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대한민국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반공주의적 군부 지도층이 정치인이 된 세상이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정권은 공산주의의 자만 나와도 사회주의의 자만 나와도 검열과 감시를 일상적으로 일삼았다. 이런 군사독재 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가들이 겪어야 했던 지적 사상적 암흑기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정도다.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전면화된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은 당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는 전쟁이었다. 중국이나 소련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 등과 같은 서방 진영 또한 이 전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전쟁에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참전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박정희의 한국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박정희 군사 정권을 겪던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60년 한국의 국민들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을 몰아냈지만, 가난에 허덕였다. 그로부터 1년 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른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하여 경제성장을 주도했고, 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황금 빛 엘도라도와 같은 시장을 찾았다. 그 시장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자, 국민들에게 반공투쟁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정희는 이른바 월남파병을 단행하며 조국을 떠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거룩한 전쟁으로 국민들에게 교육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의 경험이 있던 한국사회는 이승만 시절부터 강력한 반공국가였다. 이승만을 이은 박정희 정권은 그 반공주의를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시켰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은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과 시각을 국민들의 반공정서를 이용해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박정희 정권의 행보에 반기를 든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저항적 지식인의 표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李泳禧)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60년대 리영희는 현재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었다. 영어 실력이 매우 뛰어났던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전쟁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어용언론들이 반공성전으로 미화시키는 것에 반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본질을 사실대로 보도하고자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그는 어용언론사에서 베트남 전쟁 취재 및 한국군 파병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를 써 줄 것을 강요당하고 회유를 받았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1974년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작성했다. 그가 집필한 전환시대의 논리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의 독립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1세기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독립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인지를 구체적인 사실관계와 근거를 들어 논증해냈다. 이 책에서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이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일제의 침략, 프랑스의 재침략 그리고 미국의 침략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인지 밝혀냈다. 1964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 참전 구실로 내세웠던 통킹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의 조작극이었다는 사실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아래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 사실은 베트남 식민지 세력의 잔재라는 사실도 아주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했다. 따라서 리영희는 박정희 정권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 연합국의 침략전쟁이며, 이들이 부도덕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입증해냈다. 리영희는 호치민이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왔고, 당시 호치민이 치르고 있던 베트남 전쟁 또한 미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지적 암흑기이던 시대 이런 사실을 주장하면 처벌받고 빨갱이로 몰릴 수 있던 시대에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얘기한 인물이 바로 리영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에 나온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전환을 선물해주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리영희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입증한 사실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가르쳐온 반공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입증해낸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사실로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리영희가 입증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훌륭한 일이고 대단한 업적이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반공의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지를 증명해냈다. 물론 이걸 두려워한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그를 긴급조치 9호 위반 즉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두었지만 말이다. 그가 제시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은 수많은 이들에게 철학전 전환 즉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시각은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반공주의자들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준 위대한 흐름이었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전환시대의 논리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미국이 월남 내란을 월맹과 공산주의자의 원조·지령·사주에 의해서 시작된 침략이라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하기까지의 베트남 정세는 대체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의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돼야 할 전쟁이다.”

 

출처 : 전환시대의 논리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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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LG트윈타워에서 예고도 없이 대량 해고 당한 청소 노동자들과 연대투쟁했습니다. 대기업 LG가 오랜 기간 동안 고용했던 청소 노동자들을 이유도 없이 해고한 것에 대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이들의 복직을 위해 연대했습니다. 한동안 코로나 시국이고, 집회도 제한되는 상황에서 우리 청년학생들이 모여서 연대투쟁을 했습니다. 코로나 방역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삶과 생계 또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복직시키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야 합니다.

 

오랜만에 연대투쟁했습니다. 여러 뜻 있는 동지들과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지금도 여의도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직하는 날 까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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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 니카라과(Nicaragua)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0년대부터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는 미 해병대가 장기주둔했고, 미국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미국이 니카라과를 통치한 것은 당연히 이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니카라과에서의 미국 폭압적이고 착취에 기반을 둔 통치가 지속되자 당연히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토 산디노(Augusto Sandino)였다.

