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소병국 교수의 저서 동남아시아사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4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인도네시아는 20세기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네덜란드는 영국프랑스미국스페인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그랬듯이 폭압적인 통치를 자행했다. 20세기 초 인도네시아에선 이슬람 개혁주의자 집단과 이로 인한 개혁운동이 벌어졌고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에는 스네블리트(마링으로 중국에서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던 인물이다.)의 주도로 사회주의 단체가 창설되었다러시아 혁명 이후 인도네시아에선 1920년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창당됐다.

(수카로노, 수카르노는 현대 인도네시아의 건국의 아버지다. 지금도 국부로써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후 제3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 맞서 인도네시아에선 독립운동과 각종 사회혁명이 일어났는데여기서 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다그가 바로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Sukarno).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한 수카르노는 이슬람과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결합하고자 했다. 1930년대에는 네덜란드 당국의 탄압을 받아 감옥을 왔다 갔다 했다. 1930년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당국의 탄압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는데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일본은 1941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대로 점령했다. 1942년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침략했고, 3월 8일 네덜란드 총독의 항복을 받아 점령을 마쳤다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었던 자바 해전이 있었던 것도 1942년 초였다자바해전 승리 이후 인도네시아의 점령을 마무리한 일본은 보르네오를 포함한 동부 인도네시아 지역을 제2함대의 병참기지로 만들기도 했다.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2018년 국내에 출판된 인도네시아사 관련 서적이다. 비교적 최근에 출판됐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입성하자 수카르노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군을 환영하기에 이르렀다수카르노 또한 일본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갔는데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군정 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버마나 태국 등지로 끌려갔고이들의 숫자는 최소 15만 명에 달한다그 외에도 일본 군정의 화폐 남발로 1943년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불리해진 전황과 더불어 인도네시아에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43년 초 전황이 불리해지자 군정은 준 군사 조직을 만들어 대중 동원에 힘을 쏟았는데, ‘뻬따로 불리는 조국방위군이 창설되었다전쟁이 끝날 무렵엔 각종 준군사조직을 총칭해서 의용군의 수가 자바에서는 3만 7,000발리에서는 1,600명 그리고 수마트라에서는 2만 명에 달했다이 군대는 전후 인도네시아 국군의 근간이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던 인도네시아 독립군)

 

1945년 초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게 됐다특히나 일본군의 폭압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통치가 불러온 결과였다초기에 일본군정 아래 성장했던 청년들과 군사조직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었다이를 계기로 1945년 3월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BPUPKI)를 설립하고독립을 향한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당연히 여기에는 수카르노도 참가했으며대통령 중심제와 단일 공화국을 근간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인 45년 헌법을 입안했다이들은 독립 실무준비위원회를 자카르타에서 발족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고자 했다.

 

그러는 사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 선포를 주저했었는데청년 집단들이 그 둘을 납치해 독립 선포를 강요했다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수카르노는 결국 8월 17일 자신의 집 앞에서 우리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선언서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이렇게 해서 한국의 광복절보다 2일 늦은 8월 17일을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로 국가에서 기리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인 양칠성, 일본군에 강제징용되었던 그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합류해서 싸우다 1949년에 전사했다. 이는 신비한 티비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 있다.)

 

수카르노의 독립선포 이후 청년집단을 무장투쟁 단체를 결성해 일본군 기지를 습격하여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다그러던 과정에서 그해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영국 동남아시아 사령부 예하의 호주군이 인도네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10월 25일 이후 인도네시아 무장세력과 영국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영국군 사령관인 말라비 장군이 사망했는데교전이 있었던 수라바야 같은 경우 3주 동안 평정작업이 이루어졌다여기서 인도네시아인 6,000명이 사망했다.

