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려 프랑스와 베트남독립동맹 사이에 평화협정을 주재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지역으로 일시적으로 철수할 것, 베트남독립동맹은 북부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 2년 이내에 통일 베트남에서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의 정부를 뽑기 위한 선거를 실시할 것 등이 합의됐다.

 

미국은 베트남의 통일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국은 얼마 전까지도 뉴저지에 살고 있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라는 전직 베트남 관리를 국가수반으로 앉히고 예정된 통일선거를 실시하지 말라고 부추겼다. 1954년 초에 열린 미 합참회의 비망록은, 정보부의 평가에 따르면 자유선거에 기반을 둔 해결이 이루어지면 연합 3(Associated States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공산주의의 수중에 빼앗기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 확실하다고 언급했다. 디엠은 베트남독립동맹이 요구하는 선거를 거듭해서 가로막았고, 미국의 자금과 무기 지원으로 디엠 정부의 기반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에서 지적한 것처럼, “남베트남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피조물이었다.”

 

디엠 정권은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대다수 베트남인이 불교도인 데 반해 디엠은 가톨릭교도였고, 농민들의 나라인 베트남에서 디엠은 지주에 가까웠다. 겉치레뿐이었던 디엠의 토지개혁은 결국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디엠은 현지인들이 뽑은 성() 행정장관을 사이공에서 직접 임명한 휘하의 인물들로 대체했다. 1962년에 이르면 성 행정장관의 88%가 군인으로 교체됐다. 디엠은 정권의 부패와 개혁의 결여를 비판하는 베트남인들을 점점 더 투옥하게 됐다.

 

디엠의 국가기구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한 반대가 급격하게 성장했고, 1958년경에는 정권에 맞서는 게릴라 활동이 시작됐다. 하노이의 공산당 정권은 남베트남의 반체제 운동을 원조, 장려했으며 게릴라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남부로 사람들(이들 대부분은 제네바 협정 뒤 북부로 간 남부인들이었다)을 보냈다. 1960년에 남부에서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이 결성됐다. 그들은 정권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을 결집시켰고, 그 힘은 민족해방전선을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바꿀 수 있는 희망으로 바라본 남베트남 농민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미국 정부 분석가인 더글러스 파이크(Douglas Pike)는 반란자들과 나눈 대담과 노획한 문서들에 기초해 저술한 베트콩(Viet Cong)에서 미국이 직면한 사태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노력했다.

 

대중조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의 2,561개 촌락에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사회 조직을 만들어 냈다. 민족해방전선을 제외하고는 남베트남에는 실제로 대중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파이크는 이렇게 썼다. “공산당원들은 남베트남 촌락들에 의미심장한 사회적 변화를 야기했으며, 그 대부분은 통신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전사라기보다는 조직가였다. “민족해방전선에 관해 무엇보다도 내가 놀란 점은 사회혁명을 첫 번째로, 전쟁을 두 번째로 삼은 그들의 완전성이었다.” 파이크는 이 운동에 농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베트남 농민들은 단지 권력투쟁의 볼모가 아니라 공격의 예봉으로 간주됐다. 그들은 최선봉에 서 있었다.” 파이크의 말을 들어보자.

 