 

산디노는 1920년대 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7년에는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미군 철수를 목표로 투쟁했다. 당연히 미국은 산디노가 이끄는 게릴라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했으며, 무차별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디노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자, 산디노의 게릴라 조직은 군대에 자원한 농민들 덕분에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1931년에는 이들의 군대가 6,000명에 이르렀다. 결국 미국은 1933년 니카라과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모사라는 앞잡이를 이용하여 니카라과를 통치하고자 했고, 1934년 이들은 산디노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6년 소모사가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잡은 소모사는 3대에 걸쳐 권력을 세습했고 대략 43년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독재정권 하에서 좌파들은 1961년에 산디노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른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조직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반정부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이들의 투쟁은 1970년대에 더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거기다 1970년대 들어서 교회, 군부, 지주 등 체제 내의 분열과 마나구아 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 인명 손실 등으로 인하여 3대를 세습하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체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혁명적 무장투쟁을 해오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8년간 지속되오던 이들의 투쟁이 성공한 것이다.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소모사 정권시기 미국이나 외국 기업들에게 착취받던 기업들과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다. 또한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했으며, 은행이나 광산 그리고 니카라과의 천연자원 등도 모두 국유화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불과 1년 만에 니카라과의 문맹률을 12%까지 감소시켰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단행된 토지개혁은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산디니스다 정권은 소모사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 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소모사 독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이처럼 1979년에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미제국주의와 소모사 독재 정권에 억압받고 착취 받던 민중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산디니스타는 곧바로 장벽에 부딪쳤다.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과 방해공작이었다.

 

1979년 니카라과에 좌파정권이 세워지자 미국은 이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온갖 자금과 노력을 퍼부었다. 1980년에 탄생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이른바 반소·반공의 기치를 내세우며, 중남미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확산 되는걸 막겠다며, 고문과 암살·방화·학살 등을 포함한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당연히 미국은 니카라과에서 이른바 반혁명 반동세력인 콘트라(Contra) 반군을 지원했다. 1980년대 이란-콘트라 스캔들에서의 콘트라가 바로 이들이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선발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콘트라 반군의 숫자는 15,000명까지 증강되었으며, 이들은 좌파 정부를 대상으로 테러리즘을 일삼았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은 최소 3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도덕적으로 동급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콘트라 반군은 고문, 사지 절단,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들은 테러 전술을 동원해 학교와 병원, 협동조합, 교량, 발전소를 파괴했다. 콘트라 반군은 콘트라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인은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으며, 용광로에 넣어 끓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여 밤낮으로 강간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로널드 레이건이 찬양하던 자유투사 콘트라 반군의 실체였다.

 

콘트라 반군을 통한 테러행위와 미국의 경제제재에 시달리자 니카라과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국민소득은 196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거기다 소련의 원조도 줄어들면서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에 제동이 걸렸다. 결국 사회복지 예산이 축소되고 혁명공약 일부가 폐기되면서 국민들의 지지도도 떨어졌다. 결국 1990년 국제연합과 미주기구 등에서 파견한 선거감시단의 입화하에 실시된 선거에서 패배하여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는 12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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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1절입니다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을 기립니다.)

 

1940년 6월 서유럽으로 진군을 시작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함락시켰다독일의 수상 히틀러는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구경했고프랑스 북부는 나치 독일이 남부는 친나치 협력자이자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의 영웅인 필리프 페텡이 통치하도록 했다같은 해 6월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프랑스령 식민지가 무주공산이 되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했다본국이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해있던 인도차이나령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당연히 일본에게 굴복했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 1940년에 만나게 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함께 투쟁해왔다. 이들은 이후 프랑스와 미국 두 서구 제국주의 열강을 무찌른 투사로 발전했는데, 그 시작은 항일투쟁이었다.)

 

1940년 8월에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동남아시아에서의 정치·경제적 우위를 인정해주었고, 9월 22일에는 일본군 주둔과 관련한 협약이 맺어져 대략 2만 5,0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3개의 비행장이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갔다이로써 인도차이나에는 새로운 지배자인 일본이 등장한 것이다일본이 인도차이나에 입성하자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 혹은 일부 민족주의 세력들은 침략자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혼합 종교인 까오다이교(Cao Đài) 세력이나 호아하오교(Hoa Hao) 세력들은 친일 종교 세력으로 성장했다이후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또한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었다.