 

그 이후 영국군과 호주군은 철수하고 네덜란드 세력의 복귀가 임박해졌다인도네시아에 다시 복귀한 네덜란드는 이른바 연방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반복했다그러면서 1946년 7월부터 자보와 수마트라 외의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시작했으며이로 인한 인도네시아인 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1947년 7월 20일 네덜란드는 15만 명 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초기 전세는 네덜란드군이 삽시간에 자바의 주요 항구와 마두라동부 자바의 설탕 산지 등고같은 시설들을 점령하면서 공화국의 군대가 후퇴하게 됐다이후 독자적인 사회주의 세력이 이른바 마디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여기서 수카르노는 이들을 진압했다이로 인하여 공화국에서 좌파 세력이 제거되고미소냉전 쪽에서 서방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그 결과 미국을 포함한 서방 진영이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됐다물론 이 과정에서도 인도네시아 공화국군과 네덜란드 사이의 전투와 교전은 지속되었으며네덜란드는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표현한 상상화)

 

1948년 12월 8일 네덜란드는 이른바 렌빌 휴전협정을 파기하고군사행동을 통해 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족자카르타를 점령했다그러나 이것은 국제 사회에서 네덜란드가 비난에 휩싸이기 충분했다더 나아가 공화국 군부는 게릴라 부대를 활용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게릴라 전을 감행했다양측의 전투가 계속되는 사이 네덜란드가 세운 연방 소속 국가들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고, 1949년 7월 1일 공화국 정부는 인도네시아가 독립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네덜란드에 요구했다당시 마셜 플랜으로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던 네덜란드는 미국의 압박에 시달렸고결국 네덜란드는 12월 28일에 인도네시아를 독립국가로 인정했다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은 수카르노와 이슬람 그리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의 승리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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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지금도 우리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물론 이제는 바이러스가 어디서 시작했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 전대미문의 질병으로 인하여 인류가 받고 있는 고통은 너무나도 크다. 20214월까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보도가 되지 않은 두 나라가 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전 세계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인 코로나19(COVID-19) 실시간 상황판을 보면 두 나라만 회색으로 색칠되어 있다. 그 나라가 바로 투르크메니스탄과 북한이다.

 

투르크메니스탄과 북한은 공식적인 통계에서 지금까지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보도되지 않았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 충분히 그러한 보도를 의심할 가치는 매우 높다. 왜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질병이기에 아무리 힘을 쓰고 막는다 하더라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반증으로 현재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 그리고 포클랜드 제도, 뉴칼레도니아 등과 같은 나라에서도 확진자가 적게나마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 외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전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초기 방역을 철저하게 하거나 국경 및 항로봉쇄와 같은 조치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아주 효율적으로 방어한 나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뉴질랜드나 대만,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가 그러하다. 하지만 이 나라들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는 분명 보고가 되었고, 지금도 적게나마 존재한다.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 의료강국으로 전 세계에 의사들을 보내 이론적 실천을 하는 쿠바 또한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물론 엄청나게 창궐하는 미국과 가까이 있으면서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쿠바는 매우 모범적인 방역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이러한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보았을 때, 북한에 공식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0명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다. 그것은 북한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려고 하는 나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분명히 숫자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북한이 최소한 현재 라오스 정도의 확진자(49명이다.)가 나왔다고 본인들 스스로 보도했다면, 개인적으로 믿어주기라도 하겠지만 공식 확진자 0명은 그 수치에 문제와 의구심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의구심과 문제제기와는 별개로 북한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는가?”하는 문제는 개별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의심과 보도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1차 유행부터 퍼졌기 때문이다. 국내 어용언론이나 서방언론들은 극우들에 의해 혹은 극우적 편견에 의해 재생산된 근거 없는 억측과 루머들을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비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과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대표적인 자료로 이런 것이 있다.)

https://blog.naver.com/blueload487/222132355664

https://www.dailynk.com/20201013-3/

 

북한이 자신들의 국경을 차단한 것은 20201월부터였다. 이 시기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국 우한에서 창궐하여 전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북한은 우선적으로 122일에 중국인 관광객들은 원천적으로 입국 금지 조치 시켰는데, 당시 북한이 통보한 내용은 우한 폐렴 때문에 북한은 관련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중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무기한 중단하기로 했다.”였다. 그리고 이것은 국경 폐쇄를 겸하는 조치였다. 또한 초기 해외 입국하는 사람 거의 4주 가까이 격리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관련기사)

https://www.nocutnews.co.kr/news/5276984

https://www.news1.kr/articles/?3822722

 

