었고, 2700만이나 되는 인명이 이 전쟁에서 죽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소련은 경제적으로 다시 재건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른바 전후재건을 위한 5개년 계획에 착수했고,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련인민들은 전후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태준이 방문했던 1946년 소련은 분명히 전후재건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낙후성을 던져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유로 들어 간악한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반소선전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들은 항상 편향된 자료와 관점을 가지고 거짓선전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소련민중이 왜 스탈린과 소련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지를 놓쳤다. 그것은 바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쏘련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민족들의 연맹에의 가맹과 탈퇴는 자유이며 민족들의 선진, 낙후의 차별이 없이 절대평등이 원칙으로, 자민족문화 중심으로의 발전의 자유, 그리고 이런 자유와 평등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서는 낙후민족의 경제 상태를 비약시키지 않을 수 없으므로 농본지대를 농공지대화, 혹은 공농지대화의 중대한 과입이 생긴 것이라 한다. 전 연방 내에서 러시아공화국 같은 선진민족으로도 자기만 경공업에까지 손을 대어 인민의 일반 소비면을 윤택하게 해주지 못한 것은, 그래서 외부인들이, “소비에트 인민들의 생활이 무엇이 풍족하냐?”고 성급히 보아버릴 수도 있게 된 원인은, 실상은 16공화국이 다 잘살 수 있는 광범하고 평등한 공업기초에부터 전력을 집중해온 때문이었다. 그 결과 낙후된 민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라고 있었는가는, 키르키스스탄 공화국이 혁명 전에는 제유공장 1, 치즈공장 1, 제혁공장 2 모두 수공업적인 4개 공장이던 것이 1945년에는 대소 5천 공장이 생기었고, 그중 4백여 공장은 전 연방적으로 유력한 공장들이라 한다. 이 낙후된 농본지대였던 키르키스는 지금 국민경제의 70%가 공업생산에 의존되는 것이라 했고 이런 부력의 비약은 모든 문화의 조건을 또한 비약시켰을 것은 필연의 사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55~56

 

그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1930년대 공업화를 통해 이른바 중앙아시아에 있는 연방과 그 약소민족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했고, 자본주의가 하지 않는 사회적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다. 의료와 보건은 무상이었으며,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국가가 전액을 지원하는 무상교육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무상교육의 혜택은 소련에서 유학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이태준이 만났던 소련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천문학적인 학비를 유학생들뿐만 아니라 자국민에게 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또한 책에서 나온 소련은 원주민과 유색인종에게 인종차별을 마음껏 발산하던 제국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으며, 인종차별은 철폐되었고, 소련에 사는 소수민족의 권리가 증진되었으며 이들의 교육율도 매우 높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외면당하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진실이다. 쏘련기행에선 당시 미국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과 소련의 소수민족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얘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도 보았지만 25(인구)밖에 안 되는 도시에 전문대학이 아홉, 중학교가 60, 영화관과 극장이 열, 이런 고도의 문화시설은 그만한 경제력의 배경 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아르메니아의 단독실력으로는 이런 비약적 건설을 도저히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장이라고는 넷밖에 없던 키르키스스탄공화국이 공장 5천을 가진 것이나, 이것은 1940년에 미국 '트라이셀'이란 평론가가 지적한 것이지만, 1913년대에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소비에트의 타자키스탄공화국이 문맹비율이 동일했었는데, 17년 후 1930년에 이르러, 아메리칸 인디언은 문맹이 2%가 줄었고 소비에트의 타지크는 문맹이 60% 가 줄었다는 것이 우리는 어떤 감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출처 : 쏘련기행 p.114

 

19468월부터 10월까지 이태준을 포함한 방소문화사절단은 격리촌부터 시작하여, 이르쿠츠크, 치타, 모스크바, 아르메니아공화국, 그루지야공화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와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돌아보고 왔다. 2달 동안의 여행과정에서 이들이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비록 전후재건 중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민의 당연한 권리가 적어도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인정되고, 인식되는 국가였다. 무엇보다 히틀러 침략으로 인한 상상을 초월하는 타격을 입고도 전후재건에 나서는 소련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에게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으며, 그런 감동적인 감정들이 책에 묻어나 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9년 이태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 문화 활동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됐는데, 그가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불과 3년전 하고도 매우 달랐으며, 더 많은 방면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 방문하던 1946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물자가 풍족하지 않아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1949년 시점에는 소비재 부분도 많이 성장하여 배급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국영상점들이 늘었으며, 소련 자체생산 기술로 조립된 자동차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태준은 이런사실들을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3가지 내용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호텔 건너편에는 큰 식료품점이 있어 마주 건너다 보였다. 김 서린 진열창에 포장 화려한 식료품들은 온실 속의 화초 같았고 자정 가까울 때까지 문이 열려 있는데 자동차를 세우고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우선 나의 시야는 호텔 주변에 국한된 것이나 왕래하는 시민들의 의복이나 신발이 3년 전에 볼 때와는 월등히 우수해졌고 식료품 상점 앞에서도 배급을 타러 줄지어선 광경은 다시 볼 수 없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출처: 쏘련기행 p.201