이 광범위한 조직화 활동의 목표는 촌락의 사회적 질서를 개조하고 자치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민족해방전선이 처음부터 줄곧 견지해 온 취지였다. 남베트남공화국군(ARVN) 병사들을 살해하는 것도, 부동산을 점거하는 것도, 어떤 대규모 총력전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라, 자치라는 수단을 통해 농촌 주민들 한가운데서 조직화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파이크는 1962년 초반 당시 민족해방전선의 성원이 약 30만을 헤아린다고 추산했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는 이 시기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로지 베트콩만이 농촌지역에서 실질적인 지지를 얻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1년 초에 대통령직에 오른 케네디는 트루먼과 아이젠하워의 동남아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했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케네디는 거의 취임과 동시에 파괴행위와 가벼운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북베트남에 요원을 파견하는등의 베트남과 라오스에 대한 다양한 비밀 군사행동 계획을 승인했다. 일찍이 1956년에 케네디는 디엠 대통령의 놀라운 성공을 거론하면서 디엠 치하의 베트남에 관해 이 나라의 정치적 자유는 일종의 영감을 준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19636월 어느 날, 사이공의 광장에서 한 불교 승려가 앉은 채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뒤이어 더 많은 불교 승려들이 디엠 정권에 대한 반대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분신자살하기 시작했다. 디엠의 경찰은 불교 사원을 습격,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을 체포했으며 사원을 폐쇄시켰다. 사이공에서는 시위가 잇따랐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대의 수도였던 후에(Hue)에서는 1만 명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제네바 협정에서 미국은 남베트남에 685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비밀리에 수천 명을 파견했다. 케네디 행정부하에서는 그 숫자가 16,000명으로 늘어났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전투작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디엠은 패배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현지 촌락민들이 남베트남 농촌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디엠은 성가신 존재이자 베트남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몇몇 베트남 장성들이 루시언 코네인(Lucien Conein)이라는 중앙정보국 요원과 접촉하면서 디엠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코네인은 쿠데타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미국 대사 헨리 캐버트 로지와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로지는 1025일에 케네디의 보좌관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저는 각자 분명하게 제가 내린 명령을 실행에 옮긴 찬반돈(Tran Van Don) 장군과 코네인 사이의 만남을 이미 개인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케네디는 주저하는 듯했지만 디엠에게 경고하는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로지는 쿠데타 직전이자 코네인을 통해 쿠데타 음모자들과 접촉을 가진 직후에 한 해변 휴양지에서 디엠과 주말을 함께 보냈다. 1963111, 군 장성들이 대통령궁을 공격하자 디엠은 로지 대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래와 같은 대화가 오갔다.

 

디엠: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미국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로지: 그런 말을 할 만큼 많은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총소리를 듣긴 했지만, 저는 아직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지금 워싱턴은 새벽 430분이고, 미국 정부 역시 어떤 견해를 제시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디엠: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대체적인 생각은 있을 거 아니오.

 

로지는 자신이 그의 신변안전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다시 전화를 달라고 말했다. 그것이 디엠이 미국인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디엠은 대통령궁에서 도망쳤지만, 동생과 함께 쿠데타 세력에게 붙잡혔고, 트럭에 실려 끌려간 뒤 처형됐다. 그에 앞서 1963년 초에 케네디 행정부의 국무차관 U. 알렉시스 존슨U.(Alexis Johnson)은 디트로이트 경제인 클럽(Economic Club of Detroit)에서 연설을 했다.

 

수세기에 걸쳐 사방에서 공격을 가한 강대국들에게 동남아시아가 어떤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동남아시아가 탐나는 지역이자 중요한 지역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동남아시아는 기후가 좋고 토양이 비옥하며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데다가 그 대부분 지역이 비교적 인구밀도가 희박하며 확장할 수 있는 여지도 많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쌀, 고무, 티크목재, 옥수수, 주석, 향신료, 석유 등 수출가능하면서도 풍부한 자원이 넘쳐납니다.”

 

이것은 케네디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설명할 때 구사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1962214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 정부와 국민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원조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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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있는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73911일은 칠레에게 있어서 비극의 시작이었다. 1970년 민주적인 선거로 탄생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은 시작 초기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경제제재와 억압 그리고 CIA가 주도한 노골적인 테러리즘에 휩싸였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압도적이었고, 2019년 베네수엘라에서 민중들이 마두로 정권을 지지했듯이 칠레에서도 민중들이 아옌데 정권을 수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닉슨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73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칠레 역사상 최악의 민간인 학살과 인권 탄압을 저질렀다.)

 

닉슨 대통령은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통해 칠레 쿠데타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당시 화폐 가치로 약 9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즉 피노체트 세력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비용으로 각종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했고, 궁극적으로 197391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던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포위시킨 뒤, 진압군대를 보냈다. 아옌데와 그의 동지들은 쿠데타 군대에 맞서 총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아옌데는 칠레 만세! 노동자 만세!”를 외치며 자결은 선택했다.

(쿠데타 군대에게 포위당안 아옌데의 대통령궁)

 

아옌데가 죽고 나서 칠레 역사는 먹구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피노체트와 군부 일당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칠레 전역에 있는 축구 경기장과 군의 막사, 운동장 및 각종 시설들이 민중을 구금하는 시설로 전락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체포 및 구금됐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당일부터 피노체트 정권은 최소 3,2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인 수치는 이것보다 더 높다.