따라서 북한은 2020122일부터 국경을 폐쇄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점차 다른 나라로 퍼지던 213일 동아일보에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다. 그것은 탈북자 출신의 기자 주성하가 쓴 코로나 예방차원 격리된 관료, 몰래 대중목욕탕 갔다가 총살이었다. 이러한 기사가 나오자 국내에선 북한의 코로나 예방법이 총살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북한에 대한 그 어떠한 거짓기사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한국시민들에게 이러한 기사는 그 임팩트가 정치성향을 가리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북한 관련 코로나 루머들이 있었고, 20206월에서 7월 사이 한 탈북자 출신이 월북을 하면서 북한의 코로나 바이러스 최초 확진자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시 북한 측에서 모두 검사해본 결과 공식적인 측면에서 다 음성이 나왔다. 2020년 봄에서 여름 사이 일부 양심 없는 탈북자 단체에서 대북전단 살포와 같은 유치찬란한 짓거리를 벌였는데, 이들이 보낸 대북삐라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환자의 채액이 들어있기도 했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극우세력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사실에서 북한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창궐시키고자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에도 2020101WHO 평양사무소장이 북한 사람 3,374명을 대상으로 검사한 결과 모두 음성이 나왔다는 보도가 있긴 했다.

 

(관련기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0&sid2=268&oid=001&aid=0011916756&fbclid=IwAR2dupq-lpPPhEYr4ZTGe_bjZcgMfEx3sF9Ag3TmZXwz4eOUMcyvyy4D2Fs

 

그러는 사이 20201010일 북한에선 당창건 75주년 열병식을 평양에서 가졌는데, 이 열병식에선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국경을 봉쇄하여 원천차단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퍼레이드는 북한군의 업그레이드된 탱크나 각종 군 장비 그리고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등장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가지게 했지만 말이다. 이 열병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북한이 이런 전 세계적 질병사태에서 수도에서 열병식을 가질 정도로 자신들 나름의 방역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일수도 있다. 그 이후에도 2021년 신년 행사와 114일 조선로동당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도 거행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놓고 보았을 때, 북한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창궐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큰 행사들은 기본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114일 북한의 열병식은 2020110일의 열병식과는 조금 다른 모습도 있었다. 이것은 열병식 행사에 참가한 북한 시민들의 마스크 착용률이 생중계되는 텔레비전에서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높아진 것이었다. 그리고 2021년 이후 보도되는 북한의 거리의 모습에서도 2020년 보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즉 이러한 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공식 확진자가 0명이라는 보도는 분명히 의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코로나가 창궐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높게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인도적 지원단체가 보낸 방역물자를 상당량 수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02091,888만 달러였던 대중국 수입량이 10월 들어 26만 달러로 98%이상이나 감소했다. 이것은 북한이 자력갱생하고자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해 여름에 북한은 수해로 무너진 집 수천 세대를 새로 짓고, 복구 작업을 한 것인데 이것은 북한 스스로 밝혔듯이 유사시 비축해둔 물자를 털어서 진행한 복구 잡업이었다.

 

(임종금 기자의 페이스북 글)

https://www.facebook.com/rosua.kr/posts/3699109793478653

 

(참고한 기사)

https://www.news1.kr/articles/?4263144

 

만약에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북한에서 엄청나게 확진자가 대량으로 창궐했다면, 적어도 그 구호물자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자신들 내부에서 어느 정도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앞에서 누누이 설명한 바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그것도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 그 외의 아프리카와 태평양 사모아를 포함한 미크로네시아 지역까지 창궐하는 전대미문의 질병속에서 공식적인 확진자 0명이라는 주장은 신뢰가 매우 떨어진다. 물론 주성하 기자가 주장한 코로나 확진자를 총살해서 없앴다는 식의 주장도 너무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으로 현송월 포르노물 총살 기사처럼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아무튼 북한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이겨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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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인선 교수의 저서 베트남의 역사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베트남의 역사는 거의 수천 년의 역사다. 이들 역사의 시초는 어디일까. 한국에는 고조선부터 시작하는 단군신화가 있다. BC 2333부터 시작한 것으로 표현되는 고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한국에서는 4~5천년의 역사라고 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BC 660년 초대 진무 천황부터 잡아서 2,600년 혹은 3,000년의 역사라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 하면서 일본은 3천 년간 패배하지 않은 나라다.”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로 그 연대기는 나름 유명하다.