 

이튿날 우리는 모스크바의 중요한 거리들을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았다. 네거리를 만날 때마다 앞을 가로 건너는 자동차의 떼로 한참씩 기다리게 되는데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차는 어쩌다 한대씩 볼 수 있는 정도다. 물론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 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즐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13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혈색이 좋고 명랑한 기분드로 일하였다. 그전 일제 때 조선서 전매국에 다니는 여공이라면 으레 담뱃독에 찌들은 것 처럼 얼굴빛 누르고 한참 학교 다닐 소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 담배공장에는 그런 과로와 빈혈의 여공들은 볼 수 없었다. 모두 흰 작업복들을 입고 먼지 없는 작업장에서 유쾌히들 일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착취되는 노동이 아니라 자기들의 공장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위햐 하는 노동이며 더욱 세계 전체를 착취 없는 사회로 개조하는 위업에 선두에 나선 쏘련 노동자다운 긍지들로 차 있었다. 2천 명 노동자중에 약 2백 명우 벌써(1110) 연간 계획량의 200프로를 초과완수하고 있었다. 노동임금은 최하 견습공이 5백 루블부터요 숙련공은 2천 루블까지 있었다. 모스크바서 승용차 한 대에 7천 루블이라 하니 숙련공의 석달 반 월급이면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공장 안에는 식당이 있는데 빵고기우유맥주사이다케이크 등이 실비로 제공되고 있었고 식당은 김 서리는 접시들과 함께 따스하고 정갈하였다. 공장 곁에 있는 노동자 주택을 가보았는데 군데군데 자동 엘리베이터가 있고 부엌 식당 침실 목욕간 등과 스팀 전열 가스 수도의 완비와 가구들의 호화로움은 물질생활의 높은 수준을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라디오, 손풍금, 바이올린 등 악기들과 책상 위에는 문학 서적이 많을 것을 보아 이 공장 노동자들의 문화 정도의 높음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노동자의 집에는 사진기도 걸리었고 오토바이와 사냥총도 있었다.

 

이런 공동주택을 이웃하여 탁아소와 아동공원이 있었다. 탁아소는 조선에도 많이 있거니와 아동공원이란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학교에 들기 전 어린이들이 오는 유치원 셈이다. 여기는 아이들 놀기 좋고 자연과 친할 정원이 있고 집안에는 노래하는 방, 유희하는 방, 낮잠 자는 방, 밤에 자는 방, 식당 등이 있다. 아이들은 오면 똑같은 옷으로 갈아 입었고 집에서 다니는 아이와 여기서 자며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출처: 쏘련기행 p.244~245

 

많은 사람들이 소련하면 오로지 군사력만 투자한 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문학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을 읽어보면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풍요롭진 않더라도 미국보다 민중의 권리와 복지를 훨씬 더 많이 책임지고 있었으며, 전쟁의 폐허속에서도 그러한 가치들을 지키고 실천했다. 즉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당시 경쟁자였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보다 인종차별, 교육, 의료, 주거면에서 훨씬 더 진보적이고 인민들에게 많은 부분을 챙겼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외면하는 소련의 진실이며, 소련의 어떤 사회였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명확한 팩트다. 그런 점에서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소련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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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초 강철비2를 보게 됐다. 영화 강철비22017년에 개봉했던 영화 강철비의 후속작으로 북미정상회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후속작은 전편에 출연한 배우들이 나왔다는 점만 빼면 1편 스토리와의 연결점이 전혀 없는 다른 영화로 볼 수 있을 정도다. 지난 8월에 본 영화 강철비2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확실히 더 잘 만든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 자체가 지나치게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만들어 졌다는 부분과 트럼프 역할이 진중하지 않고 너무 개그캐로 갔다는 비판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에 대한 입장을 떠나 한국 영화의 진일보를 보여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리뷰에서 강철비2가 어떤 점에서 진일보 했는지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다시 일어나는 일본 제국주의

 

영화상에서 나오는 반대 세력 내지는 적이라 볼 수 있는 대상중 하나는 일본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센카쿠 열도(중국말로는 댜오위다오)를 중심으로 해상분쟁을 하는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를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을 패망시킨 미국의 힘을 업어 미국의 반공 라인으로 있으며 경제성장을 한 일본의 극우들을 통해 이들이 항상 본인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시키는 대상은 항상 조선반도(한반도)였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일본 극우세력의 막강한 파워 중 하나인 모리 신죠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80여 년 전 미국이 석유를 끊자 우리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고 여기 원폭 투하로 우리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대한 일본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번엔 경제였죠. 불과 30여 년 전 도쿄의 반만 팔아도 미국의 땅 전부를 살 수 있을 만큼 세계 경제 패권은 우리 일본의 차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린 미국에게 또 당했습니다. 플라자 합의라는 엔화의 인위적 절상을 통해 우리 일본은 이제 한국에게조차 무시당할 만큼 후퇴했습니다. 미국이 우리의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세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깊이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이것은 과거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범죄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혀 반성없는 모습의 일본과 전쟁 후 미국의 도움으로 반공의 보루로써 급격히 경제성장한 일본 그리고 미국과는 동맹이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적 야심과 관점을 버리지 않은 일본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일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 이 발언 이후 계속되는 모리 신죠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빌어먹을 양키 놈들! 우리보고 중국과 붙으라니, 이제 더는 미국놈들한테 놀아나서는 안 돼. 이제는 우리가 미국을 이용해야 돼. 미국놈들이 원하는 대로 중국과 일전을 벌일 것 같이 뜸 들여 주면서, 우리는 빼앗긴 우리의 영토를 되찾자고!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반도의 6.25까지 우리 일본이 일어설 때 시작은 항상 조선반도였다. 한국과 일전을 하게 되면 잠들어있는 우리의 야마토 정신이 살아날 것이네.”