 

물론 이것은 태평양 전쟁 당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1942년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을 때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수카르노(Sukarno)는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했었다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도 일본군이 침공하자독립운동가 아웅산(Aung San)이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했다따라서 동남아시아 내의 독립운동 세력의 친일화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다당연하게도 이런 환상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그 나라에서 무자비한 통치와 잔혹함을 보이면서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2018년에 발굴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 이 문서를 통해서 호치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이 시기 일본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성과 기만성을 알고 반일투쟁을 준비했던 인물이 있다그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이다. 1890년에 태어나 1911년 식민지 베트남을 떠났던 호치민은 30년 동안 해외를 돌아다녔던 인물이다아시아와 아프리카중동유럽미국과남미 등을 떠돌아 다녔던 호치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던 해 응우옌 아이 꾸옥(Nguyen Ai Quoc)이라는 가명으로 안남 민족의 요구 8개 조항을 즉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1920년대 소련에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으며, 1930년에는 홍콩에서 이른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한 인물이었다. 1940년 일본이 침공해오자 오직 호치민만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인물이었다그렇다면 왜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것인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

 

이것은 호치민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환영하는 이들에게 했던 외침이다. 2018년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으로 한반도가 평화무드에 접어들었을 때프랑스에서 새로운 문건이 발견되었다그것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이 프랑스 파리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를 했었던 것이 당시 프랑스 경찰 당국 문서에서 대거 발굴된 것이다. 1920년을 전후로 해서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인사인 김규식황기환조소앙윤해 등의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감화되었고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여기에는 서구 열강에게 독립을 청원했다 거절당한 양측의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호치민과 교류했던 우사 김규식의 경우 1918년 여운형이 창당한 신한청년당의 일원으로 1919년에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했었다이런 경험이 호치민과의 공감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2017년 미국의 저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켄 번즈(Ken Burns)가 제작한 베트남 전쟁 10부작(PBS Vietnam War Series)을 보면 호치민이 시작부터 반일 투쟁을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0년 전 세계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대부분을 점령했고일본 제국은 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위협하면서 베트남을 점령했습니다또한 그들 동맹인 프랑스 협력자들이 식민지를 계속 통치하도록 했습니다일부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이 오는 것을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망명 중이던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를 프랑스 제국주의와 똑같은 침략자로 여겼습니다그들은 오로지 조국 베트남의 자원 수탈에만 관심이 있고베트남 곡물로 자신의 밥그릇을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었죠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애국자농부노동자상인군인들이여단결하여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그 협력자들을 물리칠 때가 왔습니다.”라고 말입니다.”


(1944년 12월 대프랑스 항전과 대일전을 위해 결성된 베트남 해방군, 맨 왠쪽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이다.)

 

PBS 베트남 전쟁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호지민은 분명 일본 제국이 침공해올 때부터 반일주의자였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뜻 깊은 교류를 프랑스 파리에서 했었다대략 30년 동안 인간 호치민을 연구했던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는 지금까지 나온 가장 두꺼운 호치민 전기를 집필했다.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은 2003년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에도 호치민이 식민지 조선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안남애국자 연합은 표면적으로는 급진적 목표를 내걸지 않았다실제로 조직의 창립자들은 베트남인 공동체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위해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조직의 명칭에 전통적인 베트남’ 대신 안남이라는 말을 쓴 것도 정부에 이 조직이 식민지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그러나 타인(호치민 예전 이름)은 처음부터 이 연합을 이용하여 베트남인 공동체를 인도차이나 식민지 체제에 대항하는 효율적인 세력으로 전환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그는 이미 조선인이나 튀니지인 등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들 나름으로 비슷한 조직을 세운 다른 민족 단체와 접촉하고 있었다.”