 

물론 한국의 단군신화도 일본의 진무천황 신화도 어디까지나 신화에 기반을 둔 이야기일 뿐이고, 실질적인 사료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고대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질적인 연대는 그거보다 더 낮은 편이며, 박노자 교수나 이문영 작가의 주장처럼 고조선의 실질적 연대는 BC 1500년 전이다. 일본의 진무천황 신화 역시 그러하다. 일본의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 또한 진무 덴노는 신화이지 실존 인물이 이니다라고 주장했다가 공산주의자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 비록 사료적인 부분에선 미약한 근거를 가질지라도 어쨌든 한국도 일본도 고대역사의 기원을 찾는다.

 

그렇다면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베트남은 어떠할까? 베트남 또한 자신들만의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다. 베트남 건국설화에 따르면 중국신화에 나타나는 신농씨의 3대 후손인 제명이 제의를 낳고 얼마 후 남방으로 순행하여 오령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제명은 부 띠엔(Vu Tien)의 딸을 만나 록 뚝(Loc Tuc)을 낳았다. 한편 제명은 제의에게 북방을 다스리게 하는 한편, 록 둑을 낀 즈엉 브엉(Kinh Duong Vuong)’에 봉하여 그에게 남방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 나라가 바로 씩 꾸이 꾸옥(Xich Quy Quoc)이라 불렸다.

 

낀 즈엉 브엉이 왕이 된 연대는 BC 2879년이다. 이것은 한국의 단군신화보다 500년이나 빠르다. 예외적인 얘기로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역사를 BC 3000년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며 과장된 역사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BC 2879년 역시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려는 차원에서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낀 즈엉 브엉은 동 딘 꿘(Dong Ding Quan)의 딸을 아내로 맞아 후일의 락 롱 꿘(Lac Long Quan)을 낳았는데, 락 롱 꿘은 여러 제도를 완비하고 얼마 후 바다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가 없는 공백기를 틈타 제의의 아들 제래가 아내 어우 꺼(Au Co)를 데리고 남방으로 침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락 롱 꿘이 돌아와 어우 꺼를 보고 유혹하여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어우 꺼는 커다란 알을 하나 낳았고,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어느날 락 롱 꿘이 어우 꺼에게 본인은 물이 종족이고 어우 꺼는 산이 종족이니 헤어지자고 했는데, 아들 100명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50명은 어우 꺼를 따라 산으로 가고, 다른 50명은 락 롱 꿘을 따라 바다로 갔다.

 

어우 꺼를 따라 산으로 간 50명의 아들 중 가장 강했던 훙 브엉(Hung Vuong)이 나라 하나를 세웠는데, 그 나라 이름이 바로 반 랑(Van Lang)이라고 불렸다. 오늘 날 베트남 사람들은 락 롱 꿘과 어우 꺼를 그들의 시조로 생각하고, 훙 브엉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긴다. 마치 우리가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믿기 힘든 내용을 우리 역사의 시초로 받아들이듯이 말이다.

 

이렇게 건국되었다고 알려진 반 랑은 기원전 세기 중반에 멸망할 때까지 18명의 왕이 있었다고 한다. 반 랑의 역대 왕은 모두 훙 브엉으로 불렸고, 락장과 락후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며, 피지배층은 락민으로 그들의 생업은 초보적인 수준의 농업과 어로였다. 베트남의 역사서에 따르면 반 랑 왕국은 BC 257년에 멸망했는데, 안 즈엉 브엉(AN Duong Vuong)이 어우 락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반 랑의 멸망이 BC 221년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반 랑의 연대기에 대해 더 이야기하겠다. 반 랑의 전설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19세기 말 베트남 북부의 타인호아(Thanh Hoa) 성의 동 선(Dong Son) 지방에서 발견된 BC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정교한 청동기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입증되었다. 따라서 반 랑은 구전되어서 내려져온다는 설화도 신화적인 성격이 강한데다가 각 왕들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 때문에 베트남 학계에서는 반 랑이 대체적으로 기원전 7세기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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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꽝남성 지도, 하미마을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 현에 있다.)