 

영화에서 나오는 이런 대사는 현재 독도를 일본땅으로 만들고, 미국을 이용하여 중국과 영토 갈등을 벌이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한반도의 문제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영토 분쟁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역겨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사라 생각한다. 이렇듯, 한반도 문제를 접근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분단과 미중분쟁을 통해 얻으려는 계산이 무엇인지를 영화가 보여준 점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점이라 생각한다.

 

2. 영화상에 드러나는 미국 네오콘의 폭력성과 오만한 그리고 미중갈등

 

영화는 부제목으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을 걸어놓았지만, 단순히 북미 관계만 보는 것이 아닌 미국과 중국의 대립 구도와 갈등 그리고 중국과 싸우려는 미국 네오콘들의 폭력성과 오만함을 아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현재 미국이 생각하는 한반도의 구도란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 미국 일본이 북한 중국 러시아에 대항하는 구도일 것이다. 영화는 한반도의 이런 신냉전적 구도를 무시하지 않는다.

 

특히나 초반에 보여주는 미중분쟁과 갈등을 보여줬듯이, 영화는 중국 자체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미국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도 보여준다.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군사작전 카게무샤는 미국이 어떤 나라고,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선 스무트(트럼프)를 대신하여 대통령 권한을 위임받은 부통령 조앤 마틴은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다음과 같은 대사를 자기 측근에게 한다.


 

네오콘은 중국이 21세기에 나타난 나치라고 생각해. 언젠가 우리랑 한판 붙을 거라고 믿고 있지. 이왕이면 이길 수 있을 때 밟아놔야지. 안 그런가?”

 

이 대사는 현재 회고록 공개로 문제가 된 존 볼튼 같은 네오콘들 즉 북폭론자 반공주의자들이 북한과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대사다. 또한 영화에서 언급되는 카게무샤 작전의 목적은 중국의 정권교체이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해상에서 자기들이 벌인 조작극을 중국에게 뒤집어 씌운는 것이 작전의 계획이라는 것에서도 영화가 미국 네오콘들이 어떠한 집단이고 왜 오만하고 위험한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3. 북핵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영화가 부제목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걸고 있듯이,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북핵 문제다. 실제로 남북 4.27회담과 제1,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항상 이슈가 됐던 주제중 하나가 북핵문제다. 영화는 북핵문제를 북한이 비핵화 해야 한다는 기본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와는 다르지만, 한국 영화치고 매우 진일보한 관점으로 북핵문제를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김정은 역할인 조선사는 평화협정을 두고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소련이 망하고 남조선이 중국이랑 러시아랑 수교했던 30년 전 우리는 자존심 다 내려놓고 미국에 수교를 간청했습니다. 근데 미국은 조선은 망한다고 대상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게 핵입니다. 핵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우릴 대상이라도 해 줄 테니까 대통령께서 거기 앉기까지 30년이 걸렸습니다. 거기 종이 쪼가리에 이름만 쓰면 우리 인민들이 30년 동안 썩어지게 고생해서 만든 핵무기를 몽땅 넘기는 겁니다. 근데 그거 이름 몇 자 쓰는게 그렇게 힘듭니까?”

 

조선사의 대사처럼 실제로 북한은 냉전의 종식이라는 시대사적 격동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에게 수교를 간청했다. 그리고 미국은 동구권의 몰락을 보며 북한이 막연히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거기다 1994년에는 한반도 전쟁 위기까지 있었다. 즉 거기서 선택한 것이 북한의 핵개발이다. 영화 강철비는 이러한 시대사적인 맥락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영화상에서 이러한 접근을 한 것은 매우 진일보한 접근이고, 관점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의 핵문제를 단순히 북한 정권의 일탈행위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고, 그러한 노력들을 영화상에서 상당히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높게 평가를 개인적으로 내릴 수밖에 없다.

 

4. 결론

 

대표적으로 영화의 3가지 지점을 얘기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듯이, 나는 영화 강철비2를 감명깊게 봤다. 개인적으로 전작인 1편보다 더 잘 만든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이 빨갱이 영화라며 공염불에 가까운 이상한 비난을 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북한의 쿠데타라는 주제는 매우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이다. 물론 그 쿠데타라는 설정상 상당한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를 국제적인 변화와 이해관계 그리고 맥락속에서 접근하고, 북한의 입장도 상당부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영화 강철비2는 훌륭한 수작이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종전협정 그리고 남북통일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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