 

출처호치민 평전 p.108

 

응우옌 아이 쿠옥은 이 글에 이어 인도차이나와 조선이라는 글을 르 포퓔레르(Le Populaire)에 실었고이어 10월에 같은 잡지에 우트레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 두 글 역시 프랑스의 몇몇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면서도제시하는 해결책은 기본적으로 온건했다.”

 

출처호치민 평전 p.120


(1945년 탄라오에서 찍은 호치민의 사진, 당시 미국 OSS요원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다.)

 

이 구절에서 호치민이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리고 이것은 2018년에 발견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 내용과 상당히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다일본이 침략한 시점부터 반일투사였던 호치민은 1941년에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대에 잠입하여 팍 보(Pac Bo) 동굴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창설했다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베트민의 군대는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이끌었고호치민이 조직한 베트민은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 시점까지 반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이런 점에서 호치민의 반일애국투쟁은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정영목(), 푸른숲, 2003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뉴스홈 김용래 기자, 2018년 9월 30일자 기사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켄 번즈 제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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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길 한반도는 냉전이 끝나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1948년 남한과 북한에 두 개의 국가와 두 개의 체제가 형성된 이후부터 한반도는 지금까지 대략 73년간 분단되어 있는 상태다. 1948년부터 현재까지 북한과 남한 국경선에서 크고 작은 교전부터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까지 간 적이 있었다. 19506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과의 전쟁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거대 진영이 맞붙는 국지전으로 발전했었다. 물론 한국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면전은 1953년 휴전 협정이 성사된 이래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어날 뻔 했던 적은 적잖게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뻔 했던 위기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도 있었다. 20101123일 오후 234분 북한군이 대한민국 서해에 있는 섬 연평도에 170발의 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2명과 한국군 2명이 전사했으며, 북한군의 포격을 받은 가옥과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 사건에서 한국인들이 느낀 충격과 공포는 상당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 또한 전쟁이 날거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 돼지를 죽여야 한다.” 혹은 북한은 믿을 수 없는 적이라는 반북 반공의식이 생겼을 정도였다. 거기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부에서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 몇 시간 뒤 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2차 도발을 할 시에 전쟁이 선포된다.”는 발표를 했었다.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던 로버트 게이츠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대한 군사적인 보복을 계획했었다.”고 폭로했었고, 그것을 미국이 중지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한반도는 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 외에도 1968년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과 울진 삼천 무장공비 사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999년 제1차 연평해전과 2002년 제2차 연평해전, 2015년 서부전선 포격 사건 등 양측의 교전은 많았다. 양측의 긴장관계는 심각해져서, 2017년 여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한을 겨냥하며 화염과 분노를 맛볼 것이라고 북한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의 이러한 발언들인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상대방에 대해 위협할 때 자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양측의 긴장관계가 높아질 때, 북한 내부에서 드러나는 구호나 발언들이 있다. 바로 반미주의적인 발언이나 구호들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반미국가인 것이고, 그러한 반미주의적 구호나 행동들이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을 찾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한국에서 이승만식 북진통일을 원하는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들은 북한이 반미적 구호를 외치는 것과 그들이 그런 구호를 외치는 이유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용어들을 이용해가며, 친미 혹은 숭미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집단들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북한이 반미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반도의 근현대사와 국가가 존속해오면서 겪어야 했던 일련의 과정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자주 내세우는 명분 중 하나는 자신들의 항일투쟁 정통성에 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항일독립운동을 해온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평양에서 소련 군정사령관 치스차코프와 같이 연단에 섰을 때, 놀라움과 더불어 환영의 목소리도 들렸던 것이다. 즉 그런 김일성이 1950년에는 미국과 그 제국주의 군대까지 참전한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나라를 지켰다. 이런 점에서 북한이 생각하는 한국전쟁은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인 것인데, 여기에는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표출된 제국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모순점들이 폭발한 점들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즉 북한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을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의 경우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측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이 먼저 일으킨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찌됐든 그 전쟁 자체는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한 모순점들이 분출하여 전쟁의 상태로 발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전개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북한은 미공군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폭격을 경험했다. 이것은 사실상 일방적인 민간인 학살극에 가까웠다. 미공군이 타격하는 곳들 대다수가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유럽과 태평양에서 사용된 네이팜 폭탄도 북한에 대대적으로 투하했다.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에 투하한 폭탄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에 투하한 폭탄량에 최소 3배 이상이었다. 635,000톤이나 되는 폭탄이 북한에 투하됐다. 여기에 북한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3만 톤을 추가하면 665,000톤이 된다. 민간인 사망자도 극심했다. 이런 야만적인 전략 폭격을 계획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말에 따르면 대략 100만 명 이상의 북한 민간인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 마오쩌둥이 병력을 파견했을 때, 핵폭탄 사용도 고려했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의 독단적인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전쟁의 구도는 국제적인 시각에서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적인 구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보냈던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한반도에서 북진하는 유엔군이 만주에서 공격하고,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 군대가 미군과 연합하여 중국 영토에 상륙작전을 개시하며,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유지를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제국주의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가 중국 남부지역을 위협할 것이라 우려했었다. 이러한 구도를 보았을 때, 당연히 북한이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미군의 폭격은 극심했고, 이런 민간인 학살은 북한 사람들이 반미적인 정서를 불붙히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쟁 초기 한국 우익 청년단이 저지른 신천 양민 학살사건과 각종 민간인 학살들도 북한사람들의 반미정서를 자극했었다. 이러한 반미정서는 전쟁이 끝난 이후 더 발전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온 것이다. 특히나 북한이 전후 재건 이후 군의 현대화에 있어 대공 방어망을 강화했던 이유에는 미군의 야만적인 무차별 폭격도 영향이 컸다. 거기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는 정책들을 펴왔으며,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68년 구정 공세로 맥이 빠져 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운운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후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 또한 당연히 북한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0년대 북한은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GDP가 박정희 정권보다 앞섰던 북한은 1980년대부터 경제가 점차 흔들렸고,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소련이 해체 되면서 경제적으로 위급해졌다. 거기다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가 겹치고, UN을 통한 미국의 경제제재가 지속되면서 결국 무수히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전역을 강타했고, 북한에서 삶의 질이 좋은 평양마저도 고난의 행군으로 고생을 했다. 일각에서는 고난의 행군 책임을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돌리지만, 이러한 책임론은 매우 의미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맞아 떨어지지도 않으며 설득력도 매우 부족하다.