 

베트남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가다보면 호화로운 리조트와 골프 코스가 늘어서 있는 도로가 있다그 고속도로는 1A 고속도로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현장이기도 했다지금이야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냥 차를 타고 지나쳐 가는 곳이 되었지만, 1A 고속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을 지나다 보면 위령비 하나가 있다그 추모비가 바로 1968년 한국군이 저지른 하미마을 학살

(Ha My massacre)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다.

 

노란색 담장이 있는 뜰 안에 있는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는 사원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정사각형 뜰의 중앙에 높은 연단이 자리 잡고 있고그 위에 푸른 널빤지로 이은 2층 지붕을 열여섯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비각이 있다그리고 그 연단에는 1968년 학살 당시 죽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1880년생이고가장 나이가 어린 희생자는 1968년생이다그들의 이름은 보 자인(Vo Danh)이라는 글자로 새겨져 있다도대체 이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주체는 누구일까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과 주변 마을 사람들은 바로 한국군이 저지른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한다. 1968년 당시 하미마을에선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다총 30만 명 이상이 참전했고연 5만 명 이상의 한국군대가 남베트남에 주둔했었다이들은 주로 베트남의 휴양지인 다낭을 기점으로 배치되었고주로 꽝남과 꽝응아이 그리고 빈딘 성에서 작전을 이어나갔다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가 전투부대로써 남베트남에서 여러 작전들을 수행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들이 벌인 작전들은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ory)’으로 전투지역을 설정해놓고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로 설정한 곳에서 어떤 일을 벌여도 상관이 없었다즉 이 얘기는 자유사격지대에 있는 목표물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고 총으로 쏴죽이거나 수류탄으로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었다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 연합군의 민간인 학살은 구조적으로 발생할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따라서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의 민간인 학살은 어떻게 보면 수색과 섬멸 작전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에 적힌 학살자 명단, 이 중에는 1살, 2살, 3,살, 4살, 5살의 이름도 적혀 있다.)

 

베트남 전쟁의 양상은 1965년부터 67년까지 대략 2년 동안 미군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해가 바뀌어 1968년 구정에 있던 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전황을 바꿔 놓았다. 1968년 1월 31일 구정 공세가 발발하면서 베트남 전쟁의 양상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유리해져갔다물론 전투에서야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을 버티기 힘들었지만반전여론이 강해짐에 따라 미국의 상황은 불리해졌다한편 구정 공세 이후의 전투는 보다 잔혹해진 양상을 보였다미군의 그 악명 높은 전쟁범죄인 피닉스 작전이 벌어진 것도 이때다.

(하미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쯔엉티투 할머니, 그는 학살에서 가족을 잃었다.)

 

한국군 또한 이 시기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대표적으로 1968년 2월 12일에 일어난 퐁니퐁넛 학살이 그러했다퐁니퐁넛 학살이 발생한지 2주 뒤디엔반 현 디엔즈엉 사에서 한국군에 의해 발생했는데그게 바로 하미마을 학살(Ha My massacre)이었다. 1968년 2월 25일 새벽 청룡부대 2개 중대가 하미 촌의 따이 마을과 쯩 마을을 포위했다마을을 포위한 한국군은 오전 7시 쯤 대략 135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학살당한 135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1880년에 태어난 88세 여성이고가장 어린 희생자 3명은 1968년에 태어났다그 외에도 학살당한 이들 연령대가 2, 3, 4살이다쉽게 말해 한국군은 하미마을에서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에서 자행했던 민간인 학살을 그대로 했다.

 