(운동장에 집결한 피노체트의 군대,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정권을 잡은 이후 당일에 3200명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이런 체포, 구금, 처형 과정에서 외국인 색출 작업이 기승을 부렸다. 아옌데 정부가 조직한 게릴라 부대에 외국인이 가담했다는 게 이유였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병사들도 총살됐다.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도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사살됐다. 아옌데 정부 시기 인민연합 정치를 펼쳤던 칠레 좌파정당이나 좌파정당의 평당원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도 피노체트 정권에서 탄압받았다. 많은 이들이 살해되거나, 하루아침에 실종됐다. 피노체트가 다스린 군사독재 17년 동안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이 이런 식으로 군부 정권에 의해 죽어나갔다. 칠레 전역이 민중들과 좌파들의 피바다로 물들어졌다.

(인민들을 체포하는 피노체트의 군대)

 

이렇게 죽거나 고문당했었던 이들 중에는 어린이 수십 명도 포함됐다. 고문당하거나 수감되는 과정에서 부모가 실종된 수천 명의 아이들이 고스란히 방치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가했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들도 유린당했다.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강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칠레의 유명한 좌파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감당했던 이들은 엠마 왓슨이 출연한 영화 콜로니아에 나온 것처럼 친나치 인사들이 만들어낸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칠레의 역사 박물관에 있는 피노체트 정권 희생자들의 사진들, 사회운동을 거치며 투쟁해온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 시기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피노체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칠레의 역사는 암흑의 터널에 진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서서히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스크주의를 박명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히 축출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을 민영화했고, 여타 광업 부문을 외국계 업체에 개방했으며, 칠레의 여러 지하자원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수입 상품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칠레의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실업과 빈곤율이 급등했고, 임금도 급락했다. 칠레 좌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사회적 성과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칠레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인민 연합 집권기인 1970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였을 정도다.

(사회주의 포스터,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공부하면 반미주의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워낙 미국이 저지른 만행과 폭력이 심하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아옌데, 체게바라, 차베스 등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박정희를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뉴라이트들은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칠레의 피노체트가 민생을 살렸다는 얘기를 종종 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피노체트의 경제성장은 부익부 빈익빈에 입각한 경제 지표의 상승이었을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02010월 칠레에선 피노체트 헌법이 민중의 힘으로 전면적으로 폐지됐다. 피노체트 또한 1990년에 물러나게 됐다. 이것은 칠레인들이 아옌데 사후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간 투쟁의 결과였다. 2006년 피노체트가 사망했을 당시, 적잖은 칠레인들이 그의 죽음을 환영했다. 영국에서 2012년 마가렛 대처가 죽었을 대처럼 말이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칠레 역사에 있어서 앞으로도 암흑의 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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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이 베스트 셀러인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 나온 베트남 전쟁 관련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좋은 글이라 이렇게 올려봅니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조직화된 인간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일찍이 이 나라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반전운동이 있었고 이 운동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1960년대의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이었다.

 

1945년 가을,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전쟁 초기에 점령한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인도차이나의 혁명운동은 이미 성장을 거듭해 오면서 식민지배를 끝장내고 인도차이나 농민들의 새로운 삶을 쟁취하기로 결의한 상태였다. 호치민(Ho Chi Minh)이라는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혁명가들은 일본에 맞서 싸웠고, 일본인들이 철수한 1945년 말에 하노이에서 100만 명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온 가운데 극적인 기념식을 열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the Citizen)과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많은 구절을 빌려온 베트남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는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그것이다.” 1776년에 미국인들이 영국 국왕에 대한 불만을 열거했던 것처럼, 베트남인들도 프랑스의 지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법들을 강요했다. 그들은 학교보다 감옥을 더 많이 지었다. 그들은 우리의 애국자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며 봉기를 피바다로 물들였다. 그들은 여론에 족쇄를 채웠다. 그들은 우리의 논과 우리의 광산, 우리의 숲, 우리의 천연자원을 강탈했다. 그들은 셀 수조차 없는 부당한 과세를 만들어 우리 국민, 특히 우리 농민들을 극빈상태로 몰아넣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200만 이상의 우리 동포가 굶어죽었다. 공통된 목적으로 고취된 전체 베트남 인민은 이 나라를 재정복하려는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어떤 시도에도 죽을 때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하는 바이다.”

 

원래 일급 기밀이었지만 유명한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사건으로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와 앤서니 루소(Anthony Russo)에 의해 공개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 국방부 연구서는 호치민의 활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베트남 전체 차원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호치민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베트남의 유일한 전시 지도자였으며, 1945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을 타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하고, 진주하는 연합군을 위해 환영식을 개최하면서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충성을 얻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19459월의 몇 주 동안, 베트남은 근대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호치민의 지도하에 남아서 북까지 통일됐다.”