 

영화 강철비2에서 나온 것처럼 실제로 북한은 소련 해체 이후 미국과의 수교협정을 요구했다. 여기서 이를 완벽히 무시한 대상은 바로 미국이었다. 거기다 1994년 전쟁 위기에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소말리아 사태 개입이나 유고 내전 개입처럼 북한과 실질적인 전쟁을 치르려 했다. 아니 베트남 전쟁이나 걸프전쟁처럼 침략전쟁을 실행하고자 했었다. 그 시기 클린턴 정부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다. 팀스피리트 훈련엔 미군과 한국군 20만이 동원되었고, 평양에 대한 핵폭격 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대규모 상륙훈련 등이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대북 도발은 예전부터 미국과 한국이 자주 해오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북한이 선택한 길이 바로 핵무장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기에 북한이 미국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 북한이 반미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앞에서 설명한 역사적인 맥락과 더불어 정치적이고 국제적인 상황 속에서 알 수 있다. 사실 한국에서 이른바 대남도발로 알려진 사건들의 실질적인 원인을 판단해보면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반대급부에서 행해진 일련의 사건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본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나 수구세력들은 이런 빨갱이 새끼라고 하며 욕과 비난을 일삼겠지만, 그들이야 말로 이러한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몰역사적 시각을 가진 것이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무조건적으로 동조하는 제국주의자들이다. 지난 해 미국과 이란의 전쟁 상태에 갔을 때, 호르무즈 해협에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한국군을 파병해야 한다.” 주장하며, 반전시위를 하던 이들을 빨갱이 혹은 종북이라 운운했던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제국주의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한반도의 긴장관계와 평화수립을 위해선 북한이 왜 이러한 결정을 했고, 왜 이러한 상황에 놓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이해가 없으면 상호존중과 이해관계 속에서의 평화체제 건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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