한국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이 학살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2001년 당시 한국에 있는 베트남참전전우복지회가 새로운 정서와 화해 그리고 신뢰 회복을 목적으로 거대한 위령탑을 세웠는데그 과정에서 마을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면서 학살 사실에 대한 기록 삭제를 요구했었다물론 진실을 기록하기 원했던 주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으며주민들의 바람대로 학살 기록은 그들이 겪은 대로 기록되었다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인 팜티호아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다호이안 쪽에서 군대는 7시에서 8시 사이에 들어왔다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다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군데로 모였다그런데 한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나는 자식을 몸으로 감싸고 엎드렸다수류탄 하나가 등으로 날아왔으나 터지지 않았다그때 수류탄 하나가 더 날아와 다리가 잘렸다나는 죽은 척 엎어져 있었다밤이 되도록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밤이 되자 나는 기어가 숨었다사람들이 나를 데려갔다그 당시에는 치료할 약도 없었다나는 그때 네 명의 가족을 잃었다자식 둘과 임신 4개월의 조카며느리를 잃었다이 며느리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우리 며느리는 참 예뻤다저항을 했으나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당시에 우리가 살았던 집이 양민 학살터였다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그 터에서 살기가 싫고 무서워 이 집으로 옮겼다그날 죽은 사람들의 수는 137명이다.”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2018년 퐁니퐁넛 학살 희생자이자 동명이인인 응우옌티탄과 함께 한국에 와서 한국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었다하미마을 학살 당시 11살이었던 응우옌티탄은 학살의 현장에서 어머니남동생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 2명을 잃었다그리고 그 또한 한국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허리를 심하게 다쳤다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기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와 남동생의 유해를 지금까지 찾지 못해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얘기도 남겼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다른 학살 피해자와 유가족들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대신하여 묻습니다어째서 한국군은한국 정부는 그러한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그 어떤 인정도사과도 하지 않는 것인가요.”

(2018년 한국에 와서 사과를 요구했던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응우옌티탄은 학살의 현장에서 어머니남동생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 2명을 잃었다.)

 

이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지도 53년이 지났다그러나 당시 피해자들의 마음속에는 53년 전 당시의 민간인 학살 경험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며지금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베트남 전쟁 8년 기간 동안 한국군은 대략 5,000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부상당했다또한 이들은 군사기록상 4만 1,000명 이상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사살했다그러나 1990년대 이후 밝혀진 9,000명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기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어쨌든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135명을 무차별 학살한 하미마을 학살 또한 그런 전쟁 중 하나다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돈을 번 전쟁으로 인식하는 우리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우리가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반성해야할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참고문헌

 

미안해요 베트남이규봉푸른역사, 2011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비엣 타인 응우옌(), 부희령(더봄, 2019

 

뉴스타파 목격자들 전쟁 2책임없는 전쟁뉴스타파, 2016.05.27.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서울신문, 2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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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게시됐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가 물러나자 미국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켰다베트남을 분단시킨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그랬듯이 베트남의 이승만인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친미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고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했던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이후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치에 분노한 민중들은 1960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창설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

 

즉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과 한국군이 베트콩베트콩!’라고 비하하고 폄하하던 병사들은 사실 남베트남의 부패하고 반민중적인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했던 그리고 그 혁명적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정글 속에서 죽어가고 희생했던 혁명가들이었다이런 점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호치민과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은 과거 프랑스가 했던 짓들의 연장선상이었고 더 추악하고 잔혹했다.

(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 해병대 대원)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미국이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을 위해 선택한 전략은 바로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은 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배치했고이 고문단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와 한반도에서 그랬듯이반혁명 군대를 지원하고이른바 빨갱이 소탕에 나섰다이들의 규모는 1961년 미국의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면서 대폭 증가했다. 1961년 당시 900명이었던 미군사고문단은 1963년 불과 2년 만에 16,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더 나아가 케네디 정부는 네이팜 폭탄과 에이전트 오렌지를 포함한 다수의 고엽제 살포를 공식적으로 허가했다이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더 잔혹해졌다.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상황은 혼란의 연속이었다가족정치와 독재정치로 악명을 떨치던 응오딘지엠의 비인간성은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는 한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면서 극에 달했다응오딘지엠의 무자비한 불교도 탄압으로 목숨을 잃은 고승 틱광둑의 소식에도 불구하고디엠 정권의 막장성은 더 극명하게 표출되었다응오딘지엠의 제수인 마담 누(본명 쩐레수언)는 그 중놈이 바비큐가 된 게 뭐가 문제냐?”라는 식의 발언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했고이에 따라 남베트남 민중의 분노와 미국 내에서의 여론도 흔들렸다.