 

서구 강대국들은 이미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남반부를 점령하고 곧 그 지역을 프랑스에 돌려줬다. 국민당의 중국(공산주의 혁명 전까지 장제스가 지배하고 있었다)이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했는데, 미국은 프랑스에 돌려주라고 중국을 설득했다. 호치민은 한 미국 언론인에게 우리는 분명히 아주 외로운 상황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458월에서 19462월 사이에 호치민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8통의 편지를 보내 대서양 헌장의 민족자결권에 관한 약속을 상기시켰다. 한 편지는 트루먼과 유엔에 동시에 발송됐다.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해 순수하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귀하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1944년 겨울부터 1945년 봄 사이에 베트남인 200만 명이 굶어죽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모든 쌀을 강탈해 썩을 때까지 저장해 두는 기아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 여름에는 경작지의 3/4이 홍수로 침수됐고 극심한 가뭄이 잇따른 결과 정상적인 수확량의 5/6가 소실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세계 강대국들과 국제구호기구에서 즉각적인 원조를 해주지 않을 경우 우리는 임박한 재앙에 맞닥뜨릴 것입니다.”

 

트루먼은 결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194610월에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Haiphong)을 폭격함으로써 누가 베트남을 통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베트남독립동맹운동과 프랑스 사이에 8년간 이어질 전쟁이 시작됐다. 1949년에 중국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고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미국은 막대한 양의 군사원조를 프랑스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1954년까지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 전체를 무장시키기에 충분한 소형화기와 기관총 30만 정과 10억 달러를 제공했다. 모두 합해 미국은 프랑스의 전쟁 수행 비용의 80%를 부담하고 있었다.

 

미국은 왜 이런 일을 했을까? 국민 대중에게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돕고 있다고 말했지만, 대중적인 논의는 많지 않았다. 1950년의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비망록에는 훗날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이라 알려지게 된 논리(마치 일렬로 늘어선 도미노처럼, 한 나라가 공산주의에 굴복하게 되면 다음 나라도 똑같이 굴복하고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진다는 논리)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따라서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지지 않게 막는게 중요한 일이었다. 19526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비망록 역시 중국, 필리핀, 대만, 일본, 대한민국 등으로 이어지는 미국 군사기지의 연결을 지적했다.

 

동남아시아 전역을 공산주의가 지배하게 된다면, 태평양 앞바다 섬들을 연결하는 미국의 입지가 불확실해지며 나아가 극동에서 미국의 근본적인 안보이익도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특히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는 천연고무와 주석의 세계적인 주산지이자 석유를 비롯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상품의 생산지이다.”

 

또한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쌀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게 될 경우 궁극적으로 일본이 공산주의와 타협하는 사태를 막기가 극도로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도 지적됐다.

 

1953년 하원의 한 조사단은 이렇게 보고했다. “인도차이나 지역은 쌀, 고무, 석탄, 철광석 등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다. 인도차이나는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해 국무부의 한 비망록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고, “토착민들의 충분한 지지를 얻는 데실패했으며, 협상을 통한 해결은 결국 인도차이나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역을 공산주의에 넘겨주는 사태를 의미할 뿐임을 우려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가 실제로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린다면, 미국은 이 지역을 접수할 것인지에 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1954년 베트남인들은 호치민과 혁명운동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으며, 반대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 프랑스는 결국 철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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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이 쓴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가 출간되던 1974년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가던 시절이었다. 19615.16일 그가 단행한 군사 쿠데타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을 정도로 1940,5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매카시즘 그 이상의 반공주의 정신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이에 따른 억압과 공포는 지식인들에게 말도 못했고, 리영희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 사상적 암흑기에 가까웠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혁명적 농민 군대의 승리로 끝나고 난 뒤, 박정희는 이른바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하여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했다.

 

사상의 은사라고 불리는 리영희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정부가 그를 구속시킨 수단은 바로 반공법(Anti-Communist Law)’이었다. 특히나 그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서술과 더불어 또 다른 서술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당시 우리가 적으로 여기던 중공 그러니까 현대중국에 대한 서술이었다.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당시 중공이라고 불리던 국가에서 단행된 일들과 그 나라의 근현대 역사를 민중혁명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했고, 당연히 반공을 강요하던 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반공법을 적용시켜 그를 감옥에 보냈다.

 

그 외에도 리영희는 중국 8억인 과의 대화에서 중국 일반인민들이 현재 미국 사람들 보다 보편적으로 더 많은 의료 혜택을 받는다고 서술했으며, 1960년대 마오쩌둥이 단행한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새로운 혁명 사회를 창조하는 것으로써 해석했었다. 물론 문화대혁명의 경우 여러 논란과 더불어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도 그 과오를 인정하고 있기에, 균형적으로 보아야할 역사지만, 당시 리영희의 시각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보면 마오쩌둥의 중국의 탄생과정을 생생히 알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당시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던 중공의 역사는 민중혁명사였다. 1842년 아편전쟁과 같은 서구열강의 침략에서부터, 1850년대 태평천국운동, 1900년 의화단 운동,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과 1912년 중화민국의 탄생과 같은 중국 근현대사의 일련의 사건들이 반봉건 반외세에 입각한 투쟁들이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중국 지역 점령과 19195.4운동 그리고 1921년 중국 공산당의 탄생 또한 이런 민중혁명의 과정속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며, 손문 사망 이후 장제스가 일으킨 제1차 국공내전도 중국인민의 민중투쟁이었던 것이다.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과 1937년의 중일전쟁도 그러한 민중혁명적 성격을 띄고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도 민중투쟁이었고, 그 민중투쟁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1949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 그러니까 중공이라는 것이 리영희의 주장이었다. 당시 이러한 관점은 중국을 단순히 북한 괴뢰의 협력자 혹은 빨갱이로만 배워왔던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리영희의 일방적인 주장만은 아니었다. 그는 상당히 많은 외국자료들을 출처로 삼아 중국의 이러한 민중투쟁사를 조명해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그리고 중국혁명을 재해석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중국 혁명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시각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준 위대한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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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장차 수립할 공화국은 정치면에서 반드시 신민주주의적이어야 하며 경제적 면에서도 반드시 신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대은행, 대공업, 대상업은 이 공화국의 국가적 소유가 돼야 한다. “본국인 및 외국인의 기업체로서 독점적 성격을 띠었거나 규모가 너무 커서 개인의 힘으로 운영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은행, 철도, 항로 등은 국가에서 관리운영하고 사유자본제도로 하여금 국민의 생계를 좌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곧 자본을 절제하는 요지다.” 이 역시 국공합작에 의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에서 선포한 장엄한 성명이며 이것이 곧 신민주주의공화국의 경제구성의 정확한 방침이다. 무산계급 영도하의 신민주주의공화국의 국영경제는 사회주의 성격을 띠며 전반 국민경제에서의 영도적 역량이 된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자본주의적인 기타의 사유재산을 몰수하지는 않으며 국민의 생계를 좌우하지 못하는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금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의 경제가 아직도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이다.

 

이 공화국은 어떤 적절한 방법을 취하여 지주의 토지를 몰수한 후 그것을 땅이 없거나 땅이 적은 농민에게 분여함으로써 토지는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손중산 선생의 구호를 실시하여 농촌에 있어서의 봉건적 관계를 일소하고 토지를 농민들의 사유재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농촌에 부농경제가 존재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토지 소유권의 평균의 방침이다. 아 방침의 정확한 구호는 다름 아닌 토지는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아직 사회주의적 농업을 창설하지 않지만 토지는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것이 실시된 기초 위에서 발전된 각종 합작경제에는 역시 사회주의적 요소가 내포된다.

 

중국의 경제는 반드시 자본의 절제토지소유권의 평균의 길을 걸어야 한다. 결코 소수인이 사유로해서는 안 되며 결코 소수의 자본가, 소수의 지주가 국민의 생계를 좌우하도록 해서는 안 되고, 결코 구미식의 자본주의 사회를 세워서는 안 되며, 또한 낡은 반봉건적 사회를 존속시켜서도 절대 안 된다. 누구든지 감히 이 방향을 위반하는 자는 틀림없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며 제가 저를 망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혁명의 중국, 항일의 중국에 수립되어야 하며 또 필연적으로 수립하게 될 내부 경제관계다.

이러한 경제가 바로 신민주주의적 경제인 것이다.

그리고 신민주주의적 정치는 바로 이러한 신민주주의적 경제의 집중적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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