(다낭에 상륙한 대규모의 미 해병대)

 

결국 미국은 CIA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계획했고이를 실행에 옮겼다. 1963년 11월 1일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로 응오딘지엠은 사살됐고남베트남에는 즈엉반민이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물론 이 정부 또한 무능해서 또 다른 군부 내부의 쿠데타가 발생했고이로 인한 정권 교체는 1965년까지 계속되었다당시 남베트남 정권은 이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1963년 당시 베트콩은 남베트남 지역의 75% 이상을 장악한 상황이었다민중은 베트콩 편이었고디엠 정권 시기 건설된 전략촌들은 베트콩에게 흡수당했다.

 

남베트남의 군대는 전투에서 너무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응오딘지엠 정권 시기 일어났던 압박 전투에선 300명의 베트콩이 1,500~1,7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는데이런 비슷한 상황들이 응오딘지엠 정권 몰락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 반복됐다결국 미국이 또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그것은 바로 전쟁 참전의 명분을 조작하는 것이었다따라서 1964년 8월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물론 통킹만 사건은 사전에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자작극이었다.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남베트남의 여학생들)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했지만남베트남은 무너지고 있었다같은 해 11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근처에 있는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베트콩에 기습 공격을 받아 수십대의 항공기와 헬기가 파괴되었다. 12월 빈지아 지역에선 남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교전을 치렀는데이 전투는 호치민의 표현대로 작은 디엔비엔푸였으며압박 전투 때와 같이 남베트남군은 참패하고 패주했다.

 

1965년 2월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베트콩에 의해 기습 공격을 받아 8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그로부터 6일 뒤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공습 명령을 내렸고이른바 롤링썬더 작전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물론 플레이쿠에서의 기습 공격은 당시 남베트남에서 일어났던 베트콩이 일반적인 기습 공격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미국은 이 사건을 과장하고 확대해석하여 북폭 명분을 합리화했다.

(미국과 남베트남의 우정을 얘기하는 현수막)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는 북폭 게시와 더불어 지상군 파병을 감행했다베트남의 첫 번째 파병 부대로는 미 해병대가 선택되었다대략 3,000명 정도의 미 해병대가 남베트남의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인 다낭(Da Nang)에 상륙하는 걸로 결정됐다. 1965년 3월 8일 미국 정부는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미 해병대 대원들로 하여금 상륙정에 태워 해안가에 상륙하도록 했다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군들은 상륙전까지만 해도 전투가 있을 것이라 긴장했었다뜻밖에도 그들을 맞이한 것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기다리던 베트콩이 아니라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남베트남의 여학생들이었다.

(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군 탱크)

 

당시 남베트남의 여학생들의 환영식과 더불어 해변가에는 당신은 꼭 여기 있어야 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예상 밖의 환영식을 받은 미군은 긴장을 풀었고현장에 있던 카메라맨들은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냈다당시 미 해병대 대원으로 다낭 해변에 상륙했던 병사 필립 카퓨토는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에서 당시 본인이 느낀 감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제가 가장 놀란 건 베트남이 정말 아름답다는 거였어요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대나무와 야자수 숲 안에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죠멀리는 파란색의 산악 밀림이 펼쳐져서 마치 지상낙원 같았어요베트남 여인인지 여학생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줄지어 있던 게 기억납니다마치 천사들이 내려온 것 같았어요꽤 놀랍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이렇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니 말이죠.”

 

다낭항에 상륙한 미군들은 해변을 벗어나 남베트남 내륙으로 진입해 들어갔다당시 다낭에 상륙했던 미 해병대는 군용트럭과 탱크도 함께 상륙했고 이들도 내륙으로 들어갔다이런 과정에서 미군들은 또 놀라운 광경을 보기도 했다초록 군복을 입고 M-14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들이 지나가는 걸 본 한 베트남 노인은 다음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미군을 환영했다.

(당시 상륙했던 젊은 미 혀병대 대원)

 

“Viva La Francais”

 

바로 프랑스 만세였다즉 그 노인은 미군을 보고 프랑스군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1965년 3월 8일에 있던 미 해병대의 다낭 해변 상륙작전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빠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이들이 처음 상륙한 이후 총 280만 이상의 미군이 베트남을 거쳐 갔고, 1968년에는 이들의 숫자가 54만 9,000명에 육박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으며 패배했다따라서 미 해병대의 성공적인 다낭 상륙작전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패배를 향한 행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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